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잇길을 돌아 나온 말은 거품 섞인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말 위의 사내는 해진 망토를 두른 채 고삐를 당겼으며, 일행과 수레를 확인하자 곧장 안장에서 내려왔다. 사슬갑옷 위에는 크기와 빛깔이 다른 철편이 덧대어져 있었고, 왼팔의 방패에는 무언가를 긁어 낸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강무진 앞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멈췄고 오른손은 허리의 검 가까이에 두었지만 뽑지는 않았다.
“광산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강무진은 대답하기 전에 사내의 장비부터 살폈고 갑옷은 낡았으나 녹이 없었고, 가죽끈에는 새로 기름을 먹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방패 가장자리는 여러 차례 쪼개졌다가 철못으로 보강되어 있었으며 주인이 매일 손질한 물건들이었다.
“그렇습니다.”
사내의 시선이 끊어진 쇠사슬을 실은 수레와 그 뒤에 선 해방자들을 훑었다. 목에 쇠고리 흉터가 남은 라칸을 보았을 때 그의 턱이 굳었으나, 그는 곧 검에서 손을 떼고 빈 손바닥을 보였다.
“로젠 카르디에입니다. 서부 변경의 기사였고, 지금은 남은 초소들을 돌며 피난민을 동쪽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였고.’
강무진은 그 말에 붙은 과거형을 들었고 성한 갑옷을 입고 검까지 찬 자가 자신을 기사라고 하지 않고 기사였다고 말했다.
실바나의 화살은 여전히 로젠의 가슴을 향해 있었다.
“우리를 뒤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산 쪽으로 정찰을 보냈다가 검은 연기를 확인했습니다. 뒤이어 마족 병사 하나가 남쪽 길로 달아나는 것도 보았지요. 놈은 우리보다 한 시진 남짓 앞섰습니다. 남쪽 초소의 기병에게 닿으면 내일 정오 전에 그리모어의 전진 지휘소로 보고가 들어가고, 빠르면 해 질 무렵 추격대가 이 길을 막습니다.”
로젠은 일행의 수를 헤아리듯 시선을 움직이다가 강무진에게 되돌렸다.
“누가 광산을 쳤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했습니까?”
“적이라면 막고, 피난민이라면 길을 안내할 생각이었습니다.”
라칸이 짧은 칼을 들었고 광산에서 급히 만들어 준 물건이었으나, 그의 손에 들어가자 날이 짧은 검처럼 보였다.
“우리가 적이면 혼자 막겠다고?”
“시간은 벌 수 있습니다.”
로젠의 대답은 차분했고 허세처럼 들리지는 않았지만, 강무진은 그의 검 안쪽에 숨은 균열을 느끼고 있었다. 날 가운데에는 머리카락보다 가는 금이 뻗어 있었고, 여러 번 갈아 폭이 줄어든 슴베에는 충격이 누적되어 있었다. 당장 부러질 정도는 아니어도 다음 격전까지 버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주인과 비슷한 검이었다.
강무진이 물었다.
“광산을 지키던 자들이 누구 소속인지 압니까?”
“마계 접경 침공군입니다. 정확히는 그리모어 바르가스 장군의 관할이지요.”
실바나가 활시위를 조금 당겼다.
“마족 장군이 인간의 땅에서 광산을 운영한다는 말입니까?”
“이제는 인간의 땅이라 부르기 어렵습니다.”
로젠의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방패 가장자리를 누른 손가락이 희게 질려 있었다.
“서쪽 변경의 영주들은 셋이 죽었고 둘은 달아났습니다. 남은 하나는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지요. 광산뿐만이 아닙니다. 농장과 벌목장도 있습니다. 사람까지 물건처럼 옮깁니다.”
“크흠.”
도리아가 수염 끝을 거칠게 쓸었다.
“그걸 알면서 인간 왕들은 뭘 하고 있나?”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답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경 사람들은 끌려가고?”
“그렇습니다.”
도리아는 침을 뱉으려다가 부상자들을 보고 고개를 돌렸고 망치 자루를 쥔 손에서는 우두둑 소리가 났다.
라칸이 수레 손잡이를 놓았다.
“그리모어.”
그 이름을 입에 담는 목소리가 낮았다. 강무진이 돌아보자 라칸의 목덜미 털이 곤두서 있었으며, 그는 오른손목의 낙인을 왼손바닥으로 가린 채 로젠을 노려보았다.
