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신, 대장장이 강무진

제9장 — 이름 없는 아이

검은개울 협곡에는 이름과 달리 물소리가 거의 없었다.

장마철이 지나며 개울은 바닥을 드러냈고, 검은 자갈 사이로 손가락 두 마디 깊이의 물만 흘렀다. 협곡 동쪽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었으며, 서쪽 비탈에는 가시덤불과 키 작은 소나무가 엉겨 붙어 있었다. 수레가 지날 길은 그 사이의 한 줄뿐이었다.

강무진은 절벽 중턱에 손바닥을 댔다.

차가운 돌 너머로 금속이 느껴졌다. 모래에 섞인 사철과 바위틈에 박힌 황철석, 오래전 부러져 흙에 묻힌 화살촉까지 크기와 깊이가 제각각인 감각으로 손끝에 잔잔히 걸렸다.

그 가운데 도리아와 함께 박아 넣은 쇠쐐기 열두 개가 선명했다.

강무진은 하나씩 상태를 짚었다. 쐐기의 끝은 암반의 결을 따라 정확히 물려 있었지만, 너무 깊이 박으면 절벽 전체가 무너지고 얕으면 선두 수레조차 막지 못했다. 필요한 것은 사람을 덮치는 낙석이 아니라 길을 끊을 만큼의 붕괴였다.

“세 번째가 반 치쯤 떴습니다.”

아래쪽 바위 뒤에서 도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크흠. 그걸 여기서 느낀다고?”

“망치질이 거칠었습니다.”

“누가 어젯밤부터 한숨도 못 자게 했는데.”

도리아는 투덜거리면서도 세 번째 쐐기를 다시 두드렸다. 짧고 무거운 타격이 바위를 울리며 쇠 끝을 암반 속으로 밀어 넣자, 강무진의 손끝에 걸리던 미세한 흔들림이 사라졌다.

“됐습니다.”

“쇠맛 좀 아는군.”

도리아는 망치를 어깨에 걸쳤고, 수염에는 돌가루가 희끗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협곡 위에서 새 울음이 세 번 들렸다.

실바나가 정한 신호였다.

적이 보였다.

강무진은 비탈 아래로 내려갔다. 라칸은 길가의 마른 개울 안에 웅크린 채 고쳐 준 짧은 칼을 힘주어 쥐고 있었지만, 다친 다리는 여전히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뒤쪽 두 놈은 내 거다.”

라칸이 말했다.

“한 놈만 맡으십시오.”

“왜?”

“돌아올 다리를 남겨야 하니까.”

라칸의 귀가 뒤로 젖혀졌으나, 반박하려던 입은 그대로 다물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로젠이 대기하고 있었다. 금이 갔던 검은 한 뼘가량 짧아져 있었다. 강무진은 균열을 도려내고 광산에서 가져온 탄소 함량 낮은 쇠를 심으로 덧댔으며, 급히 손본 만큼 날의 경도는 낮추는 대신 충격을 받아도 부러지지 않게 했다.

로젠이 검을 뽑아 마지막으로 날을 확인했다.

“포로 수레를 먼저 떼어 내겠습니다.”

“신호 전에는 나오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단정했으며, 전날까지 남아 있던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가 협곡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나타난 것은 검은 갑옷을 입은 기병 넷이었다. 그 뒤로 창병이 열둘, 쇠창살을 두른 수레 여덟 대가 이어졌으며 수레 사이사이에는 쇠사슬에 묶인 포로들이 걸었다. 행렬의 마지막에는 다시 창병과 기병이 붙었다.

평소 호위보다 두 배가 넘었다.

강무진은 숨을 낮추고 금속의 움직임을 읽었다.

칼 서른여섯 자루. 창 스물셋. 쇠뇌 여섯. 갑옷 안쪽에 숨긴 투척용 침 열두 개. 수레의 바퀴축은 마계식 강철로 보강돼 있었는데, 불순물은 많았으나 열처리가 고르게 되어 있어 광산의 하급병이 쓰던 무기와는 달랐다.

행렬 한가운데에는 다른 기척이 있었다.

커다란 마족 하나가 검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뿔 사이로 은빛 장식을 두른 투구를 썼고, 가슴에는 세로로 갈라진 붉은 눈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로젠이 말한 그리모어 바르가스의 표식이었다.

마족 기병이 손을 들자 행렬이 멈췄다.

너무 일렀다. 선두 수레가 쐐기 앞에 닿기까지 스무 걸음이 남아 있었다.

“좌측 비탈을 수색한다.”

