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9화 떠난 자리

제9화 떠난 자리

첫 협행을 마친 지 사흘째 되던 늦가을 아침이었다.

풍은 마루에 놓인 봇짐의 매듭을 조이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가 그치면서 처마 끝에서는 묵직한 물방울이 떨어졌고, 젖은 산길 위로 엷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본래라면 해 뜨기 전에 산을 내려갈 참이었으나 길이 미끄러워 출발을 늦춘 터였다.

그때 산 아래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는 걸음이었다.

“누가 옵니다.”

아영이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세우자 현허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뒤 회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마당 어귀에 나타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무림맹 집법당의 신패와 붉은 밀랍으로 봉한 편지를 내밀었다.

“송진 장로께서 반드시 현허 어르신께 직접 전하라 하셨습니다.”

현허는 신패를 확인한 뒤 봉인을 뜯었다. 바람에 흔들리던 종이가 그의 두 손 사이에서 팽팽해졌으며, 글을 읽어 내려가던 시선은 마지막 줄에 이르러 오래 머물렀다.

“무슨 일이에요?”

현허가 말없이 편지를 건네자 아영은 빠르게 내용을 훑었고 평소라면 먼저 캐물었을 그녀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풍을 돌아보았다.

“노하촌에 보냈던 사람이 사라졌어.”

풍의 손이 봇짐 위에서 멎었다.

노하촌이라는 세 글자가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낮은 돌담과 비뚤어진 장승, 장독 뚜껑을 두드리며 자신을 부르던 동구 할멈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떠올랐고, 황소 같은 덩치로 닭 한 마리를 피해 달아나다 흙바닥에 넘어진 황우의 모습도 뒤따랐다. 하지만 반가운 기억들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말 아래에서 금세 빛을 잃었다.

전령이 젖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정식 조사대는 아니었습니다. 변경의 충돌을 우려한 맹이 결정을 미루자 송진 장로께서 믿을 만한 제자를 먼저 보냈습니다. 사흘 전부터 전서응이 끊겼고, 그가 머물던 방에는 짐과 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다툰 흔적도, 억지로 끌려간 자국도 없었습니다.”

현허는 편지를 접지 않은 채 물었다.

“마지막 전서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느냐?”

“실종자들이 마을 밖으로 끌려간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노하촌 안에 길이 있다는 말까지는 남았으나, 뒤쪽은 찢겨 나가 읽을 수 없었습니다.”

노하촌 안에 길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풍의 오른손 검지가 싸늘해졌다. 잠잠하던 은빛 반지가 가늘게 떨리면서 살갗 안쪽으로 찬 기운을 밀어 넣었고, 북쪽을 향해 손가락을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에 풍이 반지를 감싸 쥐었으나 진동은 끊이지 않았다.

“확인된 실종자는 열셋입니다. 약초꾼과 짐꾼이 대부분이며, 사냥꾼 둘과 의원 조수 하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련 보고서 일부는 맹 안에서 사라졌고 조사대를 보내자는 안도 두 차례 막혔습니다. 두 번째 안을 올렸던 서리는 곧 다른 부서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마루 한쪽에는 장터에서 거둔 검은 이리 문양의 나무패가 놓여 있었다. 품삯으로 사람들을 꾀어 약향에 취하게 한 뒤 북쪽으로 보내려던 자들, 노하촌에서 사라진 약초꾼과 짐꾼, 사라진 보고서가 풍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흐릿한 길로 이어졌다. 누가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변경의 산길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맹에서는 마교의 짓으로 봅니까?”

전령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노하촌이 마교 세력권과 맞닿아 있어 그 가능성을 가장 크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공식 보고에서는 아직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가능성만으로는 부족하다.”

현허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마교의 짓이라 확신한다면 보고서를 없애고 조사까지 막을 까닭이 없지. 마교의 손이 맹 안까지 들어왔거나, 그 이름 뒤에 숨으려는 자가 따로 있을 게다. 어느 쪽이든 인장만 믿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

정파라는 이름이 옳음을 보장하지 않듯, 마교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죄를 설명할 수도 없었고 장터의 흑랑방도들은 사도련을 입에 올렸으나 실제로 그 명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었다. 풍은 마루 끝에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는 이름보다 눈앞에 남은 흔적을 좇아야 한다는 현허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송진은 우리가 노하촌으로 갈 줄 어찌 알았느냐?”