“그놈이 우리를 잡아 갔나?”
“직접 사냥에 나서지는 않았을 겁니다.”
로젠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획 허가와 할당량은 그가 정합니다. 어느 마을에서 몇 명을 데려갈지, 어느 광산에 몇 명을 배치할지까지 말입니다.”
라칸이 이를 드러냈다.
“사람 수를 장부에 적는단 말이지.”
“예.”
“죽은 놈도?”
로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손실로 기록합니다.”
라칸은 몸을 돌리자마자 길가의 나무를 주먹으로 내리쳤고 마른 껍질이 우수수 떨어졌고, 상처가 터졌는지 손목에 감긴 천도 다시 붉어졌다.
강무진은 그의 앞에 섰다.
“손을 펴십시오.”
“지금 그게 중요해?”
“검을 잡으려면 중요합니다.”
라칸의 귀가 뒤로 젖혀졌지만 주먹은 펴졌고 손바닥에는 오래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곡괭이 자루가 만든 것과 달리 엄지와 검지 사이, 새끼손가락 아래쪽에 단단한 살이 겹쳐 있었기에 검을 오래 쥔 손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강무진은 허리 주머니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라칸의 손을 감았다.
“검을 썼습니까?”
“잡히기 전에는.”
“어떤 검이었습니까?”
“길고 무거운 것. 우리 부족은 방패를 안 썼다.”
“그래서 잡힌 모양이군요.”
라칸의 눈이 가늘어지자 도리아가 수염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저 인간, 쇠 앞에서는 인정사정이 없네.”
“틀린 말은 아니군.”
라칸은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광산에서 받은 짧은 칼을 내밀었다.
“이건 가볍다.”
“급하게 만든 물건입니다.”
“그래도 막아 냈어.”
강무진은 칼을 받아 날과 슴베를 살폈다. 광산에서 쓰러뜨린 마족의 짧은 곡도를 급히 수리한 탓에 금속의 결이 고르지 않았고, 몇 차례 충격을 받아 낸 칼등도 조금 휘어 있었다. 그래도 슴베에 감은 철테는 풀리지 않았으며, 급조한 물건치고는 제 몫을 다했다.
당장 버티기 위한 쇠는 당장 버틸 만큼이면 됐고 그다음에는 다시 불에 넣어 더 나은 물건으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강무진은 칼을 돌려주었다.
“제대로 된 건 다음에 만들겠습니다.”
라칸이 칼을 내려다보았다.
“값은?”
“일할 수 있게 되면 갚으십시오.”
“은혜도 빚이고 칼도 빚인가.”
“은혜는 제가 매긴 적 없습니다.”
“내가 매겼지.”
라칸은 칼을 허리춤에 꽂았다.
“그러니 따라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요.”
“당신도 모르잖아.”
강무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는 길이 있으면 걸었고 마을에 부러진 농기구가 있으면 고쳤으며 쓸 만한 광석이 있으면 머물렀을 뿐, 좋은 화로와 쇠만 있다면 그만이라고 여겨 왔다.
그러나 수레 위의 쇠사슬이 내는 소리는 가볍지 않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리끼리 부딪치자 광산에 남은 곡괭이들이 그 뒤를 따라오는 듯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강무진이 말하자 라칸은 코웃음을 쳤다.
“허락받을 생각은 없었어.”
로젠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한쪽 무릎을 굽혀 길바닥을 살폈고 수레바퀴가 남긴 깊은 자국을 손으로 짚은 그는 곧 북동쪽 산길을 가리켰다.
“우선 제 야영지로 가시지요. 여기서 부상자를 데리고도 한 시진 남짓이면 닿습니다. 빈 초소지만 지붕과 우물이 있어서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실바나가 물었다.
“우리를 그곳에 모은 뒤 병력을 부르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의심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로젠은 허리에서 검을 풀어 땅에 놓은 뒤 방패까지 내려놓았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제 말도 부상자에게 내주지요. 그래도 믿을 수 없다면 제 손을 묶으셔도 됩니다.”
강무진은 땅에 놓인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로젠의 표정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검을 보겠습니다.”
“지금 말입니까?”
“곧 부러집니다.”