기병의 목소리가 협곡에 울렸다.

병사 여섯이 방패를 들고 흩어졌다. 둘은 마른 개울로, 넷은 강무진이 숨은 비탈로 향했다. 매복을 눈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저 의심만으로 행렬 전체를 멈춘 판단이었다.

정예를 이끄는 자다웠다.

강무진은 쐐기의 위치와 적의 간격을 다시 쟀다. 지금 절벽을 무너뜨리면 선두만 고립됐고, 기다리면 수색병이 라칸을 먼저 찾을 가능성이 컸다.

마른 자갈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라칸이 몸을 낮췄지만, 그의 칼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비탈 위의 소나무 가지가 미세하게 기울었다. 실바나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강무진은 주먹을 쥐었다.

절벽 속 쐐기 열두 개가 동시에 떨렸다.

쇠의 결을 억지로 비트는 것은 망치질과 달랐다. 받침도, 모루도 없는 상태에서 강무진은 각 쐐기의 무른 중심부에 힘을 걸고 단단한 표면을 지렛대처럼 밀었다. 열두 개를 한꺼번에 다루자 관자놀이가 욱신거렸고, 손가락뼈 사이로 뜨거운 침이 파고드는 듯했다.

그래도 방향은 정확해야 했다.

사람이 아니라 길로.

강무진이 손을 펴자 쇠쐐기들이 반 치씩 돌아갔다.

암반에서 둔중한 파열음이 났다.

기병이 고개를 드는 순간, 절벽 아래쪽이 길을 향해 쏟아졌다. 사람 머리만 한 바위들이 선두 기병과 수레 사이를 때리자 말들이 앞발을 들었고, 창병들은 방패를 세웠다. 먼지가 협곡을 삼켰다.

실바나의 화살이 날았다.

첫 화살은 후미 기병의 어깨와 목 사이를 꿰뚫었다. 두 번째는 쇠뇌병의 손등에 박혀 발사를 막았으며, 세 번째 화살은 수레를 모는 자의 채찍을 끊었다.

“매복이다!”

라칸이 마른 개울에서 튀어나왔다. 다친 다리를 끌면서도 첫걸음은 빨랐다. 수색병의 창이 그를 향해 뻗자 라칸은 몸을 반쯤 틀어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당겼다. 앞으로 쏠린 병사의 투구와 흉갑 사이로 짧은 칼이 파고들었다.

그는 두 번째 병사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강무진의 말을 지킨 채 쓰러진 자의 방패를 빼앗아 무릎을 세우고 버텼다.

쇠뇌가 울렸다.

검은 화살 세 발이 라칸에게 쏟아졌다.

강무진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화살촉의 철이 손가락을 잡아당겼지만, 날아오던 궤도를 정면에서 멈추기에는 힘과 거리가 모자랐다. 그는 세 화살의 끝을 옆으로 밀었다.

한 발은 방패에 박혔고, 나머지 둘은 라칸의 어깨를 스쳐 자갈밭에 꽂혔다.

라칸이 이를 드러냈다.

“이건 빚으로 안 친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강무진은 길로 뛰어내렸다.

도리아의 망치가 그보다 먼저 갑옷을 때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족 창병 하나가 옆으로 날아갔다.

“크흠! 갑옷이 두껍기만 하구먼!”

“오른쪽 관절은 얇습니다.”

“진작 말하지!”

도리아가 몸을 낮추자 창 두 자루가 그의 투구 위를 스쳤고, 망치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한 병사의 팔꿈치를 쳤다. 팔 보호구가 찌그러지면서 창이 떨어졌다.

강무진은 떨어진 창을 밟았다.

발밑에서 강철의 결이 느껴졌다. 열처리는 좋았지만 창날과 슴베를 잇는 부분에는 인 성분이 몰려 있어 차갑고 취약한 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발끝으로 힘을 밀어 넣자 창날이 목재 자루에서 떨어져 나갔다.

강무진은 그것을 손으로 잡지 않았다. 손바닥을 돌리자 쇠창날이 땅을 미끄러져 병사들의 발목 사이로 파고들었고, 세 명이 균형을 잃었다.

“지금입니다!”

로젠이 바위 뒤에서 나왔다. 그는 쓰러진 병사를 넘어 수레 쪽으로 달렸으며, 짧아진 검은 좁은 수레 사이에서 오히려 빨랐다. 한 번 막고 손목을 돌려 창대를 흘린 뒤, 어깨로 적을 밀어냈다.

실바나가 수레 위로 뛰어내렸다.