“장터의 일을 보고받고 짐작하셨답니다. 검은 이리 문양을 쫓는다면 결국 그곳으로 향할 것이라면서, 무림맹의 인장을 믿지 말고 인장을 들고 온 사람부터 살피라는 말씀도 전하셨습니다.”

현허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

“그 늙은이가 이제야 사람 보는 법을 배웠군.”

현허는 곧바로 산을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이후로는 전서응을 보내지 말고, 연락할 일이 생기면 백운령 남쪽의 버려진 산신각 세 번째 기둥 아래에 표식을 남기라는 짧은 답신도 적었다. 붓을 놓은 그가 전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맹의 인장이 찍힌 종이는 쓰지 말라고 전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전령이 떠나자 현허는 펼쳐 둔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렸고 노하촌으로 통하는 큰길은 두 갈래였으나 어느 쪽을 택하든 변경의 초소를 지나야 했다.

“우리는 조사자가 아니라 약초를 팔러 가는 이들로 들어간다. 풍은 약초꾼, 아영은 호위, 나는 길잡이 노인으로 보이게 하마. 신패와 무복은 감추고 마을 안에서는 서로의 기척이 닿는 거리를 지키되, 무엇을 아는지 먼저 드러내지 않는다. 기맥을 보는 눈과 반지의 힘도 사람을 구해야 할 때가 아니면 숨겨라.”

풍은 노하촌으로 곧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사라진 이들 가운데 아는 이름이 있을지도 몰랐고 동구 할멈과 황우의 안위도 당장 확인하고 싶었지만, 누군가 맹의 보고서까지 지울 수 있다면 자신들이 오는 길을 살필 가능성도 있었다.

“먼저 보고 듣겠습니다.”

“힘이 필요해지면?”

풍은 질주하던 수레의 멍에를 붙잡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넘치는 힘보다 그것을 멈추는 판단이 더 어려웠으며, 혼자 해결하려 들지 않았기에 열일곱 사람을 다치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사람을 구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쓰겠습니다. 몸이 먼저 움직여도 혼자 감당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말은 꼭 기억해.”

아영이 단단히 못을 박듯 말하자 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리 연락을 받은 분타 무인들이 산정상에 오르자 현허는 숯막의 포로와 봉한 증거를 넘겼다. 검은 이리 문양의 탁본을 따로 챙긴 그는 인계자들의 이름과 신패 번호를 빠짐없이 적었으며, 지나치게 꼼꼼한 것 아니냐는 말에는 붓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답했다.

“보고서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사람이 기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사람을 지켜 주는 법이다.”

포로를 태운 말이 산길 아래로 사라지자 세 사람은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풍도 봇짐의 덮개를 단단히 묶었으나 마당으로 나가기 전 장작간 뒤편에 들렀고, 납작한 돌을 들어낸 뒤 밤비에 젖은 흙을 걷어 내자 손가락 두 마디쯤 아래에서 작은 단지의 뚜껑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낡은 비녀와 동전 몇 닢이 들어 있었다.

풍은 비녀를 집어 들었고 닳아 흐릿해진 무늬 사이에는 흙이 끼어 있었고, 찬 금속은 손바닥의 온기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세월 속에서 희미해졌지만 약초 냄새 밴 옷자락과 머리를 쓰다듬던 손의 감촉만은 남아 있었다. 깊은 땅속에서 낮과 밤조차 잃었던 때에도 이 비녀를 쥐면 햇빛 아래로 돌아가야 할 까닭을 기억할 수 있었다.

“가져가려고?”

아영이 다가와 곁에 쪼그려 앉았다.

“예. 이것만은요.”

“동전은?”

풍은 손바닥 위에서 낡은 동전을 굴렸다. 현허의 집에 머문 뒤 약초를 팔아 조금씩 모은 돈이라 큰 쓸모는 없었으나, 그에게는 산정상에서 보낸 세 해의 손때가 밴 물건이었다.

“두고 가겠습니다.”

“길에서 쓸 수도 있잖아.”

“돌아올 자리에 제 것을 남겨 두고 싶습니다. 그래야 꼭 찾으러 올 것 같아서요.”

풍은 비녀를 천으로 감싸 품에 넣고 단지를 다시 묻었다. 다섯 해의 어둠 끝에 닿은 이 집에서 그는 따뜻한 밥과 사람의 온기를 되찾았으며, 넘치는 힘을 멈추고 나누는 법을 배웠다. 동전 몇 닢은 그 시간을 대신하는 물건이 아니라 자신이 돌아올 곳을 스스로 정했다는 작은 표식이었다.

