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첫 협행(俠行)
그 일이 있은 것은, 마지막 가을이 깊어 가던 어느 장날이었다.
밤새 내린 비가 그친 뒤라 산길은 축축했고, 골짜기마다 엷은 물안개가 걸려 있었으며 풍과 아영은 현허가 적어 준 물건 목록을 품에 넣고 산 아래 장터로 향했다. 식량과 등잔기름을 사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심부름이었지만, 두 사람의 신경은 붙잡힌 복면인의 품에서 나온 쪽지에 온통 쏠려 있었다.
쪽지에 적혀 있던 점포는 장터 서쪽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오래된 창고를 빌려 짐꾼을 모은다는 곳이었다.
“먼저 손쓰지 말고 눈에 담아 두기만 하라.”
아영이 현허의 말을 흉내 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얼굴로 말하면 별로 못 믿겠는데.”
“제가 무슨 얼굴을 했습니까?”
“수상한 놈을 보면 당장 멱살부터 잡을 얼굴.”
풍은 대꾸하지 못했고 아영은 피식 웃으며 앞서 걸었고, 젖은 나뭇잎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제 서로의 선택을 함부로 막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렇다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풍은 장터에 닿을 때까지 몇 번이나 아영의 걸음과 주변 산등성이를 번갈아 살폈다.
장터 가까이 이르자 엿을 고는 냄새와 기름에 부침개를 지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섞여 왔다. 장꾼들의 외침과 흥정하는 목소리, 짐승 우는 소리도 점차 선명해졌으며, 겉보기에는 여느 장날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서쪽 거리로 접어들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좌판을 편 장사치들은 자꾸만 한쪽을 흘끔거렸고, 손님들도 그곳을 지날 때면 목소리를 낮췄다. 거리 끝에는 검은 천을 처마에 내건 점포가 있었는데, 간판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으나 천 한가운데에 이빨을 드러낸 검은 이리가 그려져 있었다.
풍은 발걸음을 늦췄다.
문양을 보는 순간 은빛 반지가 손가락을 나직이 잡아끌었고, 낯선 기운이 손목까지 저릿하게 번졌다. 기맥을 보는 눈을 열자 점포 주위로 엉킨 기운의 흔적이 희미하게 떠올랐고, 그 빛은 독침을 남기고 북쪽으로 달아났던 감시자의 잔흔처럼 탁한 먹빛이었다.
“저기 맞지?”
아영이 입술만 움직여 물었다.
풍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포 앞에는 짐꾼을 뽑는다는 나무판이 세워져 있었다. 건장한 사내 스무 명 남짓이 줄을 서 있었는데 대부분 옷이 해지고 얼굴이 수척한 것이, 흉년을 견디다 못해 일거리를 찾아온 농부나 약초꾼들로 보였다. 검은 두건을 쓴 사내 둘은 지원자들의 팔과 어깨를 만져 보고 나이를 물었으며, 쓸 만하다 싶은 사람에게 작은 나무패를 건넸다.
그 패에도 검은 이리가 새겨져 있었다.
풍의 속이 서늘해졌다. 석구는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건장한 사람의 이름을 나무패에 적었다고 했는데, 눈앞의 사내들은 품삯이 좋은 운송 일이라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짐은 무엇을 나릅니까?”
줄 앞쪽에 선 중년 사내가 물었다.
검은 두건의 사내가 그의 팔뚝을 움켜쥐며 웃었다.
“북쪽 광산으로 소금과 약재를 나른다. 닷새만 고생하면 은전 두 냥이야.”
“닷새에 두 냥이나 주신다고요?”
“숙식도 대 준다. 가족 먹여 살릴 생각이면 쓸데없는 것 묻지 말고 이름이나 대.”
중년 사내는 잠시 망설였으나 품삯을 다시 듣자 나무패를 받아 들었다. 풍은 패에서 풍기는 냄새까지 맡을 수는 없었지만, 기운을 살피자 표면에 희미한 자줏빛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독이라기에는 약하고 약향이라기에는 탁했고 오래 쥐고 있으면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종류일지도 몰랐다.
아영도 줄을 바라보다가 소매 아래로 주먹을 말아 쥐었고 풍이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는데, 아직은 나서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맞은편 국밥집에 자리를 잡았다. 풍은 문 가까이에 앉아 점포 안팎을 살폈으며, 아영은 국밥을 먹는 척하면서 지원자들의 수와 인상착의를 기억했다. 한 시진이 지나자 나무패를 받은 사람은 열일곱이 되었다.
열일곱.
계곡의 나무에서 발견한 표식과 같은 수였다.