엘프의 손이 쇠창살을 짚자 옅은 녹빛이 손끝에서 번져 나갔고, 길가의 덩굴이 자라 수레 바퀴를 감았다. 마부가 칼을 내리치려 했으나 화살이 그의 칼자루를 꿰뚫었다.

“수레 안에서 물러나십시오.”

실바나가 포로들에게 말했다.

강무진은 첫 번째 수레의 자물쇠를 느꼈다. 걸쇠 세 개와 회전판 하나로 된 내부 구조가 손바닥 안에 들어온 듯 선명했다. 열쇠 없이 힘으로 뜯으면 쇠창살까지 휘어 안의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그가 검지와 엄지를 좁히자 자물쇠 속 회전판이 돌아갔다.

철컥.

문이 열렸다.

그러나 수레 안의 포로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에 걸린 쇠고리와 바닥의 사슬을 보며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달아나라는 말을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강무진은 다음 자물쇠를 열었다.

“나오십시오. 길은 우리가 막습니다.”

그때 검은 갑옷의 기병이 말을 몰았다.

놈은 도망치는 대신 강무진에게 곧장 돌진하며 긴 칼로 먼지를 갈랐다. 강무진은 옆으로 피하면서 허리의 검을 뽑았다.

두 칼이 맞부딪쳤다.

무게가 달랐다.

손목을 타고 충격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상대의 칼은 불순물이 많은 쇠를 반복해서 접어 약점을 흩어 놓은 마계 강철이었다. 투박했지만 전장에서 오래 버티도록 만든 칼이었다.

기병이 말을 돌렸다.

“목표 확인. 금속을 변형시키는 인간.”

그의 어조에는 놀람이 없었다. 이미 보고받은 내용을 대조하는 것 같았다.

“그리모어 장군께서 네 생포를 명하셨다.”

강무진은 검을 낮게 세웠다.

“직접 오지 않았군.”

“장군께서는 소모품 하나의 이탈보다 생산 체계의 이상에 관심이 있으시다. 너는 유용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사람을 소모품이라 불렀다.

강무진의 시선이 기병의 갑옷을 훑었다. 가슴판은 두꺼웠으나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수리한 흔적이 있었다. 다른 합금의 철판을 덧대고 못 세 개로 고정한 급한 수리였기에, 충격이 한쪽에 몰리면 못부터 빠질 터였다.

강무진의 말수가 줄었다.

“사람은 재료가 아니다.”

그가 한 걸음 내디뎠다.

기병의 칼이 옆으로 휘둘러지자 강무진은 검등으로 받아 흘렸다. 불꽃이 눈앞에서 튀는 동시에 그의 왼손이 펴졌다.

갑옷의 수리용 못 세 개가 바깥으로 솟았다.

가슴판이 벌어졌다.

강무진은 칼을 몸 안쪽으로 붙여 짧게 찔렀고, 날끝은 벌어진 틈을 통과했다. 기병의 몸이 굳었다.

“생포는…… 효율적인 제안이었다.”

놈은 쓰러지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강무진은 칼을 뽑았다.

“거절한다.”

후미에서 뿔피리 소리가 나자 남은 기병 둘이 대열을 수습했다. 창병들은 수레가 아니라 퇴로를 중심으로 모였으며, 포로를 되찾는 대신 살아남은 전력과 정보를 보존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쓰러진 기병의 가슴 문양이 붉게 빛났다.

강무진은 검을 들었다.

갑옷에 박힌 철판이 열을 머금고 있었다. 마법의 기운까지 느낄 수는 없었지만, 금속 내부의 온도가 일정한 원을 그리며 오르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붉은 눈 문양 위로 반투명한 형상이 떠올랐다.

각진 뿔과 뒤로 빗어 넘긴 검은 머리, 군복처럼 단정한 갑옷이 보였다. 형상은 강무진보다 머리 하나는 컸으며, 그 눈은 전장이 아니라 수치가 적힌 장부를 읽는 듯 건조했다.

“제7수송대 지휘관의 생체 반응이 소실되었군.”

협곡의 마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바르가스 장군님.”

그리모어 바르가스의 시선이 움직이다 강무진에게 멈췄다. 적어도 강무진은 그렇게 느꼈다.

“보고와 일치한다. 비인가 금속 조작 개체. 인간 남성.”

그리모어는 열린 수레와 무너진 절벽, 쓰러진 병사들을 차례로 살피는 듯했다.

“수송대의 회수 가능성은 낮다. 잔존 병력은 기록을 가지고 철수하라.”

수레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지만 그리모어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적재 자원은 폐기한다.”

