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주춧돌을 놓은 다음 날, 밤새 밟아 둔 화로 터 한쪽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내려앉았다.
강무진은 해가 뜨기 전에 꺼진 모닥불의 재를 들고 그 자리에 뿌렸다. 잿가루가 남쪽 틈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어제 확인한 습윤층에서 샌 물이 새 기초 아래로 길을 낸 것이었다.
도리아가 흙을 한 줌 비벼 보고는 말했다.
“터를 버리면 반나절, 물길을 잡으면 두 시각이다.”
“물길을 잡습니다.”
둘은 화로를 다시 고르는 대신 북동쪽 얕은 암반까지 배수 홈을 팠다. 강무진이 틈의 방향을 짚으면 도리아가 큰 돌을 결대로 떼어냈고, 버려지는 열을 끌어올 송풍로도 그 홈 위로 함께 놓았다. 전날 세운 계획이 오늘 처음 땅의 저항을 만난 셈이었다.
로젠은 그사이 창고와 거처, 방벽선을 말뚝으로 옮겼다. 주춧돌과 화로 사이에는 빈 작업로를 남기고, 남쪽의 무른 구간은 열 걸음 안으로 당겼다.
“장부 첫머리에 계속 ‘검은등 거점’이라 적을 수는 없습니다.”
도리아가 아직 벽도 없다고 투덜거렸지만 강무진은 주춧돌을 보았다.
“강철보루.”
“너무 곧군.”
“이름이 굽을 필요는 없습니다.”
로젠이 장부 위에 네 글자를 적었다. 이름이 정해지자 각자가 맡을 일도 더는 설명할 필요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젠이 배치도와 필요한 자재의 목록을 작성하는 동안 도리아는 화로 기초와 훗날 세울 방벽의 하중을 계산했다. 실바나는 동쪽 개울에서 내화 점토를 찾으며 주변 나무에 정령술로 경계 매듭을 걸었다.
라칸은 해가 떠오를 무렵에야 남쪽 정찰에서 돌아왔다. 늑대 귀 끝에 이슬이 맺혀 있었고 장화에는 검은 진흙이 묻어 있었다. 그는 야영지로 곧장 들어오지 않고 외곽부터 한 바퀴 돈 뒤에야 일행에게 다가왔다.
“남쪽 두 구릉 너머에 말발굽 자국이 있어. 네 마리. 사흘은 됐고, 서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빠졌어.”
그가 흙 위에 지형을 그리자 강무진은 라칸의 장화에 붙은 쇳가루를 집어 들었다. 검붉고 거친 가루는 마족 군마의 편자에서 떨어진 조각이었다. 탄소가 고르게 스미지 않은 철이었으며, 여러 개를 급히 찍어 낸 흔적이 결 속에 남아 있었다.
“우리를 살피러 온 정찰대는 아닙니다.”
“어떻게 알지?”
“편자가 오래 닳았습니다. 먼 길을 달린 군마입니다. 이곳을 지나갔을 뿐입니다.”
라칸이 남쪽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돌아올 수 있어.”
“돌아옵니다.”
강무진은 담담히 말했다.
“그 전에 맞을 자리를 정해야 합니다.”
라칸은 끝이 부러진 검을 뽑아 남쪽 비탈에 둘, 무너진 봉화대에 하나씩 경계 지점을 표시했다.
“사람이 늘면 경계도 나누지. 지금은 서로 보이는 거리를 벗어나면 안 돼.”
로젠은 봉화대 잔해를 활용하는 방안과 남쪽 경계를 강화하는 방안을 차례로 내놓았다. 그사이 실바나는 서쪽 구릉을 바라보며 활을 들었다.
“서쪽은 제가 살피겠습니다. 정령에게 낯선 발걸음을 구분하도록 부탁하지요.”
“정령이 마족 냄새도 맡나?”
라칸이 물었다.
“정령은 냄새를 맡지 않습니다.”
“그럼 뭘 보는데?”