마지막 지원자가 점포 안으로 들어간 뒤 검은 두건의 사내들은 문을 닫았다. 풍은 벽 너머의 기척까지 헤아리려 했으나 여러 사람의 기맥이 뒤엉켜 흐름을 정확히 가르기 어려웠고, 눈에 힘을 더 주자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결국 숨을 길게 내쉬며 능력을 거두자 아영이 물잔을 밀어 주었다.
“왜 그래?”
“안에 몇 명 있는지 보려 했습니다. 너무 겹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도 무리하더니 또 그러네.”
아영은 풍이 잔을 들 때까지 손을 거두지 않았고 풍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점포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나무패를 받은 사람이 열일곱입니다.”
아영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멎었다.
“산에서 본 표식도 열일곱이었지.”
“우연 같지는 않습니다.”
둘은 현허에게 돌아가 알릴 증거를 더 찾기로 했다. 점포 뒤편의 수레와 출발 시각만 확인하면 충분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거리 바깥에서 요란한 비명이 터졌다.
와장창!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포목 몇 필이 진흙바닥으로 굴렀다. 장터 사람들이 황급히 길을 비키자 험상궂은 사내 대여섯이 한 노인의 좌판을 에워쌌는데, 그들의 소매와 허리띠에도 검은 이리 문양이 박혀 있었다.
“이 늙은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쓰러진 좌판을 발로 짓밟았다.
“흑랑방 구역에서 장사를 하려면 자릿세를 내야 한다고 했지?”
“나리, 이번 달은 정말 형편이 어렵습니다. 다음 장날까지만 말미를 주시면 꼭…….”
“말미?”
사내는 비단 한 필을 집어 진흙탕에 내던졌다.
“그럼 물건으로 대신 받으면 되겠군. 이 좌판째 가져가도 되겠고.”
노인이 사내의 바짓자락을 붙들자 옆에 있던 자가 발을 들었고 굽은 등을 걷어차려는 움직임이었다.
풍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젓가락을 던졌다.
딱!
날아간 젓가락이 사내의 무릎 뒤를 정확히 때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사내가 휘청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자 거리의 시선이 일제히 풍에게 모였고, 아영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먼저 손쓰지 말라셨는데.”
“저 발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 말이 아니라…….”
아영은 한숨을 삼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풍의 옆에 섰다.
“됐어. 이미 들켰으니 끝까지 보자.”
흑랑방 사내들이 몰려왔고 덩치 큰 자는 풍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코웃음을 쳤다.
“웬 촌놈이 흑랑방 일에 끼어드는 것이냐?”
풍은 노인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형편이 어렵다 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그만두시지요.”
“오늘은?”
사내의 입꼬리가 비뚤어졌다.
“애송이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이곳에서는 우리가 법이다.”
그가 눈짓하자 부하 둘이 달려들었다. 한쪽은 주먹을 내질렀고 다른 쪽은 허리춤에서 짧은 몽둥이를 뽑았지만, 풍의 눈에는 그들이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기운이 향할 길이 훤히 보였다. 수련이 얕고 하체가 불안한 데다 힘만 앞세운 움직임이었다.
풍은 반걸음 옆으로 비키면서 주먹을 손바닥으로 흘렸다. 방향이 틀어진 주먹이 몽둥이를 든 사내의 턱에 꽂혔고, 뒤따라 휘둘러진 몽둥이는 도리어 동료의 정수리를 때렸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부여잡고 나뒹굴었다.
장터가 조용해졌다.
덩치 큰 사내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무공을 익힌 놈이었군. 모두 쳐라!”
세 사내가 병장기를 뽑자 칼날이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 가운데, 풍은 그들이 품은 살기를 손끝으로 또렷이 읽어 냈다.
몸이 먼저 움직이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풍은 내공을 단전 아래로 눌러 담은 채 앞으로 파고들었다. 가장 먼저 찔러 온 칼등을 손끝으로 튕기자 칼끝이 허공으로 치솟았으며, 곧바로 비어 버린 옆구리의 혈도를 짚었다. 사내가 숨을 삼키며 무너지기도 전에 뒤편에서 몽둥이가 날아왔지만, 풍은 몸을 낮춰 피한 뒤 손목의 관절을 가볍게 밀었다.
우두둑.
뼈가 부러진 소리는 아니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저절로 풀리며 몽둥이가 땅에 떨어졌고, 풍이 발끝으로 그것을 걷어 차자 세 번째 사내의 발등에 정확히 맞았다. 균형을 잃은 자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순간 아영이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쳐 진흙바닥에 눌러 버렸다.
“뒤는 보지 마. 내가 맡을게.”
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과 몽둥이가 다시 사방에서 덮쳐 왔으나, 흐름을 읽고 나니 위협이 되지 못했다.
풍이 칼날 사이를 비껴 다니며 혈도와 관절만 짚었다. 그때마다 무기가 하나씩 땅으로 떨어졌다.
