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신, 대장장이 강무진

제25장 — 빈손의 사절

새벽 종이 울리기 전, 로젠은 서문 앞에 서 있었다.

로젠이 탈 말 한 필과 짐·교대용 말 한 필, 걸어서 갈 호위 네 명뿐이었고 수레는 없었다. 가져갈 물건도 가죽 서류철 하나와 강무진이 만든 단검 한 자루뿐이었다.

단검은 선물이 아니라 견본이었다.

날의 길이는 한 뼘 반이었으며 등은 두껍고, 끝은 무리하게 좁히지 않았다. 손잡이에는 젖은 손에서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얕은 골을 팠다. 화려한 은장도 보석도 없이, 칼날 아래에는 강무진의 작은 각인만 찍혀 있었다.

로젠이 칼집에서 단검을 반쯤 뽑아 보았다.

“왕궁에 가져가기에는 지나치게 수수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무진은 칼날의 빛을 살폈다.

“쓸 물건입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로젠이 단검을 넣었다. 말 안장 뒤에는 지원 요청서와 물자 명세서가 나뉘어 묶여 있었다. 병력 삼백, 석궁과 화살, 말린 곡물, 붕대, 해열초. 하나를 거절당하면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로젠은 문서를 여섯 벌로 만들었다.

강무진은 그가 밤새 고친 흔적을 알고 있었다. 서류철의 금속 잠금쇠가 수십 번 열리고 닫힌 탓에 한쪽만 미세하게 닳아 있었다.

“병력을 주지 않으면 군량을 청하겠습니다.”

로젠이 말했다.

“군량도 어렵다면 의약품을, 그것도 어렵다면 상단 통행세 면제를 요구하겠습니다. 최소한 보루로 오는 물자의 길은 열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로젠은 잠시 서류철을 내려다보았다.

“왜 주지 않는지 알아 오겠습니다.”

강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과 빈말만 들고 돌아오는 것은 달랐다. 거절에도 결이 있었다. 두려워서 물러나는지, 손익을 재는지, 아니면 애초에 사람으로 보지 않는지 알아야 다음 망치질을 정할 수 있었다.

라칸이 서문 위에서 소리쳤다.

“왕궁 놈들이 말 돌리면 목덜미 물고 와!”

로젠이 올려다보았다.

“외교 사절에게 할 배웅은 아닌 듯합니다.”

“물지는 말고 물어보든가!”

“그 정도로 하죠.”

성벽 위에서 웃음이 번졌다. 로젠은 강무진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에 올랐으며, 호위 넷은 두 필의 앞뒤를 에워싼 채 도보 대형을 잡았다.

“열흘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길 조심하십시오.”

“보루를 부탁드립니다.”

“원래 하던 일입니다.”

로젠은 더 말하지 않은 채 호위들과 함께 서쪽 길로 나아갔다. 말발굽 소리가 마른 땅을 두드리며 멀어지다가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강무진은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뒤로 보루의 하루는 더 빨리 흘렀다.

로젠이 떠난 자리를 메우느라 서기들이 두 배로 뛰는 사이, 식량 배급표에서는 밀가루 한 자루가 맞지 않았고 북쪽 방벽에 쓸 돌을 운반하던 수레 하나가 부러졌다. 라칸은 새로 편성한 조장들이 명령을 제각기 알아듣는다며 훈련장을 뒤집어 놓았다.

대장간도 쉬지 않았다.

강무진은 날이 밝으면 창촉을 검사하고 해가 지면 투구의 테를 맞췄으며, 밤에는 도리아와 함께 새 화로의 바람길을 손봤다. 화로가 늘어난 만큼 숯의 소모도 빨라졌으나 불을 세게 지피기만 하면 쇠의 표면부터 타 버렸다.

“셋째 화로가 너무 먹는다.”

도리아가 풀무 손잡이를 놓으며 말했다.

“바람구멍이 큽니다.”

“내가 뚫은 거다.”

“그래서 큽니다.”