강무진이 검을 뽑자 어두운 날 위로 잔금이 희미하게 드러났고 육안으로 찾아내기 어려운 균열이었으나 엄지로 옆면을 누르자 금속의 결이 손끝에서 갈라졌다. 지나치게 자주 달군 흔적, 망치질 없이 억지로 편 흔적, 온도가 낮아진 뒤 급히 담금질한 흔적이 차례로 전해졌다.
“누가 고쳤습니까?”
“제가 했습니다.”
“대장장이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로젠의 시선이 검날에서 멀어졌다.
“마지막 피난 행렬을 보내고 남았습니다.”
짧은 대답이었고 강무진은 더 묻지 않고 검을 칼집에 넣어 돌려주었다.
“큰 충격은 받지 마십시오. 날 가운데가 갈라졌습니다.”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싸우지 않으면 오래갑니다.”
“싸워야 한다면요?”
“한 번일 수도 있고 열 번일 수도 있습니다. 쇠는 거짓말을 안 하지만 미래까지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로젠은 검을 받아 허리에 찼다.
“그렇다면 한 번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열 번을 버틸 방법부터 찾으십시오.”
강무진이 말의 고삐를 잡아 해방된 노인에게 건네자 로젠은 말없이 안장을 조절했다. 실바나는 먼저 숲길을 살피러 나섰고, 도리아가 수레의 뒤축을 두드려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라칸은 다시 가장 무거운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부상자입니다.”
강무진이 말하자 라칸은 코웃음을 쳤다.
“빚진 놈이기도 해.”
“다리가 풀리면 수레까지 넘어집니다.”
“그럼 옆에서 잡아.”
강무진은 라칸의 걸음을 살폈고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이 흔들렸으니 고집만으로 반나절을 버티기는 어려웠다.
그가 수레바퀴의 철테에 손을 얹자 차갑고 거친 금속의 감각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철테와 차축 고정쇠, 짐을 묶은 쇠사슬이 하나의 구조로 이어졌으며, 각 부위에 걸린 힘이 굵고 가는 선처럼 느껴졌다. 강무진은 철테의 장력을 고르게 펴면서 차축 고정쇠를 미세하게 기울였고, 쇠사슬 고리들이 서로 맞물려 짐의 흔들림을 잡도록 만들었다.
수레의 무게중심이 조금 앞으로 옮겨갔고 끄는 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바퀴가 돌 때마다 뒤로 잡아끄는 저항은 줄어들었다.
라칸의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가벼워졌군.”
“넘어뜨리지 마십시오.”
“말을 곱게 하면 죽나?”
“쇠가 말을 들으면 그때 해 보겠습니다.”
도리아가 대놓고 웃었다.
“쇠맛 좀 아는군!”
일행은 어둠이 내리기 전에 빈 초소에 도착했다. 달아난 병사의 보고가 전진 지휘소에 닿고 첫 추격대가 길을 막기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 남짓이었다. 로젠은 모래시계를 뒤집어 처마 아래 걸고, 마지막 모래가 떨어지기 전에 부상자를 옮기고 북동쪽 길을 비워야 한다고 못 박았다. 돌담은 허리 높이까지 무너져 있었고 목책은 절반이 썩어 있었으며, 경계용 종이 사라진 자리에는 굵은 밧줄만 매달려 있었다. 그래도 우물물은 맑았고 지붕이 남은 막사에는 마른 짚이 쌓여 있었다.
강무진은 부상자부터 안으로 들였다. 실바나가 숲에서 약초를 구해 와 상처를 씻는 동안 도리아는 부서진 문짝을 떼어 장작으로 쪼갰고, 라칸은 앉으라는 말을 세 번 무시한 채 물통을 나르다가 끝내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멀쩡하다.”
라칸이 먼저 말했다.
강무진은 대꾸하지 않고 그의 다리를 보았고 허벅지는 가만히 있어도 떨리고 있었다.
“보지 마.”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검을 만들어야 할지 보는 겁니다.”
라칸은 제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무거운 걸로 해. 다리 핑계로 가벼운 거 주지 말고.”
“걷게 된 뒤에 정합니다.”
강무진은 화덕으로 향했고 돌 사이에 박힌 녹슨 철판을 뽑아 재를 털고, 균열 난 부분에는 쇠사슬 조각을 펴서 덧댔다. 바람구멍이 좁아 불길이 한쪽으로 쏠렸으므로 송풍로까지 넓히자 불이 한결 안정되었다.