잠시 뒤에는 흑랑방 무리 모두가 팔다리에 힘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풍을 바라보았고 몸은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으나 그의 손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살기를 품었다면 몸이 어떤 힘을 터뜨렸을지 알 수 없었기에, 풍은 현허가 그토록 경계한 까닭을 새삼 깨달았다.
덩치 큰 사내만이 사색이 된 채 뒷걸음질 쳤다.
“너, 너는 어느 문파의 놈이냐?”
“내세울 문파는 없습니다.”
풍이 다가가자 사내는 허리 뒤로 손을 숨겼다. 그의 기맥이 오른팔로 급격히 몰리는 것을 본 풍은 즉시 손목을 낚아채 비틀었고, 소매 안에서 가느다란 독침 하나가 떨어졌다.
침 끝에 맺힌 검푸른 빛은 전날 석구의 몸에서 뽑아낸 것과 같았다.
풍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 독침은 어디에서 얻었습니까?”
“무, 무슨 소리냐? 나는 모른다!”
“거짓말입니다.”
풍이 손에 힘을 더하자 사내의 무릎이 꺾였고 그는 비명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시선은 저도 모르게 서쪽 점포를 향했다. 짐꾼들을 모으던 곳이었다.
아영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풍!”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점포 뒤편에서 말 울음이 터졌다. 검은 이리 깃발을 단 수레 두 대가 골목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으며, 천막으로 가린 수레 안에는 열일곱 사람의 기척이 뒤엉켜 있었다. 아까까지 줄을 서 있던 지원자들의 옷자락도 틈새로 언뜻 보였다.
풍이 몸을 돌리자 덩치 큰 사내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게 둘 것 같으냐! 흑랑방은 사도련과 닿아 있는 몸이다. 우리를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아느냐!”
풍은 붙들린 다리를 가볍게 털어 사내를 떼어 냈다.
“그 말은 나중에 현허 어르신께 하십시오.”
그는 땅을 박찼다.
수레가 장터 어귀에 닿기도 전에 풍의 몸이 지붕 위를 스쳐 지나갔다. 수레를 모는 자가 채찍을 휘둘렀지만 풍이 허공에서 손가락을 튕기자 채찍 끝이 끊어졌고, 마부가 놀라 고개를 드는 사이 그는 수레 앞에 내려서 두 손으로 멍에를 붙잡았다.
질주하던 말 두 필이 앞발을 버티며 울부짖었다. 바퀴가 진흙을 깊게 파고들고, 수레의 나무틀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그래도 풍은 한 걸음도 밀리지 않았다.
“멈추십시오.”
마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뒤따라온 아영은 두 번째 수레로 뛰어올라 천막을 걷어 냈고 안에는 나무패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쓰러져 있었고, 눈은 감겨 있었으나 가슴은 아직 오르내렸다. 아영은 손가락을 코밑에 대 숨을 확인한 뒤 눈꺼풀을 벌려 동공을 살폈으며, 수레 구석에서 연기를 내뿜는 검은 향로를 찾아 밖으로 던졌다.
“다들 살아 있어! 향에 약을 섞었어!”
바닥에 떨어진 향로가 깨지면서 자줏빛 연기가 가늘게 흩어졌고 풍이 나무패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기운이었다.
마부 둘은 달아나려 했지만 장터 사람들이 길을 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흑랑방을 피해 눈을 내리깔던 이들이었으나, 포목 장수는 부러진 좌판 다리를 지팡이처럼 움켜쥔 채 앞을 막았고 국밥집 주인은 커다란 국자를 들고 이를 악물었다.
풍은 그 광경을 보며 가슴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자신이 모든 일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두려움에 눌려 있던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 틈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아영은 수레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던 마부 하나의 다리를 걸었고 진흙에 처박힌 자가 손을 품속으로 넣자 그녀는 곧바로 팔을 꺾어 등 뒤로 누르며 턱을 움켜쥐었다.
“입 벌려!”
사내는 이를 악문 채 무언가를 깨물려 했지만 아영이 턱 아래 혈도를 세게 누르자 입술 사이로 검은 환약 하나가 굴러 나왔다. 전날 붙잡은 복면인과 마찬가지로 자결용 독환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거네.”
아영은 독환을 천 조각에 싸서 품에 넣은 뒤 사내의 혈도를 눌러 움직임을 막았고 이어 수레와 마부들의 품을 직접 뒤졌으며, 앞섶 안쪽에 숨겨진 종이뭉치를 찾아 펼쳤다.
“풍, 명단이야.”