도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크흠. 인간이 드워프 화로에 토를 다는군.”

“쇠가 토를 달고 있습니다.”

강무진이 달군 쇳조각을 집게로 들어 보이자, 표면에는 얇은 산화막이 일어났고 모서리는 속보다 먼저 희게 달아 있었다.

도리아는 한동안 쇳조각을 노려보았다.

“한 치 줄이지.”

“반 치면 됩니다.”

“반 치로 안 되면?”

“그때 더 줄이죠.”

도리아는 콧김을 뿜었으나 곧 반 치짜리 마개를 깎기 시작했다. 화로 앞에서는 간섭을 받지 않는 그였지만, 쇠가 내놓은 답까지 무시하지는 않았다.

강무진은 다시 모루로 돌아갔다.

열흘 동안 창촉 백사십 개와 검 서른한 자루가 무기고로 들어갔고, 방패 테는 쉰여섯 벌이 완성되었다. 아이샤가 맡은 표준 못도 처음보다 불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러나 서쪽 길에서는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열하루째 정오, 강무진은 말 편자 하나가 서문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금속이었다. 출발 전 그가 직접 못을 조여 준 편자였는데, 오른쪽 앞굽의 바깥쪽이 깊게 닳아 있었다. 말이 지쳤다는 뜻이었다.

그는 망치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서문이 열리면서 먼저 들어온 것은 도보 호위 두 명이었다. 네 호위 모두 돌아왔고 피 냄새도 없었다. 뒤이어 호위 하나가 짐말의 고삐를 잡았고, 다른 하나는 지친 로젠의 말 곁에서 보조를 맞췄다.

로젠은 마지막에 말을 탄 채 들어왔다.

망토에는 왕도의 먼지가 회색 막처럼 내려앉아 있었고 수염이 자랐으며 눈 아래도 검었다. 그러나 허리는 굽지 않았고, 가죽 서류철도 여전히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라칸이 훈련장을 가로질러 왔다.

“병력은?”

로젠은 말에서 내렸다.

“없습니다.”

“식량은?”

“없습니다.”

“약은?”

“없습니다.”

라칸의 꼬리가 뻣뻣하게 섰다.

“그럼 대체 뭘 받아 왔는데?”

로젠은 말고삐를 호위에게 넘겼다.

“답을 받아 왔습니다.”

강무진은 그의 서류철을 보았다. 떠날 때 팽팽하던 가죽끈은 느슨해졌으나, 안에 넣어 갔던 문서들은 그대로인 듯했다.

“안에서 이야기하죠.”

강무진이 말했다.

회의실에는 강무진과 로젠, 라칸, 도리아가 모였다. 실바나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숲에서 원로회를 설득하고 있었다.

아이샤가 물병과 굳은 빵을 가져왔다. 로젠은 물을 한 잔 비우고 나서야 서류철을 열었다.

문서 여섯 벌이 탁자 위에 겹쳐졌다. 로젠은 그것을 하나씩 읽지 않았다. 맨 위의 붉은 거절선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열흘 동안 닫혀 있던 왕도 회의실이 그의 목소리 속에서 다시 열렸다.

사흘을 기다려 들어간 국경회의에서 군무차관은 피난민 명부를 덮지도 않은 채 말했다.

“레던의 봉신이 되십시오. 지휘관과 주둔군을 왕실이 정하면 병력 지원을 검토하겠습니다.”

로젠은 마족 동원표와 그리모어의 이동로를 그 앞에 밀었다.

“강철보루가 무너지면 이 길의 다음 성벽은 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겁니다. 통치권과 징세권, 주둔권을 넘기면 그 성벽을 왕실이 책임지겠습니다.”

대답 하나면 병력과 곡물을 얻을 수 있었다. 대신 광산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깃발만 바꿔 다시 남의 명령 아래 놓일 터였다.

“거절합니다.”