그는 광산에서 거둔 마족의 검 두 자루를 화덕에 넣었고 좋은 쇠는 아니었다. 광석을 충분히 정련하지 않아 황과 인이 남아 있었고 탄소 분포도 고르지 않았으나, 불순물이 몰린 부분을 잘라 내고 여러 차례 접으면 쓸 곳은 있었다.
도리아가 화덕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망치는?”
“광산에서 가져온 게 있습니다.”
“집게는?”
“쇠고랑을 펴면 됩니다.”
“모루는?”
강무진은 초소 입구에 쓰러진 경계석을 가리켰다.
도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돌 위에서 칼을 만들겠다고?”
“칼은 아닙니다.”
“그럼?”
강무진은 달아오른 검을 꺼냈다.
“괭이와 낫입니다. 길을 트고 목책을 세우는 데도 쓰며, 놈들이 먼저 닿으면 자루를 짧게 잡고 막을 수 있습니다.”
도리아는 잠시 강무진을 보다가 콧김을 뿜었다.
“좋아. 하지만 불 조절은 내가 하겠네.”
“화로 앞에서는 간섭을 안 받으신다면서요.”
“자네가 내 화로에 들어온 걸세.”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쇠를 두드렸다. 강무진이 불순물이 몰린 부분을 골라 잘라 내면 도리아가 남은 쇠를 접었으며, 드워프의 짧고 무거운 망치는 같은 자리를 세 번 치지 않았다. 강무진은 금속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열과 결의 방향을 느끼면서 망치가 닿아야 할 곳을 짚었다.
“조금 왼쪽입니다.”
“알고 있네.”
“그러면 치십시오.”
“호흡이란 게 있잖나!”
말은 거칠었으나 망치는 정확했고 쇠사슬은 낫의 몸이 되었고, 마족의 검은 괭이날과 작은 손도끼로 바뀌었다. 손잡이는 무너진 목책에서 성한 나무를 골라 깎았으며, 강무진은 완성된 물건마다 슴베 가까이에 작은 각인을 남겼다.
해방된 이들은 불가에 둘러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누구 하나 크게 말하지 않았고 다만 처음 완성된 낫을 받아 든 노인이 날을 손톱으로 튕기자 맑은 소리가 났다.
“이걸로 뭘 해야 합니까?”
“원하는 걸 하십시오.”
강무진은 다음 괭이날을 불에 넣었다.
“밭을 갈아도 되고, 집을 지어도 됩니다.”
“마족이 다시 오면요?”
망치가 멈췄다.
강무진은 화덕 속 쇠의 색을 보았고 아직 어두운 주황빛이어서 두드릴 때가 아니었다. 불을 더 먹이면 금속의 결이 느슨해질 테고, 그때 망치를 대야 쪼개지지 않았다.
“그때는 막아야 합니다.”
노인은 낫을 두 손으로 감쌌다.
“우리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강무진은 대답 대신 불무지를 밀어 넣었고 화덕의 온도가 오르자 쇠의 결이 부드러워지며 망치를 받을 준비를 했다.
“막을 수 있게 만들어야지요.”
초소 밖에서 지켜보던 로젠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고 그는 탁자 위의 먼지를 소매로 닦은 뒤 낡은 지도를 펼쳤다. 비와 피에 젖었던 흔적이 남은 지도였으며, 서쪽 귀퉁이는 불에 타 없어졌고 지명 몇 개에는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제 고향은 이곳이었습니다.”
로젠은 지도 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작은 성채를 짚었다.
카르디에 변경령.
그 이름 위에도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마계 균열에서 사흘 거리였습니다. 비옥한 땅은 아니었지만 철광맥이 있었고, 북쪽 길목을 지키는 성벽도 있었지요. 제 가문은 여섯 대 동안 그곳을 지켰습니다.”
로젠의 손가락이 성채에서 남쪽 길로 이동했다.
“첫해에는 마수 떼가 내려왔습니다. 이듬해에는 무장한 마족이 나타났고, 그다음에는 사절이 왔습니다.”
“사절?”
라칸이 벽에 기대앉은 채 물었다.