거기에는 나무패를 받은 짐꾼 열일곱 명의 이름과 나이, 사는 마을이 적혀 있었다. 종이 뒤쪽에는 북쪽 길을 표시한 지도가 붙어 있었는데, 그 끝에는 목적지 대신 검은 이리 문양만 찍혀 있었으며 아래에는 알아보기 힘든 붉은 인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현허께서도 그냥 구경만 했다고는 못 하시겠지?”
아영은 명단과 지도를 접어 품에 넣으면서 풍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힘은 괜찮아?”
풍은 금빛 반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막았습니다.”
“이번에는?”
“다음에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깨진 향로와 독침을 천으로 단단히 싸 주었다.
“그러면 다음에도 혼자 하지 마. 네가 그 힘을 누르는 동안 내가 뒤를 볼 테니까.”
풍은 천 꾸러미를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란이 가라앉자 포목 장수가 다가왔고 노인은 진흙 묻은 손을 몇 번이나 옷자락에 닦은 뒤 풍의 손을 붙잡았다.
“고맙습니다, 젊은 협객님. 나 하나뿐 아니라 저 사람들까지 살렸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협객님.
처음 들어 보는 호칭에 풍은 어깨가 굳었다. 약초를 캐며 산을 오르내릴 때도, 깊은 땅속에서 반지와 씨름할 때도 자신이 그런 이름으로 불릴 날은 상상하지 못했다. 낯설고 민망했지만 노인의 떨리는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풍이 노인을 일으켜 세우자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왔고 누군가는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고, 다른 이는 흑랑방이 다시 올 때 증언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영은 흩어진 포목을 주워 담다가 풍과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웃으셨는데요.”
“그냥…… 오늘은 좀 협객 같아서.”
아영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포목을 안아 노인에게 가져다주었고 다만 귓불이 붉어진 것은 멀리서도 보였다.
두 사람은 해가 기울 무렵 산정상의 집으로 돌아왔다. 현허는 마루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으며, 아영이 가져온 명단과 지도에 이어 독침과 독환, 깨진 향로 조각을 차례로 살폈다. 검은 이리 문양이 찍힌 지도를 펼쳤을 때 그의 손이 잠시 멎었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이를 반듯하게 폈다.
“먼저 손쓰지 말라 했거늘.”
아영이 슬그머니 풍을 가리켰다.
“풍이 먼저 젓가락을 던졌어요.”
“노인을 걷어차려 했습니다.”
“저도 그건 봤어요. 안 던졌으면 제가 찼을 거예요.”
현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낮게 숨을 내쉬었다.
“약한 이를 구한 것은 잘했다. 붙잡혀 갈 사람들을 살린 것도 그러하니라. 다만 오늘 장터에는 눈이 너무 많았다.”
“죄송합니다.”
풍이 고개를 숙이자 현허는 지도에서 시선을 떼어 그를 보았다.
“협을 행한 일을 사죄할 필요는 없다. 네가 무엇을 위해 힘을 썼는지 잊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강호에서는 옳은 선택에도 값이 따르는 법이지.”
현허는 독침을 등잔불에 비춰 보았다. 침 끝의 검푸른 빛을 확인한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고, 곁에 놓인 독환까지 살핀 뒤에는 입가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흑랑방이 단순한 장터의 왈패라면 이런 독을 쓰지도, 붙잡히자 목숨부터 끊으려 하지도 않을 게다. 사도련의 이름까지 내세웠으니 오늘 너희가 밟은 꼬리는 생각보다 긴 짐승에게 이어졌겠지.”
풍은 무릎 위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자신이야 맞서 싸울 수 있어도 장터의 노인과 짐꾼들은 그렇지 못했으며, 힘을 쓰는 순간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새로운 책임이 생긴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 났다.
현허는 그런 풍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지도와 명단을 챙겼다.
“그래도 잘했다, 단풍아.”
짧은 한마디였으나 풍은 고개를 들었다.
“오늘 네 손이 늦었다면 열일곱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지. 아영이 수레를 살피고 증거를 챙기지 않았다면 놈들이 어디로 사람을 보내려 했는지도 알아내기 어려웠을 것이고.”
풍은 그제야 굳었던 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제 힘을 옳은 곳에 썼다는 기쁨은 장터에서보다 조용해졌지만, 대신 더 단단한 무언가가 가슴에 남았다. 힘은 가진 것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어디에 내딛고 누구 앞에서 멈출지, 또 누구와 등을 맞댈지를 자신이 골라야 했다.
그날 밤 풍은 마루 끝에 앉아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빛 반지는 푸른 달빛 아래서 희미하게 떨렸고, 손안의 검은 이리 나무패는 여전히 북쪽을 가리키는 듯했다.
길은 멀고 험해 보였다. 그러나 그날의 풍은, 처음으로 제 힘이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사흘 뒤, 무림맹의 인장이 찍힌 편지 한 통이 산정상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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