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이끌림
해가 산마루 위로 오르기 전에 풍과 현허, 아영은 노하촌을 떠났다. 독무 속에서 끌어다 쓴 내공은 아직 절반도 돌아오지 않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텅 빈 단전이 욱신거렸으나 풍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돌아온 사람보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새벽에 할머니 품으로 돌아간 아이가 있는가 하면, 동구 할멈과 황우처럼 생사도 행방도 확인되지 않은 이들이 남아 있었다. 독고무흔의 전갈이 먼저 무림맹에 닿는다면 증거가 사라지거나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마저 거짓으로 몰릴 수 있었다.
풍은 내의 품에 임시로 넣어 둔 장부 조각을 눌러 보았다. 검은 이리 문양의 조직과 독고무흔 사이에는 장부에 적힌 것보다 훨씬 긴 길이 놓여 있을 터였고, 무림맹 안에도 그 길과 이어진 자가 있을지 몰랐지만 불안하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사흘 동안 그들은 큰길을 피해 산자락을 따라 움직였고 독무 속에서 소진한 내공은 조금씩 차올랐고, 텅 빈 듯하던 단전에도 희미한 온기가 돌아왔다. 현허는 쉴 때마다 지나온 길을 살폈으나 노하촌에서 이어진 추적 흔적은 찾지 못했다.
나흘째 오후, 완만한 능선을 돌던 풍은 왼손 검지에서 번지는 낯선 감각에 걸음을 멈췄다.
적의 살기에 반응할 때처럼 날카롭지도, 힘을 끌어낼 때처럼 거세지도 않았고 가느다란 실이 손가락에 걸려 능선 너머 서쪽 골짜기로 천천히 당기는 듯한 이끌림이었다. 손을 펴자 금빛 반지의 표면에서 엷은 광채가 흘렀다.
“왜 그래?”
앞서 가던 아영이 돌아섰고 풍이 대답하기도 전에 은빛 반지가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줄곧 북쪽의 무언가를 더듬던 때와 달리 이번에는 두 반지의 기운이 한 방향으로 포개져 서쪽을 가리켰다.
“둘이 함께 반응한 적은 없습니다.”
풍은 기맥시를 얕게 열었다. 숲속에 숨은 무인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으나, 완만하게 이어져야 할 지맥 하나가 능선 아래에서 기묘하게 꺾여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현허는 서쪽 하늘을 살폈고 해가 능선에 닿기까지 세 시진 남짓 남아 있었지만 산속에서는 어둠이 더 빨리 내려왔다. 예정 경로를 벗어나는 만큼 밤길을 재촉해야 하고, 독고무흔의 전갈보다 늦어질 위험도 커질 터였다.
“가 보고 싶으냐?”
“예. 하지만 오래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해가 서쪽 능선에 닿을 때까지다. 길을 막는 것이 나타나거나 돌아갈 시간이 줄어들면 그보다 먼저 물러난다.”
현허가 두 반지를 내려다보다 풍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끄는 것이 저것이라 해도 발을 내딛는 이는 너여야 한다.”
풍은 무림맹으로 이어지는 길과 서쪽 골짜기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반지의 정체를 알아낼 드문 기회였으나, 그 호기심 때문에 노하촌의 증거를 잃을 수는 없었다. 정한 때를 넘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뒤 그는 서쪽으로 몸을 돌렸다.
골짜기에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없었다. 허리까지 자란 억새와 비에 깎인 바위 사이로 안개가 낮게 고였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새와 벌레 소리마저 흐려졌다. 기맥시로 살피자 사방으로 퍼져야 할 지기가 둥글게 휘면서 보는 이의 감각을 자꾸 바깥으로 밀어냈다.
“오래된 진법이구나.”
현허가 지팡이로 멀쩡해 보이는 땅을 짚자 흙이 푹 꺼지며 깊은 돌 틈이 드러났다.
“보이는 길을 믿지 말고 기운이 이어지는 곳을 찾아라.”
풍은 지기의 가느다란 틈을 골라 나아갔다. 가까이 있던 바위가 안개 너머로 밀려나는가 하면 길을 막은 가시덤불 뒤에서 오히려 올바른 흐름이 나타났다. 잘못 든 곳을 한 차례 돌아 나오자 해는 벌써 한 뼘 가까이 기울어 있었다.
골짜기 중턱에서 현허가 손을 들었다. 꺾인 억새 아래 젖은 흙에 큰 신발 자국 하나가 반쯤 찍혀 있었으며, 밑창에는 모서리가 닳은 쇠못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자국 안에 물이 고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래된 발자국은 아니었다.
아영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우리를 따라온 걸까요?”
“방향이 반대다. 안으로 들어왔다가 되돌아갔어.”