그 한마디 뒤 병력 요청서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재무관은 곡물 반출 허가서를 접으며 값을 네 배로 불렀고, 구호 담당관은 의약품 상자를 내주는 대신 강철보루라는 이름을 지우라고 했다.

“레던 왕국 서부 유민 임시수용지로 기록하겠습니다. 배급은 왕실 관리가 맡습니다.”

로젠은 약품 목록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받아 가면 사람은 살릴 수 있었지만, 문서에 박힌 첫 말뚝이 보루 전체를 레던 땅으로 바꿀 터였다.

“약은 사겠습니다. 이름과 사람은 넘기지 않습니다.”

“그 조건으로는 한 상자도 국경을 나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빈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관리의 인장이 내려앉았고 마지막 허가서까지 닫혔다. 로젠은 그 자리에서 서부 귀족 셋과 왕실 밖 상단의 이름만 따로 적었다. 공식 지원은 잃었지만 사병 출신 교관과 약초, 철제 농기구로 값을 치를 우회로 하나를 건졌다.

현재의 회의실에서 로젠은 붉게 벗겨진 검지를 폈다.

“저들이 우리를 몰라서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는 이름을 먼저 붙이려 했습니다.”

“레던이 비겁해서만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 방식으로는 우리와 약속할 수 없습니다. 약속이 깨졌을 때 책임질 군주도, 조약을 계승할 관청도, 국경을 확정할 법도 없으니까요.”

라칸이 팔짱을 꼈다.

“우리가 여기 있고, 계속 마족을 막아 온 걸로는 부족하단 거냐?”

“전장에서는 충분합니다. 외교에서는 아닙니다.”

“종이 한 장 없어서?”

“그 종이 뒤에 무엇이 서 있는지가 없어서입니다.”

로젠의 말은 정중했으나 끝이 무거웠다.

“우리는 군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세금을 대신해 노동과 물자를 걷고, 성벽을 세우고, 죄를 정하고, 피난민에게 거처를 나눠 줍니다. 이미 나라가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거절 문서를 한 장씩 포갰다.

“그런데 밖에서 물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을이라 하기에는 군대가 크고, 영지라 하기에는 주인이 없으며, 나라라 하기에는 이름과 법이 없습니다.”

강무진은 탁자 위의 임시 출입패를 집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무쇠 표찰이 낮게 울렸지만, 그는 그것을 부러뜨리지 않았다. 열을 가하지 않은 쇠를 억지로 꺾으면 균열만 남았다. 잘못된 형상을 고치려면 먼저 달궈야 했다.

“지금 당장 이름을 붙인다고 나라가 되지는 않습니다.”

강무진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왕관을 만든다고 왕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로젠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그 역시 그렇습니다.”

강무진은 표찰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무엇이 없는지는 알았습니다.”

로젠이 천천히 숨을 내쉬자, 긴 여정 끝에 처음으로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듯했다.

강무진은 거절당한 지원 요청서를 다시 살폈다. 종이는 멀쩡했고 글도 틀리지 않았으며, 필요한 수량과 이유도 정확했다.

실패한 것은 문서가 아니었다.

문서를 내민 손 뒤에 세워 둘 이름이 없었다.

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북쪽 망루의 경비병이 들어왔다. 그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무릎에 손을 짚었다.

“대장장이님.”

“동쪽 숲길에서 피난민들이 들어왔습니다. 스무 명이 넘습니다. 뒤에 더 있다고 합니다.”

“추격은?”

라칸이 먼저 일어섰다.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곽 감시초소 하나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강무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의 감각 끝에 작은 쇳조각 하나가 걸렸다.

보루 바깥 동쪽, 아직 방벽이 닿지 않은 피난민 정착지 쪽이었다.

경보용 종의 추였다.

그것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강무진은 망치를 집어 들었다.

“라칸. 병력을 모으십시오.”

라칸은 이미 문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강무진은 탁자 위의 표찰을 한 번 보고 돌아섰다.

레던은 그들을 어느 나라의 사람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적은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디를 먼저 치면 되는지를.

회차 끝 25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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