강철의 신, 대장장이 강무진

제10장 — 최전선에 놓은 돌

검은 깃발 아래로 창끝이 솟았다.

기병 열둘에 보병은 서른 남짓이었다. 협곡의 너비로 보아 한꺼번에 달려들 수 있는 말은 셋이 한계였고, 양쪽 벽은 가팔랐으며 바닥에는 앞선 전투에서 부서진 수레와 사슬이 널려 있었다.

강무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금속의 움직임을 더듬자 사람들이 얼마나 멀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수레바퀴의 축이 숲길 안쪽으로 느리게 멀어졌고, 부상자를 업은 이들의 허리쇠와 단추가 그 뒤를 따랐다.

아직 부족했다.

“라칸.”

“듣고 있어.”

“왼쪽 벽에 붙으십시오. 첫 기병만 넘기면 됩니다.”

라칸은 묻지 않고 움직였다. 다친 다리를 끌면서도 방패를 든 각도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실바나가 협곡 위쪽을 살폈다.

“화살은 열한 발입니다.”

“말을 쏘지 마십시오. 선두 기수의 어깨를 노리십시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이 쓰러지면 길이 열립니다. 기수가 쓰러지면 말이 겁을 먹습니다.”

실바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위를 당겼다. 바람이 협곡 벽을 훑고 내려와 화살깃을 흔들었다.

도리아는 수레에서 떼어 낸 차축을 망치로 두드려 보았다.

“속이 썩었어. 한 번 막으면 끝이겠군.”

“한 번이면 됩니다.”

“쇠맛 좀 아는군.”

도리아가 차축을 비스듬히 세운 곳은 부러진 수레 두 대 사이였다. 낮게 걸어 둔 탓에 달려오는 말의 눈에는 잘 띄지 않을 높이였다.

적 기병이 속도를 올렸다.

말편자가 바닥을 찍을 때마다 강무진의 손끝이 저렸다. 앞말 오른쪽 뒷굽의 못 하나가 느슨했고, 둘째 말의 재갈은 구리 함량이 높아 무른 데다 셋째 기수의 흉갑은 왼쪽 겨드랑이 아래 리벳이 덜 박혀 있었다.

그는 검을 낮췄다.

거리는 서른 걸음.

스물.

열다섯.

“지금.”

시위가 울리자 화살이 선두 기수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기수가 뒤로 젖혀지며 고삐를 놓쳤고, 놀란 말이 고개를 틀자 바로 뒤의 말이 피하려다 차축을 밟았다.

도리아가 세워 둔 축이 휘었다.

쇠는 한 번 버텼다.

말 두 필이 서로 부딪치며 협곡의 선두가 엉켰다. 강무진은 그 틈으로 들어가 검등으로 첫 기수의 턱을 쳐 떨어뜨리고, 몸을 돌리며 둘째 기수의 재갈을 움켜쥐었다.

무른 구리가 그의 감각에 따라 휘었다.

재갈이 한쪽으로 접히자 말이 고개를 세차게 들었고, 기수가 중심을 잃은 순간 라칸이 달려들어 방패 모서리로 그의 옆구리를 밀었다. 기수는 벽에 부딪친 뒤 굴러떨어졌다.

“셋째!”

라칸의 외침과 동시에 창이 날아왔다.

강무진은 검을 세워 창날을 흘렸다. 손목이 묵직하게 울리는 사이, 마족 병사가 말 위에서 창을 거두려 했다.

그보다 먼저 강무진이 흉갑의 리벳을 잡았다.

미세하게 튀어나온 쇠못 세 개가 동시에 빠지며 흉갑 왼쪽 판이 벌어졌고, 그 틈이 기수의 팔을 물었다. 실바나의 두 번째 화살이 투구와 어깨 사이를 스치자 기수가 몸을 숙였으며, 그 순간 도리아의 망치가 말의 앞을 막았다.

“내려와라!”

망치가 안장 머리를 부수면서 기병이 땅에 떨어졌다.

뒤따르던 보병들은 쓰러진 말과 수레 잔해 앞에서 멈췄다. 검은 깃발을 든 마족이 전열을 가다듬으라고 외쳤지만, 말이 아직 살아 몸부림치는 바람에 좁은 길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강무진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났다.

“갑니다.”

라칸이 넘어진 기수의 검을 집으려 하자 강무진이 고개를 저었다.

“무겁고 균형이 나쁩니다.”

“빈손보단 낫지.”