“숲이 불편해하는 것을 압니다.”
라칸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으나 더 묻지 않았다.
정오 무렵 북쪽 길에 수레가 나타났다. 임시 야영지를 정리한 어른 열셋과 아이 넷이 약속대로 도착하자 로젠은 거처와 식량을 나눴다. 아침까지 먼저 터를 잡던 여섯 사람의 일손이 그제야 정착민 전체의 공사로 넓어졌다.
강무진은 그들을 지켜보았다. 도리아는 돌이 받는 무게를 먼저 보았고, 로젠은 사람이 움직일 길을 살폈으며, 라칸은 적이 파고들 틈을 찾았다. 실바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좋은 칼도 한 종류의 쇠로만 만들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성질을 맞물리되 어느 하나도 억지로 꺾지 않아야 했다.
강무진은 화로 터를 파기 시작했다.
두 자 아래에서 암반이 드러나자 그는 철제 끌을 박고 망치를 내리쳤다.
쨍.
울림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암반 왼쪽은 단단했으나 오른쪽에는 가느다란 균열이 있어 힘으로 내려치면 금이 길게 퍼질 터였다.
강무진은 망치의 각도를 비스듬히 바꾸었다.
강하게가 아니라 짧게.
쨍. 쨍. 쨍.
돌가루가 얇게 벗겨졌다.
도리아가 더 큰 망치를 들고 다가왔다.
“그렇게 긁어서 어느 세월에 끝내나.”
“깨뜨리면 다시 다져야 합니다.”
“깨지지 않을 만큼만 치면 되지.”
도리아의 망치가 떨어졌다.
쿵.
균열 옆의 돌이 주먹만큼 정확하게 떨어졌으나 아래 결은 상하지 않았다. 닿는 순간 손목을 틀어 충격을 옆으로 흘린 것이었다.
“다시 해보시오.”
“가르쳐 달라고?”
“봐야 압니다.”
도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크흠. 잘 봐라. 두 번은 안 보여 준다.”
두 번은 안 보여 준다던 그는 같은 동작을 다섯 번 했다. 강무진이 여섯 번째에 그대로 따라 하자 도리아는 더는 웃지 않고, 대신 더 큰 돌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건 네가 해.”
점심 무렵이 되자 화로 바닥의 윤곽이 잡혔다.
아이샤는 점토에서 자갈을 골라내며 숯 조각을 모았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으나 아이의 시선은 줄곧 강무진의 망치를 따라다녔다.
강무진은 노예 상단의 수레에서 떼어 둔 차축 고정쇠를 꺼냈다. 탄소가 거의 없는 무른 철이라 칼에는 부족했지만 못으로는 쓸 만했다.
그는 고정쇠 끝을 임시 화덕에 넣었다. 겉은 먼저 주황색으로 달아올랐으나 중심은 아직 검붉었다. 강무진은 쇠 안쪽으로 온기가 고르게 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이 느슨해진 뒤에야 꺼냈다. 두 번 두드려 늘이고 한 번 돌려 네모를 잡자 작은 못 하나가 만들어졌다.
아이샤가 가까이 왔다.
“이건 안 녹슬어요?”
“녹습니다.”
“그럼 왜 만들어요?”
“녹슬기 전에 할 일이 있으니까.”
강무진은 못을 다시 불에 넣었다. 아이가 다룰 수 있을 정도로만 붉게 달군 뒤 작은 망치를 내밀었다.
“내가 해요?”
“네.”
“무거운데.”
“두 손으로 잡으면 됩니다.”
그는 자루 끝을 손가락 두 마디만큼 잘라 냈다.
아이샤의 첫 타격은 빗나갔다.
땅.
망치가 모루 가장자리를 때리자 아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 번 더.”
두 번째는 못 옆을 스쳤고, 그 충격으로 못이 비뚤어졌다.
“망가졌어요.”
“아직 뜨겁습니다.”
강무진은 못을 돌려놓았다.