아영은 함께 흙을 눌러 준 뒤 마른 낙엽을 흩뿌렸고 풍이 둥글고 납작한 돌을 제자리에 얹자 그녀는 가장자리까지 손바닥으로 다져 흔적을 감췄다.

“너무 잘 숨기면 못 찾는 것 아닙니까?”

“돌아오면 내가 찾아 줄게.”

“아영이 먼저 잊으면요?”

“그러니까 너도 기억해. 혼자 돌아오려고 하지 말고.”

풍은 흙이 묻은 아영의 손끝을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예. 함께 돌아와서 꺼내겠습니다.”

마당으로 돌아왔을 때 현허는 문고리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었으며 낡은 지팡이는 벽에 기대 있었으며, 닫힌 문 앞에 선 그의 등은 평소보다 조금 무거워 보였다. 풍에게는 그 모습이 집을 비우는 노인이라기보다 오래전 떠났던 강호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르신께서는 왜 무림맹을 떠나셨습니까?”

현허는 자물쇠를 한 번 당겨 본 뒤 풍을 돌아보았다.

“그게 지금 궁금하더냐?”

“맹 안에서 보고서가 사라지고 조사가 막혔다면,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겁니까?”

바람이 처마 아래의 마른 잎을 밀어 돌확 곁에 쌓았고 현허는 한동안 그 잎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옳다는 이름을 내건 곳이 언제나 옳은 선택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지키려다 사람을 버리는 자도 있고, 사람을 지킨다면서 그릇된 일을 덮는 자도 있지.”

그것이 전부였고 풍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짧은 대답 뒤에 오래 묵은 상처가 있음을 느꼈으며, 현허가 무림맹을 떠난 까닭과 송진의 편지를 받고 다시 길을 나서는 까닭은 서로 멀리 떨어진 일이 아닌 듯했다.

아영은 처마 아래의 작은 풍경을 떼어 봇짐에 매달았고 바람이 드나들 때마다 울리던 맑은 소리가 사라지자 집은 벌써 빈자리처럼 고요해졌다.

“그것도 가져갑니까?”

“빈집에서 혼자 울면 쓸쓸하잖아.”

“풍경도 쓸쓸한 줄 압니까?”

“모르면 네가 대신 쓸쓸해하면 되지.”

아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도 풍경이 상하지 않도록 매듭을 두 번 확인했다. 풍 역시 약초가 든 등짐을 짊어진 뒤 닫힌 문과 연기 없는 굴뚝, 아침마다 물을 길었던 돌확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발목을 붙들었지만 노하촌에서는 지금도 누군가가 다음 차례가 되어 사라질 수 있었다.

“가자.”

현허가 먼저 젖은 산길로 걸음을 내디뎠다.

풍은 품속의 비녀를 한 번 눌러 본 뒤 그 뒤를 따랐고, 아영도 풍경을 매단 봇짐을 둘러메고 곁으로 다가왔다. 지붕 한쪽이 나무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내다가 산허리를 돌자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 순간 아영의 등 뒤에서 풍경이 작게 울렸으며, 맑은 여운은 세 사람의 발소리에 섞여 한동안 따라왔다.

풍은 돌아보지 않았고 묻어 둔 동전과 함께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남아 있는 한, 떠나는 것은 버리는 일과 달랐다. 그는 발밑의 젖은 뿌리와 돌을 살피며 현허의 걸음에 맞췄다.

산등성이 아래에 이르자 길이 남쪽 장터와 북쪽 변경으로 갈라졌고 현허가 지팡이 끝으로 북쪽 길을 짚자 아영은 봇짐의 매듭을 고쳐 맨 뒤 말없이 그쪽으로 들어섰다. 풍도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노하촌의 사람들과 사라진 조사자, 마을 안에 있다는 정체 모를 길이 굽은 능선 너머에 있었다.

세 사람은 북쪽 갈림길로 들어섰다.

몇 걸음을 옮겼을 때 은빛 반지가 이전보다 분명하고 집요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싸늘한 진동은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번지며 처음에는 풍의 맥박을 거슬렀지만, 차츰 간격을 좁히더니 마침내 하나의 박자로 포개졌다.

바로 그 순간, 북쪽 어딘가에서 같은 박자의 희미한 응답이 돌아왔다.

회차 끝 9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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