“당신 칼은 수레에 있습니다.”

라칸의 귀가 뒤로 젖었다가 다시 섰다.

“그건 알고 있었나?”

“쇠가 어디 가겠습니까.”

도리아가 헛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실바나는 마지막으로 화살 한 발을 더 날렸다. 깃대를 맞은 화살이 검은 깃발을 꺾자 네 사람은 숲길로 몸을 돌렸다.

마족 보병이 잔해를 치우는 소리가 뒤를 쫓았다. 강무진은 숲 어귀에 들어서며 손을 펼쳤고, 협곡 바닥에 흩어진 사슬 조각들이 일제히 떨렸다.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양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녹이 슨 쇠는 내부에 미세한 균열이 가득했기에 힘으로 당기면 끊어질 터였다.

강무진은 결을 따라 조각들을 맞물렸다.

사슬이 뱀처럼 바닥을 기어 부서진 바퀴와 차축을 휘감고, 쓰러진 말 사이로 엉기자 뒤늦게 길을 뚫던 마족들이 고함을 질렀다.

강무진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금속을 느끼는 것과 움직이는 것은 달랐다. 무게가 커질수록 뼈마디 안쪽에 쇳덩이를 매단 듯한 통증이 번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접었다.

사슬이 마지막으로 조여들면서 협곡 입구의 잔해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오래 버팁니까?”

실바나가 물었다.

“한 시각.”

강무진은 숨을 고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잘하면 두 시각입니다.”

“충분합니다.”

실바나가 앞장서자 나뭇가지가 그녀의 손짓을 따라 낮게 기울었고, 부상자들이 지나간 흔적은 잎 아래로 가려졌다.

그날 밤, 일행은 북동쪽 폐촌에 닿았다.

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세 채뿐이었다. 지붕은 절반이 무너지고 우물에는 낙엽이 쌓여 있었으나, 돌담이 바람을 막아 주었고 뒤편으로는 얕은 개울이 흘렀다.

로젠은 도착한 이들을 빈집과 헛간에 나누어 들였다. 실바나는 상처를 씻은 뒤 숲에서 약초를 구했으며, 라칸은 다친 다리를 동여맨 채 경계 순번부터 짰다.

도리아는 폐가의 화덕을 뜯었다.

“돌은 쓸 만해. 연통은 형편없고.”

강무진은 수레에서 사슬을 내렸다. 불을 피울 숯도, 제대로 된 풀무도 없었기에 그는 가장 얇은 고리를 골라 돌 위에 올렸다.

아이샤가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이의 목에는 새 이름을 새긴 철패가 걸려 있었고, 손에는 여전히 찌그러진 목고리가 들려 있었다.

“그걸 계속 갖고 있을 거냐.”

“바꿔 준다며.”

강무진은 아이의 손을 보았다. 쇠고리를 쥔 손바닥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엇으로 바꿀지 정했나?”

아이샤는 폐촌 한쪽을 가리켰다. 밭에는 잡초만 무성했고, 썩은 자루가 달린 괭이 하나가 담에 기대어 있었다.

“저거.”

“괭이?”

“먹을 거 만들잖아.”

강무진은 잠시 고리를 내려다보았다.

“좋다.”

도리아가 무너진 화덕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 쇠로 괭이를 만들겠다고? 크흠, 반은 걷어내야 할 텐데.”

“반은 남습니다.”

“숯은?”

“내일 굽겠습니다.”

“풀무는?”

“수레 가죽을 쓰면 됩니다.”

도리아가 수염을 쓸어 내렸다. 반박할 거리를 찾는 얼굴이었으나, 끝내 화덕 안쪽으로 다시 들어갔다.

“연통부터 고치지. 불은 숨을 못 쉬면 죽으니까.”

아이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나도 해요?”

“숯을 나르십시오.”

“그다음은?”

“불을 배워야 합니다.”

“그다음은?”

강무진은 고리를 화덕 옆에 놓았다.

“쇠가 기다려 주면.”

아이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폐촌에 머문 사흘 동안 사슬은 못과 꺾쇠, 괭이날로 바뀌었다. 강무진과 도리아가 불순물을 걷어 내는 사이 해방민들은 지붕과 우물을 고쳤고, 라칸은 창 쥐는 법을, 실바나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길 표식을 가르쳤다. 숨어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겨울을 날 집과 밭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밤마다 지도를 펴던 로젠의 결론은 같았다. 물은 있어도 시야와 퇴로가 막힌 폐촌은 오래 지킬 수 없었다. 엘프 숲은 모든 종족을 받지 않을 것이고, 서쪽 영지는 보호의 대가로 또 다른 속박을 요구할 터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짚은 곳은 균열에서 사흘도 떨어지지 않은 검은등 벌판이었다. 버려진 봉화대와 강, 방벽을 세울 구릉이 있었지만 적이 대륙으로 나오면 반드시 그 남쪽 길을 지나야 했다.