주변의 흔적은 일부러 쓸어 지운 듯 끊겨 있었다. 진법의 틈을 우연히 밟은 자인지, 안쪽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찾아온 자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최근 누군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때 골짜기 바깥에서 낮은 울림이 전해졌고 바람 소리와 닮았으나 지맥이 흔들리는 박자가 지나치게 일정했고, 고여 있던 안개가 잠시 거꾸로 흘렀다. 풍이 기맥시를 넓히자 그들이 지나온 진법의 바깥 고리 하나가 끊어지며 안쪽 흐름이 빠르게 뒤틀렸다.
“밖에서 누가 건드린 겁니까?”
“자연스러운 붕괴는 아니다.”
현허의 시선이 서쪽 하늘로 향했고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돌아갈 길이 먼저 닫힌다면 정해 둔 세 시진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한 시진 안에 목적지를 찾는다. 흐름이 한 번 더 꺾이면 즉시 철수한다.”
외부의 접근으로 허락된 시간이 줄었다.
세 사람은 간격을 좁혔고 풍이 앞에서 기운의 틈을 찾고 아영은 뒤를 경계했으며, 현허가 흔들리는 교차점을 지팡이로 눌렀다. 골짜기 끝의 절벽에 닿았을 무렵 풍은 바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희미한 선을 발견했다.
덩굴을 걷어 내자 몸을 비틀어야 통과할 만한 틈이 나타났다. 안에서는 골짜기의 습기와 다른 차갑고 메마른 공기가 새어 나왔으며, 금빛 반지가 밝아지면서 은빛 반지까지 손가락을 조이듯 울렸다.
현허는 입구에 돌 세 개를 포개고 마른 풀을 걸쳐 두었고 누군가 뒤따라 들어오면 무너지도록 만든 표식이었다.
“안에서 길이 갈리거나 진법이 다시 움직이면 돌아선다.”
횃불을 밝히고 들어가자 좁은 통로 벽에 원과 선이 뒤얽힌 문양이 나타났다. 두 갈래 선은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도 중간마다 맞물렸으며, 빛을 잃은 홈에는 금빛과 은빛 가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통로 끝에는 둥근 석실이 자리했다. 천장에 박힌 푸른 광석이 어스름한 빛을 내뿜었고, 중앙의 낮은 석대 위에는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른 물건은 보이지 않았으나 두 반지는 석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한 몸처럼 울리며 석대를 향해 기운을 뻗었다.
풍은 주변을 확인한 뒤 두루마리 앞으로 다가갔고 종이에는 통로의 것과 닮은 문자가 빼곡했지만 어느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기맥시로 들여다보니 문자마다 갇힌 가느다란 빛은 금빛 반지를 향했고, 여백의 둥근 선은 은빛 반지와 호응했다.
반지는 팔을 끌지도, 머릿속에 명령을 새기지도 않았고 그저 손을 내밀 것인지 기다리는 듯했다.
풍은 스스로 두루마리에 손끝을 댔다.
낮은 울림이 석실 바닥을 훑었고 푸른빛을 머금은 문자들이 종이 위로 떠오르자 아영이 검을 뽑았고, 현허는 풍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위험이 닥치면 떼어 낼 자세였으나 선택을 막지는 않았다.
문자들은 두 갈래로 갈렸고 한쪽은 금빛 표면으로 거세게 휘몰아치며 스며들었고, 다른 쪽은 은빛 위로 잔잔히 감돌며 가라앉았다. 낯선 기운이 반지에 깃들 때마다 풍의 의식 속으로 거대한 광경이 번뜩였다.
하늘을 찌르는 문.
문을 휘감아 묶은 수많은 쇠사슬.
그 너머의 끝 모를 어둠.
어둠 속에 홀로 꽂혀 긴 세월을 견딘 한 자루 검.
마지막 문자가 흡수되자 두루마리는 바싹 마른 낙엽처럼 갈라졌다. 풍이 붙잡으려 했으나 종이는 손가락 사이에서 무너져 회색 가루만 남겼으며, 말도 글도 아닌 뜻 하나가 의식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선택의 열쇠.
닫힌 문 앞에 이를 수는 있었다. 그러나 봉인을 풀고 검을 취할지는 열쇠를 지닌 자의 몫이었다.
풍이 비틀거리자 현허가 어깨를 받쳤고 아영은 검을 내리지 않은 채 그의 눈과 손을 번갈아 살폈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풍의 설명을 들은 현허는 한동안 가루만 남은 석대를 바라보았다.
“봉인되었다고 반드시 사악한 것은 아니며, 오래되었다고 귀한 것도 아니다. 네가 얻은 것이 열쇠라면 언젠가 열지 말아야 할 문 앞에 설 수도 있겠지.”
