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16화 같은 적(敵)

무사 하나가 지하 한쪽에 놓인 거대한 항아리를 향해 도를 내리쳤다.

쩌엉—!

두꺼운 항아리가 산산이 갈라지며 시커먼 독무가 왈칵 쏟아졌다. 바닥을 핥듯 번진 독기는 순식간에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고, 그것이 닿는 자리마다 갇힌 이들의 희미한 기운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우리 안에서 기침이 잇따라 터졌다. 오랫동안 독에 시달린 이들은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기에 쇠창살을 붙잡고 몸부림치거나,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일 뿐이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아이마저 목을 움켜쥐며 가느다란 기침을 쏟아 냈다.

풍은 당장이라도 아이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사병들의 칼날이 밀려들었고, 독고무흔의 명을 받은 다른 무사들은 남은 항아리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깨지는 순간, 이곳에 있는 누구도 살아 나가지 못할 터였다.

“아영아, 항아리부터 막아!”

외침과 함께 풍은 가장 가까운 무사의 팔목을 걷어찼다. 도가 허공으로 튀자 손바닥으로 가슴을 밀어 혈도를 짚었고, 쓰러지는 몸을 밟고 솟구쳐 두 번째 무사의 어깨를 후려쳤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무사가 나뒹굴었지만, 깨진 항아리에서 흘러나온 독무는 벌써 우리 사이로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숨을 못 쉬어!”

아영은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채 항아리를 향하던 무사의 무릎을 짧은 검의 자루로 찍었고 다만 곧 피어오른 독기에 휩싸이자, 몇 걸음 물러나 거칠게 기침했다.

풍의 속이 타들어 갔고 흐름을 읽는 눈도, 바위를 부수는 주먹도 저 독 앞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독무는 쳐 낼 칼날도, 한쪽으로 흘릴 경력도 아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이 바닥과 벽을 타고 사방에서 조여 오고 있었다.

계단 위의 현허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노인의 장력이 독고무흔의 어깨를 스치며 돌벽을 뒤흔들었으나, 마지막 일격을 잇기 직전 우리 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 찰나 독고무흔이 소매 속 독침을 한 움큼 뿌리고 몸을 돌렸다.

“이런!”

현허가 독침을 털어 내는 사이, 독고무흔은 어두운 통로를 향해 달아났고 제 수하들이 독무에 휩싸이는 것조차 돌아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통로 입구에 막 다다른 독고무흔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검붉은 기운이 피어올랐고 장원의 중앙 전각과 객잔에서 보았던 젊은 사내가 검붉은 도를 늘어뜨린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느린 걸음과 달리 그의 기세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으며, 주변을 잠식하던 독무조차 검붉은 마기에 닿자 겁먹은 벌레처럼 물러났다.

풍은 본능적으로 아영과 우리 앞을 가로막았고 저 사내는 객잔에서 금빛 반지의 힘을 시험했고, 현허가 나타나기 전까지 살벌한 도를 겨누었던 자였다. 이 난장판에 모습을 드러낸 까닭도, 누구의 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독고무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혈혼…… 네놈이 어찌 여기에!”

검붉은 도의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고 다만 독고무흔을 바라보는 눈에 오래 벼린 듯한 살기가 떠올랐다.

“교주의 개가 감히 내 앞길을 막아?”

독고무흔이 양손을 떨치자 검누런 독침이 빗발처럼 쏟아졌고 혈혼이라 불린 사내는 도를 뽑지도 않은 채 칼집을 비스듬히 세웠다. 검붉은 기운이 반달처럼 번지며 독침을 모조리 튕겨 냈고, 그 가운데 몇 개는 되돌아가 독고무흔의 발치를 파고들었다.

마기를 품은 자가 어째서 마교와 결탁한 독고무흔을 노리는가. 풍은 영문을 짐작할 수 없었으나, 저 살의가 방금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으며 혈혼의 기운은 가라앉은 용암처럼 고요했지만, 그 밑에서는 오랜 세월 눌러 온 분노가 끓고 있었다.

독고무흔은 정면으로 길을 뚫기 어렵다고 여겼는지 벽을 박차고 옆 통로로 몸을 날렸고 혈혼이 뒤따르려다 독무 속에서 기침하는 사람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쯧. 멍청하군. 그건 손으로 밀어낼 독이 아니다.”

풍은 두 팔로 장력을 일으키던 자세 그대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방법을 알아?”