남은 마족들이 허리춤에서 검은 구슬을 꺼냈다. 수레 아래 기름통에도 같은 금속 장치가 붙어 있었다. 강무진은 즉시 그 구조를 읽었다. 얇은 철막 안에는 부딪치면 불붙는 광물 가루가 격벽을 사이에 두고 들어 있었다.

포로까지 태우려는 것이었다.

“도리아! 수레 밑입니다!”

“봤네!”

도리아의 망치가 첫 번째 기름통을 수레 밖으로 날리는 동안, 실바나는 덩굴을 움직여 두 번째 통을 개울로 끌어당겼고 로젠은 세 번째 수레 아래로 몸을 던졌다.

마족 병사가 구슬을 내리쳤다.

강무진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여덟 개 수레 아래의 철막이 동시에 찌그러지며 광물 가루를 가른 격벽끼리 달라붙었다. 머릿속이 울리고 코끝에서 뜨거운 것이 흘렀지만, 하나를 놓치면 수레 하나가 불탔다.

여덟 번째 철막이 버텼다.

두께가 달랐다.

강무진은 이를 악물고 손목을 비틀었다. 철막의 가장 무른 결을 찾아 힘을 밀어 넣자 짧은 파열음과 함께 장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불은 붙지 않았다.

라칸이 방패로 구슬을 든 병사를 밀어 쓰러뜨렸다. 로젠은 수레 밑에서 기어 나와 검을 세웠으며, 실바나의 화살이 퇴로의 바위를 때리자 정령의 바람이 먼지를 말아 올렸다.

마족 잔존병들은 더 싸우지 않고 먼지 속으로 몸을 돌려 협곡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리모어의 형상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자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가?”

그가 강무진에게 물었다.

강무진은 코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저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비효율적인 관념이군. 네 행동으로 국경 수송량은 일시적으로 감소할 것이다. 대체 경로를 산정하겠다.”

“다시 보내면 다시 끊는다.”

그리모어의 형상이 잠시 멈췄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변수가 아니라 장애물로 분류하지.”

붉은 빛이 꺼졌다.

협곡에는 부상자의 신음과 수레 안의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강무진은 검을 집어넣고 가장 가까운 수레로 다가갔다. 목에 쇠고리를 찬 사람들이 그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인간도 있었고, 뾰족한 귀가 잘린 엘프도 있었으며, 털가죽이 군데군데 벗겨진 수인도 있었다.

맨 안쪽에 작은 아이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회갈색 머리 사이로 짧고 둥근 귀가 솟아 있었으나 어느 종족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는 강무진이 아니라 그의 허리춤과 손을 번갈아 보며 무기가 있는지, 때릴 물건을 들었는지부터 확인했다.

강무진은 수레 밖에 검을 내려놓고 빈손을 보였다.

“나와도 된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강무진은 재촉하지 않고 자물쇠를 열어 목의 쇠고리를 하나씩 풀었다. 잠금쇠의 혀를 젖힐 때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고, 포로들은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움찔했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차례가 왔다.

쇠고리가 너무 작아 자라면서 목을 파고든 자국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강무진은 금속의 두께를 살핀 뒤 양손으로 고리를 감쌌다.

“차갑습니다.”

아이가 속삭였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곧 끝난다.”

그는 고리의 온도를 올리지 않았다. 힘으로 벌리면 살이 쓸릴 터였다. 대신 잠금쇠 내부의 작은 용수철만 무르게 눌렀는데, 땀에 밴 쇠는 녹이 슬어 뻑뻑했다. 강무진은 결을 따라 녹을 떼어 내고 걸쇠를 천천히 밀었다.

철컥.

고리가 열렸다.

아이는 목을 감싼 채 강무진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해요?”

“뭘 말이냐.”

“다시 채워요?”

강무진은 쇠고리를 바닥에 놓고 발로 밟았다. 고리가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안 채운다.”

아이는 찌그러진 쇠를 오래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수레 밖으로 내려왔다. 맨발이 자갈에 닿자 몸이 휘청였다.

강무진이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곧장 잡지 않았다. 손바닥과 그의 얼굴을 한참 번갈아 보고 나서야 손가락 두 개만 걸쳤다.

작고 차가운 손이었다.

실바나는 다른 수레의 부상자를 살폈다. 활을 쥔 손은 평소처럼 단단했지만, 목에 고리가 파고든 엘프를 볼 때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리아는 말없이 쇠사슬을 한곳에 모았고, 망치가 내려갈 때마다 사슬 고리가 끊어졌다.