통로 쪽에서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푸른 문양이 바깥부터 하나씩 꺼졌으며 바닥을 흐르던 지기는 거꾸로 치솟았고 외부 고리가 또 끊어지면서 진법이 안쪽으로 접히기 시작한 것이다. 통로의 폭이 눈에 띄게 줄고 천장에서 굵은 돌가루가 쏟아졌다.
석실 반대편 벽 너머에서도 빈 공간의 울림이 전해졌다. 가느다란 지맥이 이어지는 모양으로 보아 다른 방이나 통로가 분명했으며, 봉인된 문과 검에 관한 단서가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풍은 벽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가 멈췄고 벽을 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최근 발자국을 남긴 자가 밖에서 진법을 누르고 있다면, 그사이 퇴로가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이 먼저였다.
“나가겠습니다.”
아영이 벽을 돌아보았다.
“더 살피고 싶지 않아?”
“보고 싶어. 그래도 지금 찾아야 할 사람들은 문 너머가 아니라 바깥에 있어.”
현허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을 기억해 두거라.”
세 사람이 통로로 뛰어들자 길이 두 갈래로 겹쳐 보였고 뒤에서는 석실 천장이 무너지는 굉음이 따라붙었고, 바닥 문양이 꺼질 때마다 벽의 위치까지 달라졌다. 풍은 기맥시로 남은 지기의 결을 더듬었지만 붕괴한 진법은 흐름마저 어지럽게 뒤섞었다.
오른쪽 벽이 갑자기 밀려 나왔다. 아영이 피하지 못할 위치였기에 풍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몸을 틀었고, 돌 모서리가 소매를 찢고 지나갔다. 현허가 지팡이를 문양의 교차점에 내리꽂자 요동치던 통로가 잠시 멎었다.
“셋을 세면 뛴다. 멈추지 마라.”
현허의 진력이 바닥으로 퍼지며 거짓으로 겹친 길 하나가 흐려졌다. 풍과 아영이 먼저 틈을 빠져나갔고, 현허가 지팡이를 뽑는 순간 눌려 있던 진법이 튕겨 오르며 뒤쪽 통로를 삼켰다.
입구가 가까워지자 포개 두었던 돌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고 풍은 속도를 높였지만 절벽 틈을 막은 지기가 안쪽으로 접히면서 푸른 막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밖에서 진을 누르고 있다!”
현허가 지팡이로 막의 한쪽을 밀어 올렸고 풍은 금빛 반지의 힘을 끌어내려다 멈추고, 기맥시에 보이는 가장 가느다란 균열로 어깨를 들이밀었다. 아영이 그 틈에 검집을 박아 넣어 벌렸으며, 진법이 닫히기 직전에 현허까지 몸을 빼냈다.
세 사람은 떨어지는 돌을 피해 절벽 아래로 굴렀다. 숨을 돌린 풍이 돌아보니 입구에 쌓아 둔 돌은 모두 무너져 있었고, 하나는 진법의 반동만으로 닿기 어려운 곳까지 차여 나가 있었다. 젖은 흙에는 밑창을 문질러 지운 흔적도 남았다.
“쫓으면 잡을 수 있을까요?”
“흔적을 없앤 솜씨를 보면 쉽지 않다. 혼자인지도 알 수 없고.”
풍은 골짜기 바깥을 살폈으나 뒤틀린 지기 때문에 기맥시는 멀리 닿지 않았고 해는 이미 서쪽 능선에 걸렸고, 외부인의 흔적을 쫓거나 다른 입구를 찾을 여유도 사라진 뒤였다.
세 사람은 무너지는 진법을 크게 우회해 골짜기를 빠져나왔다. 어둠이 내린 뒤에야 예정했던 길로 돌아왔으며, 현허가 해의 위치와 이동 거리를 헤아려 보니 석실 탐색과 탈출로 생긴 지연은 꼬박 세 시진이었다.
“오늘 안에 고개를 넘으려면 쉬지 못하겠구나.”
아영이 뒤를 경계하는 동안 풍은 소매 아래의 금·은 반지를 확인했다. 두루마리의 문자를 삼킨 반지들은 빛도 기운도 잃은 채 잠잠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눈을 감으면 쇠사슬에 묶인 문과 그 너머의 검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답을 주지 않는 물건을 오래 들여다보면 제 마음을 답이라 여기게 되는 법이다.”
현허의 경계에 풍은 반지에서 손을 뗐다. 봉인된 문을 다시 찾는 일보다 노하촌에서 건진 증거를 전하고,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을 밝히는 일이 먼저였다.
세 사람은 잃은 세 시진을 만회하려 어둠이 내린 고갯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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