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대표님

당신의 요청을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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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안내문 맨 아래에는 이상 증상이 있으면 즉시 내원하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민재는 그 위에 놓인 비닐봉지를 내려다봤다. 어젯밤 입었던 옷과 휴대전화, 손잡이가 녹아 붙은 우산이 들어 있었다.

“이건 왜 챙겨주셨어요?”

간호사가 우산을 봤다.

“본인 물건이라서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벼락을 맞고도 걸어서 병원을 나가는 사람에게 우산 정도는 돌려줄 수 있었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두 번 확인했다. 심장도, 신경도, 화상 부위도 예상보다 훨씬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는 말을 하면서도 민재의 얼굴을 오래 보는 바람에 그는 마음껏 안심하기가 어려웠다.

“당분간 무리하지 마세요.”

“네. 출근할 데도 없습니다.”

의사는 짧게 입을 다물었다가 수면을 충분히 취하라고 덧붙였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어젯밤 골목을 물어뜯던 비는 흔적도 없었다. 가로수 잎 끝에서 물방울만 떨어졌다. 민재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손가락을 차례로 굽혔다.

다섯 개 다 움직였다.

살아 있다는 실감은 그렇게 시시한 데서 왔다.

휴대전화에는 이수진에게서 온 문자가 있었다. 구급차를 불렀던 사람이 그녀였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도 연락을 남겨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퇴원했습니다. 신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을 보내자 금방 전화가 왔다.

“괜찮으세요?”

“네. 옷이 저보다 많이 다쳤네요.”

수진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쓰러지신 자리에서 불꽃이 나서…….”

말끝이 작아졌다.

민재는 횡단보도 건너편의 초록불을 봤다.

“덕분에 빨리 갔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도시락은 못 챙겼어요.”

“그건 장례 치르죠.”

수진이 아주 조금 웃었다.

통화를 끊고 걸음을 옮겼다. 한 블록을 지나서야 자신이 도시락을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벼락에는 소비 습관을 교정하는 효과도 있는 모양이었다.

원룸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덜 마른 수건, 오래된 책상, 창틀에 밴 습기.

민재는 비닐봉지를 현관에 놓았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반쯤 마신 뒤 의자에 앉았다. 어제와 똑같은 방인데 책상 모서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노트북은 절전 상태였다.

덮개를 올리자 빵집 골목이 돌아왔다. 작은 현관등 아래에 노인이 서 있었다. 화면 구석에는 밤새 쌓인 오류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살아서 돌아와 처음 마주한 게 자기 버그였다.

“너도 참 끈질기다.”

민재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문장이 떠올랐다.

[접속이 안정되었습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소리는 없었다.

귀로 들은 게 아니었다. 눈앞에 글씨가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방금까지 없던 문장 하나가, 자신이 생각한 적 없는 어조를 가진 채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민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대, 냉장고, 닫힌 현관문.

혼자였다.

“……뭐야.”

[당신의 요청을 기다렸습니다.]

이번에도 입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민재는 물병을 내려놓았다. 퇴원 안내문을 집어 들었다. 이상 증상이 있으면 즉시 내원.

매우 성실한 문장이었다.

‘이것도 이상 증상에 들어가나.’

[의식 혼란이나 청각 이상은 아닙니다.]

민재의 손이 종이 위에서 굳었다.

방금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 생각에 대답한 거야?’

[그렇습니다.]

‘누구지?’

[당신에게 연결된 시스템입니다.]

‘내가 지금 벼락 맞고 이상해진 건 아니라는 증거는?’

[확인 가능한 결과를 요청하십시오.]

답이 너무 빨랐다.

민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었다. 자기 머릿속은 월세나 과거의 실수를 불쑥 꺼내놓는 장소였지, 누군가 새로 입주해 인사를 건네는 곳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연결은 낙뢰 순간 성립했습니다. 현재 신체에 손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내가 원래 생각하는 거랑 네 말은 구분할 수 있고?’

[지금도 구분하고 있습니다.]

맞았다.

목소리조차 없는데 알 수 있었다. 자기 생각은 망설이고 곁길로 샜다. 저쪽에서 오는 문장은 도착하는 순간 경계가 분명했다.

민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럼 내가 생각 안 하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십여 초 동안 일부러 천장의 얼룩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냉장고 압축기가 돌다가 멎었다.