“음독이다. 양강의 기로 태워 흩어라.”

혈혼의 시선이 잠시 풍의 두 눈과 금빛 반지에 머물렀다.

“그 눈으로 독기가 옅은 결을 찾아라. 길부터 만든 뒤 사람들을 빼내면 된다.”

풍은 그제야 현허에게 배운 음양의 이치를 떠올렸고 차고 습한 성질의 독은 바람만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벽에 부딪혀 되밀리며 더 짙게 엉길 뿐이니, 양강의 기로 근원을 태워야 했다.

“왜 우리를 돕는 거지?”

혈혼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착각하지 마라. 너희를 돕는 게 아니다.”

그는 검붉은 도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독고무흔이 사라진 통로로 몸을 돌렸다.

“내 볼일이 저쪽에 있을 뿐이다. 살리고 싶다면 네가 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혈혼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쏘아져 나갔고 횃불이 크게 흔들리며 그의 잔영을 비추었으나, 그마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혈혼…….’

풍은 처음 들은 별호를 마음속으로 되뇌었고 독고무흔은 그를 알아보았고, 교주의 개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마교에 몸담은 자라는 뜻일 터인데도, 혈혼은 마교와 결탁한 독고무흔을 죽일 듯이 뒤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문을 좇을 때가 아니었고 독무 속에서 어린아이의 기침이 다시 들리자 풍은 단전 깊숙이 의식을 가라앉혔다.

뜨거운 기운이 기맥을 타고 두 팔로 솟구쳤다. 산정상에서 수없이 다듬었던 힘까지 손바닥에 모으자 왼손 검지를 타고 팔뚝이 팽팽히 당겨졌고, 풍은 고통을 억누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전에는 하나의 검은 장막으로만 보이던 독무가 수많은 결로 나뉘었다. 짙은 독기는 바닥의 홈을 따라 우리 안으로 스며들었으며, 그 사이사이에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가느다란 길이 남아 있었다.

“보인다.”

풍이 가장 짙은 길목을 향해 양강의 장력을 내질렀다.

화르륵!

불꽃은 없었으나 뜨거운 경력이 독무를 집어삼켰다. 시커먼 안개가 타들어 가듯 비틀리더니 매캐한 냄새를 흩뿌리며 갈라졌고, 비좁게 열린 틈 너머로 출구까지 이어지는 길이 드러났다.

“아영아, 오른쪽 벽을 따라가! 세 걸음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야 해!”

“알았어!”

아영은 가장 가까운 우리의 자물쇠를 내리쳤다. 한 번에 끊어지지 않자 풍이 달려가 쇠창살을 양손으로 붙잡았고, 양강의 기가 남은 팔에 힘을 실어 비틀었다. 쇠가 끼익 울며 벌어지자 아영은 안으로 파고들어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이들부터 일으켰다.

현허도 지체하지 않았다. 숨을 멈춘 채 독무 속으로 뛰어든 그는 쓰러진 이들의 혈도를 짚고, 장력으로 몸속에 파고든 독기를 밀어내며 풍이 만든 길로 사람들을 옮겼다.

남은 사병 몇은 도망치려다가 독무에 발목을 잡혔고 방금 전까지 우리를 죽이려 칼을 휘두르던 자들이었으나, 풍은 그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날아든 칼을 발로 차 버린 뒤 정신을 잃은 무사 하나를 붙잡아 안전한 곳으로 던지자 현허가 낮게 물었다.

“저자들까지 구할 셈이냐?”

풍은 이를 악문 채 다음 우리의 쇠창살을 뜯었다.

“죽게 내버려 두면 저자들과 제가 뭐가 다릅니까!”

현허는 잠시 풍을 바라보다 더 묻지 않았고 굳어 있던 눈빛이 희미하게 누그러지더니, 쓰러진 사병 둘을 한꺼번에 들어 통로 쪽으로 옮겼다.

독무는 좀처럼 줄지 않았고 풍은 독기가 옅은 결을 좇아 우리 사이를 누볐고, 길이 끊길 때마다 양강의 장을 쏟아 냈다. 벌어진 틈이 다시 닫히기 전에 사람들을 빼내야 했기에 숨을 고를 겨를조차 없었고 폐부가 타는 듯 아프고 관자놀이에서는 망치질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풍은 두 눈을 감지 않았다.