“뜨거울 때는 고칠 수 있습니다.”
아이샤가 다시 망치를 들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작은 손으로 자루를 감싸며 손목을 세웠다.
땅.
못의 머리가 조금 납작해졌다.
“쇠한테 겁먹지 마라!”
도리아가 외쳤다.
“망치 든 쪽이 주인이야!”
강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겁먹지 않는 것과 함부로 치는 것은 다릅니다.”
“애한테 벌써 잔소리냐?”
“간섭하지 마시오.”
“화로도 없잖나!”
아이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세 번째 타격이 중심을 맞혔다. 못의 머리는 한쪽이 두꺼웠고 끝도 살짝 휘었지만, 그래도 나무 두 장을 붙들기에는 충분했다.
강무진은 못을 물에 식혔다. 작은 김이 피어올랐다.
“내 거예요?”
“강철보루 것입니다.”
아이샤는 못을 들고 주춧돌로 달려가 로젠이 세운 이름판에 못을 댔다. 강무진은 아이에게 망치를 건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못은 비스듬히 박혔지만 빠지지 않았다.
해가 기울 무렵, ‘강철보루’라 적힌 이름판이 주춧돌 옆에 걸렸다. 방벽은 장부 위의 선뿐이었고 화로는 바닥밖에 없었으며, 거처라고 해 봐야 천막 몇 채가 전부였다.
로젠이 장부 맨 위에 날짜를 적는 동안 라칸은 정찰을 나가기 전 말뚝을 흔들어 보았고, 실바나는 이름판 끝에 경고 매듭 하나를 묶었다.
도리아는 화로 터 한가운데 서서 말했다.
“내일부터 벽을 올린다.”
“오늘도 할 수 있습니다.”
“점토가 덜 말랐어. 급하게 쌓으면 속부터 갈라진다.”
“맞습니다.”
도리아가 강무진을 흘겨보았다.
“순순히 인정하니 더 기분 나쁘군.”
그때 남쪽 비탈에 올랐던 라칸이 손을 들었다. 그가 돌아와 검은 쇳조각을 내밀었는데,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편자 파편이었다.
“아침에는 없던 거다.”
강무진은 조각을 받아 들었다.
미지근했다.
햇볕에 데워진 온기가 아니었다. 금속의 결 안쪽에 남은 마찰열과, 갓 비틀려 떨어져 나간 절단면의 미세한 긴장이 손끝에 걸렸다. 깨진 지 오래되지 않은 조각이었다.
그는 남쪽 구릉을 바라보았다. 감각을 뻗어 보았으나 비탈 아래에 묻힌 낡은 화살촉 몇 개와 녹슨 칼날 하나가 닿는 끝이었다. 그것을 넘은 곳은 텅 빈 어둠처럼 막혀 있었고, 조금 전까지 이곳을 지나간 자들이 어느 길로 사라졌는지는 느낄 수 없었다.
라칸이 편자 조각을 가리켰다.
“발자국이 남쪽으로 이어져. 비탈 아래부터는 바위가 많아서 끊겼지만.”
도리아가 망치를 들었다.
“따라갈까?”
“아닙니다.”
강무진은 편자 안쪽의 이중 못 자국을 살폈다. 아침에 확인한 낡은 편자와 달리, 이 조각에는 최근 박아 넣은 못의 압흔이 선명했다. 군마가 우연히 스쳐 간 흔적이라기에는 지나간 시각도, 야영지와의 거리도 지나치게 가까웠다.
“보게 둡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뭘 본다고?”
강무진은 바닥만 놓인 화로와 주춧돌, 아이샤가 박은 비뚤어진 못을 차례로 보았다.
“시작한 것을 보았겠지요.”
그는 편자 조각을 화로 터 옆에 내려놓았다. 내일이면 저 쇳조각도 불 속에 들어갈 것이었다.
강무진은 아직 불도 없는 화로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 피울 첫 불은 쇠만 녹이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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