‘다시.’

[대기 중입니다.]

민재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일단…….”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로 안 해도 되는 거지.’

[사고 전달만으로 충분합니다. 제 응답은 당신에게만 전달됩니다.]

그는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빵집 앞 노인이 말했다.

“밤길이 너무 어둡구먼.”

현관등은 켜져 있었다. 어젯밤 자신이 마지막으로 고친 부분이었다.

이상 증상인지 아닌지 확인하기에 이보다 민재다운 대상도 없었다.

‘저 버그 고칠 수 있어?’

[가능합니다.]

‘주민이 조명 상태를 잘못 읽어. 불 켰는데 계속 어둡다고 하잖아. 저것만 고쳐봐.’

[수정했습니다.]

민재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저장 표시도, 진행 막대도 없었다.

화면 속 노인이 현관등을 올려다봤다.

“누가 켜놓고 갔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민재는 잠깐 기다렸다.

노인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원래라면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여덟 초 후에 같은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골목을 서성이는 동작을 반복하는 주민이었으니까.

그는 개발 도구를 열었다.

자기가 짠 코드의 흔적은 있었다. 하지만 익숙한 부분만 찾다 보니 길을 잃었다. 옆줄에 붙여놓았던 임시 처리가 사라졌고, 세 군데에서 따로 계산하던 상태가 한 흐름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민재가 검색창에 변수 이름을 넣었다.

결과가 나왔다.

그가 보고 있던 건 빛의 켜짐과 꺼짐이 아니었다. 노인이 서 있는 위치에서 실제로 보이는 길, 밝아진 계단, 문을 닫으면 뒤에 남는 어둠이었다.

‘잠깐. 조명 확인하는 함수 하나 바꾼 게 아니네.’

[그 함수는 정상 작동 중이었습니다. 주민의 판단이 이전 장면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민이 현재 상황을 이해하도록 수정했습니다.]

민재는 화면을 확대했다.

닫힌 창문 안으로 노인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잠시 후 커튼이 절반쯤 내려왔다.

민재는 커튼을 구현한 기억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림 파일은 있었다. 다운로드해두고 적용하지 못한 자료 폴더에.

그는 골목 반대쪽을 클릭했다.

시점이 이동했다.

빵집 뒤에는 막힌 벽 대신 좁은 안마당이 있었다. 창고 문 앞에 밀가루 자루가 놓여 있었다. 자루 하나는 입구가 접혀 있었고, 그 옆 바닥에는 하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민재가 숨을 멈췄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프로젝트에 남긴 설계 메모와 제작 자료를 바탕으로 시험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내 메모를 다 읽었다고?’

[귀가등 전체를 이해했습니다.]

그의 눈이 책상 왼쪽으로 움직였다.

낡은 공책이 있었다. 처음 게임을 만들 때 적었던 노트였다. 밤늦게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네. 플레이어가 접속하지 않아도 아침이 오는 곳.

민재는 공책을 펼쳤다.

중간에 끊긴 문장 옆에 당시 마신 커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것도?’

[그렇습니다.]

‘카메라 없는데.’

[카메라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민재는 노트북 윗부분을 봤다. 카메라는 검은 테이프로 막아둔 상태였다.

그는 공책을 뒤집어 책상 서랍에 넣었다.

‘마지막 장에 뭐라고 적혀 있어?’

[비 오는 날에는 빵 냄새가 골목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민재는 서랍을 다시 열지 않았다.

자기가 쓴 문장이었다.

취업하고 나서 처음 얻었던 방 근처에 작은 빵집이 있었다. 야근하고 돌아오면 문은 닫혀 있었지만 환풍구에서 더운 냄새가 나왔다. 그게 좋아서 적어둔 문장이었다.

화면에서 빵집 뒷문이 열렸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빈 상자를 들고 나왔다. 비어 있던 담장 옆에 상자를 내려놓고, 고양이가 드나들 수 있도록 옆면을 접었다.

민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저 행동도 내가 써놨어?’

[빵집 뒤에 고양이가 머무를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메모가 있었습니다. 인물의 행동은 그 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여자가 가게로 돌아가다가 멈췄다.