“미쳤군.” 도리아가 지도를 내려다봤다. “마족의 목구멍 앞이야.”

“그래서 비어 있습니다.” 로젠이 말했다. “살 곳으로는 가장 위험하고, 막을 곳으로는 가장 먼저 필요한 땅입니다.”

강무진은 폐촌을 둘러보았다. 아이샤는 목고리를 녹여 만든 괭이로 흙을 뒤집고 있었고, 창을 배우던 수인들은 그 곁의 돌을 골라냈다. 숨은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달랐다.

“가 보겠습니다.”

“정착지를 찾으시는 겁니까?”

“숨을 곳은 이미 찾았습니다.”

강무진의 손가락이 검은등 벌판에 멈췄다.

“지킬 곳을 찾습니다.”

로젠이 먼저 지도를 접었다. 라칸은 절뚝이는 다리로도 가겠다고 우겼고, 도리아는 싸움은 멀쩡한 자에게 맡기라며 수레를 가리켰다. 실바나는 검은등 벌판에 터를 잡으면 엘프 숲도 더 일찍 경고를 받을 수 있다며 활을 들었다.

“원로회의 허락을 받으러 갑니까?” 강무진이 묻자 실바나는 잠시 침묵했다.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리러 갑니다.”

그녀가 지도를 돌려주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사흘 뒤, 일행은 폐촌을 떠났다.

걸을 수 없는 이들은 북쪽 숲의 임시 야영지로 먼저 옮겼다. 실바나가 고른 곳이었으며, 엘프 구조대가 찾아올 때까지 버틸 식량과 약초를 남겼다. 해방민 가운데 정착을 택한 어른 열셋과 아이 넷은 그곳의 부상자와 식량을 먼저 맡은 뒤 터가 정리되는 대로 합류하기로 했고, 강무진과 라칸, 도리아, 실바나, 로젠, 아이샤 여섯 사람만 수레 하나를 끌고 검은등 벌판을 먼저 답사했다.

길은 갈수록 황량해졌다.

불탄 농가의 주춧돌이 잡초 사이에 남아 있었고, 길가의 이정표는 칼로 찍혀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철제 경첩이 달린 문짝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웅덩이에 처박혀 있었다.

사람이 버린 땅에도 쇠는 남았다.

강무진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 속의 못과 부러진 낫, 화살촉, 주인을 잃은 갑옷 조각을 느꼈다. 얕은 곳의 쇠는 대부분 녹이 깊었고, 오래전 전투에서 흘린 것들이었다.

검은등 벌판이 보인 것은 해가 서쪽 구릉에 걸릴 무렵이었다.

북쪽에서 흘러온 강이 벌판 가장자리를 휘감았고, 중앙에는 무너진 봉화대가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낮은 비탈이 길게 이어졌다. 그 너머 하늘은 잿빛이었다.

구름이 아니었다.

마계 균열에서 새어 나온 기운이 먼 하늘을 얇게 물들이고 있었다.

라칸의 코끝이 움직였다.

“냄새가 나.”

“마족입니까?”

“오래된 피하고 탄 돌. 살아 있는 놈 냄새는 아직 멀어.”

실바나는 가장 높은 구릉에 올라 남동쪽을 살폈고, 도리아는 봉화대 돌을 하나씩 두드렸으며, 로젠은 강과 비탈 사이의 거리를 걸음으로 재기 시작했다.

강무진은 벌판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고 손을 땅에 댔다.

처음에는 흙 속에 흩어진 쇳조각들이 닿았다. 얕고 거친 감각이었고, 부서진 화살촉과 말편자, 녹슨 칼날이 점처럼 퍼져 있었다.

그 아래로 감각을 내렸다.

축복은 시야처럼 곧게 뻗지 않고 손끝에서 물결이 번지듯 퍼졌다. 흙과 암반을 통과할수록 감각이 흐려졌기에 강무진은 잡다한 쇳조각을 하나씩 흘려보내며 더 깊은 곳의 일정한 결을 찾았다.