라칸은 포로들 사이를 걷다가 낙인이 찍힌 늑대수인 앞에 멈췄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목덜미를 보여 주자 상대가 고개를 들었고, 라칸은 그에게 물주머니를 건넸다.

로젠은 살아남은 자들의 수를 세었다.

“예순셋입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열일곱, 치료가 급한 사람이 아홉입니다. 적이 돌아오기 전에 이동해야 합니다.”

“길은 있습니까?”

“북동쪽 폐촌까지 가는 짧은 길과, 숲을 돌아가는 안전한 길이 있습니다. 부상자를 생각하면 짧은 길을 택하되 추격을 막을 후위가 필요합니다.”

강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남겠습니다.”

“나도 남아.”

라칸이 바로 말했다.

“부상자를 지키십시오.”

“당신 옆도 지켜야지.”

다친 다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라칸은 물러서지 않았다.

강무진은 그에게 부러진 사슬 더미를 가리켰다.

“저걸 수레에 실으십시오.”

“쇠사슬을 왜?”

“농기구로 바꿀 겁니다.”

라칸이 입을 다물자 도리아가 수염을 쓸었다.

“쇳값은 형편없겠군. 녹도 많고, 불순물도 잔뜩이야.”

“접어서 걷어내면 됩니다.”

“숯이 많이 들겠어.”

“베어 낼 나무는 많습니다.”

도리아의 입꼬리가 수염 아래에서 올라갔다.

“크흠. 그럼 버릴 까닭은 없지.”

아이의 손가락이 강무진의 손에서 떨어졌다. 아이는 찌그러진 목고리 쪽으로 달려가 그것을 두 손으로 들었지만, 제 몸에는 지나치게 무거운지 팔이 아래로 처졌다.

“이것도요.”

“그건 버려도 된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내 거였어요.”

그 말에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강무진은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이름이 뭐지?”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낯선 질문을 들은 얼굴이었다.

“부르던 말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실바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었다.

아이는 목의 자국을 긁다가 짧게 말했다.

“열셋.”

수레 안쪽에는 숫자가 새겨진 철패가 떨어져 있었다. 열셋. 아이의 목고리에 매달려 있던 패였다.

강무진은 철패를 집어 손가락으로 눌렀다. 거칠게 두드려 찍은 숫자의 홈이 뭉개지며 평평해졌다.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정을 꺼냈다.

“새로 하나 새기자.”

“뭘요?”

강무진은 잠시 아이를 보았다. 숯가루가 묻은 얼굴과 잘려 나간 쇠고리를 놓지 않는 손, 겁먹고도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눈이 보였다.

“네가 고를 이름.”

아이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 협곡 남쪽에서 뿔피리 소리가 다시 울렸다. 철수한 병력이 다음 부대를 부르고 있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로젠이 사람들을 일으키는 동안 실바나는 숲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고, 도리아는 수레 바퀴의 축을 살폈다. 라칸은 부상자 하나를 등에 업었다.

아이는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강무진의 소매를 잡았다.

“아이샤.”

“누가 그렇게 불렀지?”

“몰라요. 꿈에서 들었어.”

존댓말과 반말이 뒤섞였으나 목소리는 전보다 또렷했다.

강무진은 철패 위에 정을 댔다. 망치가 없어서 검자루 끝으로 한 획씩 눌러 새겼다.

아이샤.

서툰 글씨였지만 숫자보다 깊었다.

강무진은 철패 한쪽에 망치와 모루를 닮은 작은 각인을 더했다. 그가 벼린 물건에 남기던 표식이었다.

“이제 네 거다.”

아이샤는 철패를 받아 두 손으로 감쌌다.

“안 뺏겨요?”

강무진은 협곡 남쪽을 바라보았다.

먼지 너머로 희미한 금속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창과 갑옷, 수레보다 훨씬 많은 말편자였다. 그리모어가 산정한 대체 병력이 벌써 움직인 모양이었다.

강무진은 검을 들었다.

“못 뺏는다.”

그는 아이샤를 로젠에게 보냈다. 도리아가 망치를 고쳐 쥐는 동안 실바나는 남은 화살을 세었고, 라칸은 부상자를 수레에 태운 뒤 기어코 강무진의 오른편에 섰다.

해방된 사람들이 숲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강무진은 길 한복판에 남아 부러진 사슬을 밟았다.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 사슬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많은 목을 거쳤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계속 두면 다시 누군가를 묶을 물건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녹여야 했다.

사슬뿐 아니라,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는 질서까지.

협곡 너머에서 검은 깃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차 끝 9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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