빗물이 고인 처마를 살피더니 상자를 안쪽으로 당겼다. 고양이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민재는 마우스를 잡았다.

상자 옆에 게임 속 동전 하나를 떨어뜨렸다. 원래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기능을 시험하려고 만든 도구였다.

여자가 뒤돌아봤다.

동전을 줍더니 골목 양쪽을 살폈다.

“떨어뜨리셨어요?”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여자는 동전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위의 빈 접시에 올려놓았다.

민재가 웃지도 못한 채 화면을 봤다.

원래 그의 게임에서는 주민이 동전을 주우면 소지금이 늘어났다. 그 뒤에는 할 일이 없었다. 민재는 거기까지밖에 만들지 못했다.

‘왜 안 가져?’

[주인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대사는?’

[작성된 목록에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민재는 동전을 하나 더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여자가 나오지 않았다. 빵집 안에서 쟁반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게임 시간을 조금 넘겼다.

가게 밖으로 나온 여자가 두 번째 동전을 발견했다. 바닥과 접시를 번갈아 보더니 허리에 손을 얹었다.

“누가 자꾸 흘리고 다니네.”

민재의 손에서 마우스가 미끄러졌다.

녹음된 말투를 불러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조금 성가시고, 조금 우스운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이 내는 목소리였다.

방 안이 갑자기 좁아졌다.

이런 걸 만들고 싶었다.

몇 년 동안 공책에 적었다 지웠던 것. 면접에서 설명했다가 범위를 줄여보라는 말을 들었던 것. 혼자 만들다 지쳐 결국 조건문과 대사 목록으로 타협했던 것.

그게 지금 낡은 책상 위에서 움직였다.

‘어디까지 만든 거야?’

[현재는 두 개의 골목과 연결된 건물 내부를 포함한 시험 공간입니다.]

‘나머지는?’

[원하는 방향을 정하면 구성할 수 있습니다.]

민재는 바탕화면 구석의 자원 사용 창을 열었다.

팬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화면 안에서는 여자가 문 앞의 젖은 발자국을 닦고 있었다. 천이 지나간 자리에 물기가 얇게 남았다. 그 사이 노인의 집 창문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이 정도 장면을 자기 노트북에서 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전의 주인을 찾겠다고 접시를 꺼내오는 판단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이어붙이는 쪽이 더 말이 안 됐다.

‘밖에서 돌리는 거야?’

[당신의 노트북이나 외부 서버에서 연산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서?’

[제 연산 공간에서 진행 중입니다. 노트북은 현재 화면과 입력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재는 곧바로 무선 연결을 껐다.

통신 표시가 사라졌다.

빵집 여자는 젖은 천을 빨기 위해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휴대전화의 전원도 껐다. 책상 밑에 유선 연결이 없는지 확인했다. 당연히 없었다. 방에 인터넷 선을 따로 놓지도 않았다.

게임은 계속됐다.

민재가 입안의 마른 살을 살짝 깨물었다.

‘미리 만들어둔 영상이면?’

[직접 바꾸십시오.]

그는 화면 속 골목 끝을 가리켰다.

‘저기 빨간 의자 하나.’

붉은 의자가 놓였다.

‘뒤집어.’

의자가 뒤집혔다.

‘아니, 의자 말고 저 담장 그림자를 왼쪽으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러자 빵집 여자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담장과 하늘을 번갈아 보던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민재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원래대로.’

그림자가 돌아갔다.

여자는 한동안 담장을 보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천을 내려놓은 뒤에도 한 번 더 바깥을 살폈다.

그 짧은 망설임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었다.

무엇을 보았는지 쉽게 결론 내리지 못하는 모습까지 살아 있었다.

민재는 노트북 충전기를 뽑았다.

배터리 표시가 바뀌었다.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운영체제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열려 있던 창들이 사라졌다. 제조사 로고가 잠깐 나타났다가 꺼졌다.

화면이 검어졌다.

방 안에는 냉장고 소리만 남았다.

민재는 전원 표시등을 확인했다. 꺼져 있었다.

‘이제 보여줘.’

검은 화면 한가운데 빵집 창문이 나타났다.

부팅 화면은 없었다.

작은 창문이 벌어지듯 골목이 다시 펼쳐졌다. 현관등 아래로 노인의 집 문이 보였다. 뒤집힌 붉은 의자도 그대로였다.