서쪽 강변 아래에는 철분이 섞인 모래가 얇게 깔려 있었다. 채취는 쉬워도 양이 적었다.

북쪽 구릉은 달랐다.

암반 속에서 묵직한 울림이 돌아왔다. 자철광은 순도가 고르지 않았고 황 성분이 끼어 있어 그대로 쓰면 쇠가 붉게 부서질 터였지만, 광맥은 넓었다. 선별하고 여러 번 구우면 쓸 수 있었다.

더 깊은 곳에는 다른 금속의 결도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강무진이 손을 떼자 손가락 끝에 흙이 묻어 있었고, 먼 광맥을 오래 더듬은 탓에 손목 안쪽이 저렸다.

도리아가 다가왔다.

“있나?”

“철이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늙을 때까지 두드려도 남습니다.”

도리아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나는 드워프다. 인간보다 오래 살아.”

“그럼 내가 죽은 뒤에도 두드리십시오.”

“크흠.”

도리아는 북쪽 구릉을 바라보며 수염 아래로 입꼬리를 올렸다.

“쇠맛 좀 나는 땅이군.”

로젠은 봉화대 옆에서 낡은 깃대 구멍을 찾아냈다.

“방벽은 남쪽 비탈을 따라 세우면 됩니다. 동쪽 길은 좁혀 문을 두고, 서쪽 강에는 나중에 다리를 놓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첫 건물입니다. 거처를 먼저 세울지, 창고를 먼저 세울지 결정해야 합니다.”

“화로부터.”

강무진이 말했다.

로젠은 바로 반박하지 않고 벌판과 사람들을 번갈아 본 뒤 두 가지 안을 내놓았다.

“작은 화로와 공동 거처를 동시에 세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혹은 모든 인력을 방벽에 집중한 뒤 야외 화덕으로 필요한 철물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된 화로를 세웁니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못 하나 없이 집을 세우면 오래 못 갑니다. 삽이 없으면 도랑도 못 파고, 도끼가 없으면 목책도 못 세웁니다.”

강무진은 북쪽 구릉을 가리켰다.

“저 쇠를 꺼내면 다음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로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간이 먼저군요.”

“사람이 머물려면 불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샤가 수레 뒤에서 내렸다. 며칠 동안 놓지 않던 목고리는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것을 녹여 만든 괭이가 수레에 실려 있었다.

아이는 벌판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여기서 살아요?”

“그럴 생각이다.”

“쫓아오면?”

강무진은 남쪽의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균열은 보이지 않았고, 그곳의 쇠 역시 느낄 수 없었다. 남쪽 비탈 아래에 묻힌 화살촉 몇 개와 녹슨 칼날이 그의 감각이 닿는 끝이었다.

“막는다.”

“많이 오면?”

“더 단단히 막는다.”

아이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땅에서 주먹만 한 돌을 주웠다.

“그럼 이거 써요.”

강무진은 돌을 받아 들었다. 화산암이 섞인 단단한 돌이었으나 주춧돌로 쓰기에는 작았다.

“이건 어디에 놓을까.”

아이는 무너진 봉화대 앞을 가리켰다.

“처음에.”

강무진은 그곳으로 갔다.

도리아가 주변의 흙을 걷어 내는 동안 라칸은 낡은 검으로 땅을 팠고, 실바나는 정령술로 뿌리를 옆으로 물렸다. 로젠은 물길과 지반을 살핀 뒤 위치를 반 걸음 북쪽으로 옮겼다.

얕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강무진은 아이샤가 건넨 작은 돌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봉화대에서 떼어 낸 넓은 돌을 얹었다. 금이 간 모서리는 잘라 내지 않은 채 무게를 받는 면만 평평하게 다듬었다.

장식은 필요 없었다.

흔들리지 않으면 되었다.

도리아가 망치를 내밀자 강무진은 돌의 네 귀를 차례로 두드렸다. 둔탁한 울림이 땅속으로 번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지막 타격 뒤에도 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에 화로를 세우겠습니다.”

강무진이 말했다.

바람이 벌판의 마른 풀을 눕혔다. 그를 바라보는 얼굴들은 지쳐 있었고, 상처가 아물지 않은 자도,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도 있었다.

강무진은 긴 말을 고르지 않았다.

쇠를 두드릴 때도 필요한 만큼만 쳐야 했다. 망치질이 많다고 좋은 물건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떠날 사람은 막지 않습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을 사람은 일해야 합니다. 종족도, 전에 무엇이었는지도 묻지 않겠습니다. 일한 만큼 먹고, 위험 앞에서는 서로 지킵니다.”