“항복을 권했습니다. 광산의 생산량 절반과 해마다 주민 이백 명을 넘기면 영주의 지위를 보장하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사절의 문서를 태웠습니다.”
로젠은 담담하게 말했다.
“석 달 뒤 성이 함락됐습니다.”
불꽃이 튀었으나 로젠은 눈을 감지 않았다.
강무진은 지도 위 성채의 위치를 보았다.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곳으로 북쪽 산맥의 광산과 동쪽 평야, 남쪽 강을 잇는 요충지였으니, 단순히 문서를 태운 데 대한 보복으로 공격받은 것은 아니었다. 마족은 길과 쇠를 원했고, 사람까지 생산 수단으로 계산에 넣었다.
“주민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실바나가 물었다.
“일부는 동쪽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성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붙잡혔고요. 저는 마지막 피난대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을 지켰군.”
라칸이 말했다.
“고향은 못 지켰습니다.”
“살아 나온 놈들은 당신이 지킨 거잖아.”
로젠의 시선이 라칸에게 향했고 라칸이 손목에 감은 천을 고쳐 쥐자 오른손목의 낙인이 드러났다.
“난 못 도망쳤어. 그래서 이렇게 됐고.”
그가 검게 일그러진 흉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살려서 내보낸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죽은 놈 흉내는 그만 내.”
로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거친 충고군요.”
“공짜다.”
강무진은 화덕에서 쇠를 꺼냈다.
망치가 내려갔다.
한 번.
붉은 쇠가 넓어졌다.
두 번.
거친 모서리가 접혔다.
세 번째 망치가 닿자 뒤엉킨 금속의 결이 한 방향으로 모였고 강무진은 더 치지 않고 쇠를 돌려 열이 덜 오른 부분을 불 가까이 댔다. 필요한 만큼 두드렸으면 다시 달궈야 했고 조급한 망치질은 쇠를 망가뜨렸다.
그는 집게를 내려놓고 로젠을 보았다.
“광산 하나를 쳤다고 직접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로젠은 지도의 동쪽 길을 짚었다.
“남쪽 초소의 봉화가 방금 한 번 올랐습니다. 달아난 병사가 기병에게 닿았다는 뜻입니다. 전진 지휘소까지 여섯 시진, 그곳에서 추격 기병이 여기까지 오는 데 다시 세 시진은 걸립니다. 늦어도 내일 해가 기울기 전에는 이곳을 비워야 합니다.”
실바나가 물었다.
“추격대가 얼마나 빨리 오겠습니까?”
“빠르면 내일 해 질 무렵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로젠은 지도에 점으로 표시된 길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고 북쪽 광산에서 시작한 선과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이어진 선이 서쪽 길목에서 합쳐졌다.
“노예 상단입니다. 광산의 쇠와 새로 잡은 포로들을 싣고 사흘마다 국경을 넘습니다. 모레 새벽, 검은개울 협곡을 통과할 예정이지요.”
라칸이 벽에서 몸을 일으켰고 무릎이 흔들렸지만 그는 벽을 짚고 버텼다.
“몇 명이나 끌려가지?”
“확인된 수레만 여덟 대입니다.”
“호위는?”
“평소라면 스무 명 안팎입니다. 하지만 광산이 습격당했으니 증원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젠은 강무진을 바라보았다.
“그리모어 바르가스의 표식을 단 정예병이 합류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실바나의 활 쥔 손이 굳었고, 도리아는 말없이 화덕의 바람구멍을 좁혔다.
강무진은 지도에서 협곡의 폭과 경사를 살폈고 길 왼쪽으로는 검은개울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솟아 있었다. 수레가 여덟 대라면 행렬은 길게 늘어질 수밖에 없으니, 앞뒤를 끊으면 호위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어려울 터였다.
“접근로는 몇 개입니까?”
로젠은 기다렸다는 듯 지도 가장자리에 선 두 개를 더 그었다.
“정면의 수레길 외에 절벽 위로 오르는 사냥꾼 길이 있습니다. 빠르지만 말은 지나갈 수 없지요. 다른 하나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입니다. 들키지 않겠지만 비가 오면 물이 불어납니다.”
“철제 다리가 있습니까?”
“협곡 입구에 낡은 광차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상단은 건너지 않고 그 아래를 지나갑니다.”