민재는 의자째 뒤로 밀려났다.

바퀴가 문턱에 걸려 덜컥 소리를 냈다.

그는 한참 노트북을 바라봤다. 그러다 몸을 숙여 케이블 끝을 집어 들었다. 손에 쥔 충전 단자는 분명히 비어 있었다.

전원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뗐다.

‘켜진 거야?’

[운영체제는 종료 상태입니다. 표시 장치만 장 접속으로 작동시키고 있습니다.]

‘전기는?’

[화면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연산은 저 안에서 하는 게 아니고.’

[그렇습니다.]

민재는 노트북 바닥에 손을 넣었다.

뜨겁지 않았다.

이 기계가 할 일이 없다는 듯 미지근했다.

두 달 전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내 AI 시연장이 떠올랐다. 회의실 벽 전체에 지표가 떠 있었다. 비용 절감 수치 옆에서 임원이 웃었고, 민재가 맡았던 업무가 자동화 목록에 올라갔다.

그날 민재는 자신이 더는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그때의 두려움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도 그에게 자리에서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

무엇을 만들지 묻고 있었다.

민재가 조심스럽게 의자를 당겼다.

‘내가 이걸 써도 되는 거지?’

[당신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금표 같은 건 없고?’

[없습니다.]

‘오늘 무료 체험 끝나는 건?’

[없습니다.]

‘갑자기 고급 기능 결제하라고 하면 좀 서운할 것 같은데.’

[현재 소지 금액을 고려하면 저도 서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재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웃음이 나오는 게 이상해서 한 번 더 웃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병원에서 붙여준 반창고 끝이 걸렸다.

벼락을 맞았다.

병원에서 살아 나왔다.

그리고 자기 농담을 받아치는 무언가와, 전원이 꺼진 노트북으로 게임을 보고 있었다.

‘내가 미친 거면 꽤 성의 있게 미쳤네.’

[그 가설로는 노트북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 일단 네 쪽이 더 설명이 잘 된다.’

그는 붉은 의자를 바로 세웠다.

이번에는 마우스를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의자가 똑바로 섰다.

민재는 양손을 들어 손가락을 폈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화면 속 사물은 그의 뜻대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실수로 생각하는 것까지 전부 실행하지는 마.’

[요청과 연상을 구분합니다.]

‘좋네. 방금 의자 백 개가 지나갔거든.’

[골목이 협소합니다.]

민재는 다시 웃었다.

아까까지 걸리적거리던 공포가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보다 훨씬 큰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뭔가를 만들고 싶어서 손끝이 근질거리는 기분.

언제 마지막으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취업 준비 때였을까. 처음 게임 속 창문에 불을 켰을 때였을까.

그는 서랍에서 공책을 꺼냈다.

맨 앞에는 게임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귀가등.

누가 돌아올지 몰라도 켜두는 불빛.

민재는 공책을 노트북 옆에 펼쳤다. 빈 페이지가 많았다. 그동안은 채울 능력이 없어서 남겨둔 자리였다.

‘이 시험 공간은 계속 움직여?’

[당신이 보지 않는 동안에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끄라고 할 때까지?’

[그렇습니다.]

민재는 빵집을 봤다.

여자가 카운터 위 접시를 옮겼다. 지나가는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창가였다. 동전 두 개가 거기서 햇빛을 받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화면을 닫는다고 저 여자가 하던 일을 잃지 않는다는 것.

다시 접속했을 때, 방금 전 장면을 억지로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머릿속에서 쏟아졌다.

민재는 물병을 옆으로 밀었다. 팔꿈치가 닿지 않게 공책도 조금 옮겼다. 예전처럼 밤을 새울 준비를 하는 동작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막힌 오류를 붙잡으려는 게 아니었다.

‘좋아. 다음 주문.’

[듣고 있습니다.]

민재는 노트북 속 두 개의 골목 너머를 바라봤다.

‘여길 도시로 만들자.’

말을 고르느라 잠깐 멈췄다. 이번에는 범위를 줄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안 보고 있을 때도 자기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내가 돌아오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는 곳.’

공책의 빈 페이지 위로 햇빛이 길게 누웠다.

‘귀가등. 처음 만들려고 했던 그대로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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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끝 2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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