라칸이 끝이 부러진 검을 땅에 꽂았다.

“난 남아. 빚도 아직 못 갚았고.”

“빚 때문에 세우는 곳은 아닙니다.”

“알아.”

라칸은 손목의 낙인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그래도 남는다고.”

도리아가 망치를 어깨에 걸쳤다.

“화로를 세운다는데 대장장이가 빠질 수 있나. 대신 불 앞에선 내 방식대로 한다.”

“내 화로에서는 내 방식대로 합니다.”

“그러니 두 개 세워야겠군.”

실바나는 활을 세워 땅에 짚었다.

“원로회는 이 결정을 경계할 것입니다. 인간이 세운 또 하나의 성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강무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성채가 아닙니다.”

실바나의 시선이 라칸과 도리아, 아이샤를 차례로 지나갔다.

“그 말은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오래도록.”

로젠은 낡은 외투 안에서 작은 문장패를 꺼냈다. 몰락한 영지의 표식이었으나 그는 그것을 주춧돌 아래 넣지 않고 손안에 쥔 채 말했다.

“행정에는 장부가 필요하고, 병참에는 창고가 필요합니다. 법과 경계, 교섭할 상대도 필요해질 겁니다. 대장간 하나로 시작해도 끝은 그보다 커질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강무진은 주춧돌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 아래로 땅속 광맥의 묵직한 결이 이어졌다. 북쪽의 철은 아직 암반 속에 잠들어 있었고, 캐내고 부수고 불순물을 걷은 뒤 수없이 두드려야 쓸 만한 쇠가 될 터였다.

사람이 머무는 곳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단단한 나라는 없었다. 그는 아직 나라를 세우겠다고 말하지 않았고, 왕이 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다시 목에 고리가 채워지는 일은 없게 할 생각이었다.

그것이면 첫 망치질로 충분했다.

“세웁니다.”

강무진이 말했다.

“여기서 막겠습니다.”

그 말 뒤로 벌판의 시간이 한 박자 멎었다.

도리아의 손에서 망치가 내려왔고, 실바나의 활시위가 바람에 떠는 소리마저 또렷해졌다. 라칸은 남쪽 비탈을 보다가 부러진 검을 더 깊이 박았으며, 로젠은 접으려던 지도를 다시 펼쳐 주춧돌 곁에 눌러 놓았다. 누구도 환호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도 떠날 쪽을 보지 않았다.

늘 다음 길부터 찾던 강무진에게도 이번에는 뒤로 물러날 길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선택한 것은 피할 길이 아니라, 적이 넘지 못할 선이었다.

아이샤가 주춧돌 옆에 앉아 이름패를 꺼냈다. 손가락으로 망치와 모루를 닮은 작은 각인을 만지던 아이가 물었다.

“여기도 이름 있어요?”

로젠이 벌판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검은등 벌판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 곳에는 다른 이름이 필요하겠군요.”

도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이름은 벽 하나 세운 다음 붙여도 늦지 않아.”

“맞습니다. 실체가 먼저지요.”

강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가 지자 주춧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사람들은 수레에서 천막을 내리고 강에서 물을 길어 왔으며, 라칸은 첫 경계조를 데리고 남쪽 비탈로 향했다. 실바나는 구릉 위 나무에 경고용 매듭을 달았고, 도리아는 벌써 화로의 크기를 두고 혼잣말을 했으며, 로젠은 사람 수와 남은 식량을 장부 첫 장에 적었다.

아이샤는 주춧돌 옆에 떨어진 작은 못 하나를 주웠다.

녹이 슨 못이었다.

아이는 돌 위에 못을 올려놓고 조약돌로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땅.

가벼운 소리가 났다.

강무진은 그 소리를 들으며 남쪽을 보았다.

어둠이 내린 비탈 너머는 그의 감각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사흘 거리의 균열도, 그 주변을 오가는 병력도 아직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리모어 바르가스에게 이 벌판의 움직임은 국경에 생긴 사소한 소란에 불과할 터였다.

강무진은 손바닥에 남은 흙을 털었다.

사소한 불씨가 어떤 쇠를 녹이는지, 저들은 아직 몰랐다.

그리모어 바르가스가 산정하겠다던 대체 경로가 어느 비탈을 넘어올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길이 이 벌판의 남쪽을 지나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회차 끝 10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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