노인 하나를 업고 돌아오던 때에는 발밑의 독기가 갑자기 짙어졌고 깨진 항아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가 바닥의 홈을 타고 앞을 가로막은 탓이었다.

당장 모든 힘을 터뜨리려는 기세가 손끝에 가득 차올랐으나, 풍은 이를 억눌러 바닥 한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폭발한 경력이 검은 액체를 태우며 돌바닥을 움푹 파냈고, 막혔던 길이 가까스로 열렸다.

노인의 가느다란 숨결이 풍의 목덜미에 닿았고 아직 살아 있다는 그 감촉이, 바닥나 가는 내공보다 더 큰 힘을 주었다.

아영도 비틀거리는 여인을 부축해 통로로 보낸 뒤 구석에서 기침하던 어린아이를 등에 업었고 아이의 팔이 힘없이 늘어지자 입술을 깨물며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풍아, 이 아이 숨이 너무 약해!”

풍은 아이의 기맥을 살폈고 가느다란 생기가 독기에 짓눌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떨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어. 먼저 밖으로 데려가!”

아영이 달려가자 풍은 그녀가 지나갈 길을 따라 양강의 기를 연달아 쏘았고 독무가 좌우로 갈라지는 동안 현허가 뒤를 받치며, 독에 취해 쓰러진 이들을 하나씩 어깨에 걸쳐 옮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고 독의 결을 읽고 길을 태우며 사람을 들쳐 업는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내공은 바닥을 드러냈고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지만, 풍은 남은 생명의 불빛을 하나씩 세었다.

다섯.

셋.

마지막 하나.

가장 깊은 우리에 쓰러져 있던 중년 사내를 끌어내자 더는 남은 생기가 보이지 않았고 풍은 혹시 놓친 사람이 있을까 공동을 두 번이나 훑은 뒤에야 비틀거리는 몸으로 출구를 향했다.

지상에 닿는 순간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었다. 풍은 중년 사내를 내려놓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으나, 마당 곳곳에 누운 이들의 숨소리가 들려오자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해냈다.

단 한 사람도 산 너머로 끌려가게 두지 않았다.

현허는 생존자들 사이를 오가며 남은 독기를 몰아냈고 모두 장기간 약물과 독기에 노출된 탓에 야위고 상해 있었으나, 당장 목숨이 끊어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붙잡힌 사병들도 한쪽에 몰아 혈도를 짚어 두었으니 깨어나더라도 달아나지는 못할 터였다.

아영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채 호흡을 살폈고 잠시 뒤 아이가 힘겹게 숨을 토하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작은 등을 연신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풍은 사라진 손주의 신발을 품에 안고 울던 노파를 떠올렸고 이 아이가 그 손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는 오늘 밤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게 될 것이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현허가 다가와 풍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했다, 단풍아. 네가 참으로 많은 목숨을 구했구나.”

풍은 고개를 저으며 지하 입구를 돌아보았고 안쪽에는 아직 검은 독기가 어른거렸고, 혈혼과 독고무흔이 사라진 통로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가 한 것만은 아닙니다. 혈혼이라는 그자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모두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독고무흔이 그리 불렀지.”

현허의 목소리가 낮아졌고 풍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혼은 분명 자신을 시험했고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자였지만, 가장 다급한 순간에 사람을 살릴 길을 일러 주고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떠났다.

아이를 안은 아영이 눈가를 훔쳤다.

“독고무흔을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었어요. 꼭 오래전부터 원수였던 것처럼…….”

“사람의 속은 한 겹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현허는 혈혼이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파의 옷을 입었다고 모두 바른 것은 아니며, 마기를 품었다고 전부 악한 것도 아니지. 저자에게도 저자만의 사연과 목적이 있을 게다.”

풍은 그 말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독고무흔은 정파의 이름을 내세우며 사람을 짐승처럼 가두었고, 혈혼은 마기를 품고도 그들을 살릴 방도를 알려 주었다. 정과 마라는 두 글자만으로 사람을 나누기에는 눈앞의 세상이 너무도 뒤엉켜 있었다.

마교의 칼이면서 마교와 결탁한 자를 베러 간 사내. 적이라기에는 사람 살릴 길을 일러 주었고, 아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차가운 자.

풍은 그가 사라진 어둠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깊은 통로 저편에서 검붉은 섬광과 함께 단 한 번의 칼 울음이 터져 나왔다.

회차 끝 16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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