강무진은 다리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철제 구조물이라면 고정 못과 하중을 느껴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겠지만, 직접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채 계획에 넣을 수는 없었다.
그의 시선이 막사 안을 훑었고 부상자가 많았고, 해방한 이들을 다시 위험에 놓을 수도 없었다. 라칸은 제대로 걷는 것조차 버거웠으며 로젠의 검은 금이 가 있었으며 실바나의 화살도 넉넉하지 않았고 도리아와 자신에게는 제대로 된 모루조차 없었다.
도리아가 강무진의 얼굴을 살폈다.
“갈 생각인가?”
“아직 아닙니다.”
강무진은 지도에서 손을 떼었다.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는 로젠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주십시오.”
로젠이 허리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싸우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검으로는 그렇습니다.”
로젠은 천천히 검을 풀어 건넸다.
강무진은 날을 뽑아 다시 균열을 확인한 뒤, 금이 간 부분을 화덕 속에 밀어 넣었고 새 검을 만들 시간은 없었다. 균열 주변을 잘라 내면 날이 지나치게 짧아졌으므로 광산에서 가져온 쇠 가운데 탄소가 고르게 밴 부분을 골라 덧대야 했다. 완벽한 검은 만들 수 없더라도 살아 돌아올 검은 만들 수 있었다.
라칸이 비틀거리며 다가왔고 그의 손에는 광산에서 받은 짧은 칼이 들려 있었다.
“내 것도 해 줘.”
“쉬십시오.”
“싫다.”
“다리가 아직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다리 대신 검으로 버티게 해.”
강무진은 라칸의 눈을 보았고 그 안에 남은 것은 분노만이 아니었다. 아직 만나지도 못한 수레 여덟 대의 사람들이 벌써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따라오겠다는 이유가 빚 때문입니까?”
“그래.”
라칸은 망설이지 않았다.
“광산에서 내 목숨을 건졌고, 아직 내 손에 검까지 쥐여 줬지. 그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안 떠난다.”
“언제 다 갚았는지는 누가 정합니까?”
“나.”
“평생이라고 해도?”
라칸은 짧은 칼을 강무진 쪽으로 내밀었다.
“그럼 평생 따라가면 되지.”
강무진은 더 묻지 않았고 말로 꺾을 고집이 아니었고, 꺾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라칸이 짧은 칼을 맡겼다.
“이걸 고치면 빚이 하나 더 느는 거다.”
“이번에는 선금으로 받겠습니다.”
“뭘?”
“살아서 돌아오는 것.”
라칸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이번에는 분명 웃음이었다.
강무진은 두 자루의 검을 화덕에 나란히 넣었고 로젠의 검은 오래 버틴 탓에 결이 지쳐 있었고, 라칸의 칼은 너무 급히 펴서 내부 응력이 남아 있었다. 서로 다른 문제를 같은 불로 고칠 수는 없었기에 위치와 시간을 달리해야 했다.
그는 로젠의 검을 불길 깊숙이 넣되 균열 부분만 붉게 달아오르게 했고, 라칸의 칼은 숯 가장자리에 두어 천천히 열을 먹였다. 온도가 오르면서 서로 다른 금속의 결이 붉은빛 속에서 선명해졌다.
초소 밖으로 밤바람이 불어오고, 멀리 서쪽 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한 줄기 솟아올랐다.
로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신호 봉화입니다.”
첫 번째 불빛 뒤로 두 번째와 세 번째 불빛이 차례로 산등성이를 넘었고 광산에서 놓친 병사가 보고를 마친 것이었다.
강무진은 집게로 달아오른 검을 꺼냈다.
“도리아.”
“알고 있네.”
드워프가 망치를 들었다.
“실바나.”
“새벽까지 길을 살피겠습니다.”
엘프가 활을 챙겼다.
“로젠.”
그가 지도를 접으며 대답했다.
“피난민을 동쪽 폐촌으로 옮길 길과 협곡을 칠 방안, 두 가지 모두 준비하겠습니다.”
라칸은 문가에 기대어 칼이 다시 태어나는 광경을 지켜보았고 다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눈길만은 불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강무진이 망치를 내리치자 불티가 어둠을 갈랐고 갈라진 날이 짧아지는 대신 두꺼워졌고, 덧댄 쇠가 충격을 받을 자리를 메웠다.
검은개울 협곡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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