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강무진은 망치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고 화로 안에서는 전날 캐낸 철괴가 붉게 익고 있었다. 표면은 밝았으나 속까지 열이 차지 않았기에 지금 두드리면 겉껍질만 얇게 늘어나고 중심에는 금이 갈 터였다.
그러나 그가 느낀 것은 모루 위의 쇠가 아니었다.
방벽 북쪽, 숲과 바위 지대가 맞물린 비탈 아래에서 작은 금속 세 점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하나는 길고 가느다란 단검이었으며, 나머지 둘은 짧고 둥근 허리띠 죔쇠와 화살촉으로 보였다.
강철보루 사람들의 쇠가 아니었다.
강무진은 집게로 철괴를 들어 화로 가장자리로 옮긴 뒤, 타오르던 숯을 갈퀴로 덮어 열을 죽였다.
도리아가 송풍기 옆에서 눈을 부릅떴다.
“쇠를 넣어놓고 어딜 가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초대하지 않은 쪽입니다.”
도리아는 더 묻지 않았고 화로 앞에서는 누구의 간섭도 허락하지 않는 드워프였지만, 강무진이 맡긴 쇠를 망치는 장인은 아니었다. 그가 집게를 받아 들며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다녀오게. 이놈은 내가 속까지 달래놓지.”
강무진은 벽에 걸어둔 검을 들었다.
대장간 밖에서는 라칸이 자경대원들에게 방패를 맞대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무판을 여러 겹 붙이고 가장자리에 얇은 철띠를 두른 방패는 무겁지 않았지만, 발을 잘못 디디면 옆 사람까지 틈을 보였다.
노예 상단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퍼진 뒤 며칠 동안 인근 촌락과 샛길에서는 피난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한 번에 열댓 명, 때로는 수레 하나에 세 가족이 매달려 들어왔고, 로젠의 명부에 오른 강철보루 주민은 어느새 백일흔여섯 명이 되었다. 늘어난 것은 숫자만이 아니었다. 방벽 안쪽의 천막과 취사 연기, 훈련 대열이 함께 길어졌으며 마족의 정찰병이 멀리서 세기에도 충분한 규모가 되었다.
“어깨부터 붙여! 방패만 내밀면 팔이 잘려!”
라칸의 귀가 강무진 쪽으로 돌아갔다.
“왔습니까?”
“북쪽 비탈. 셋입니다.”
라칸이 이를 드러냈다.
“또 정찰대?”
“이번에는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정찰대가 전멸한 자리에는 아직 뒤집힌 흙이 남아 있었으며 같은 길로 다시 들어왔다면 어리석은 자들이었겠지만, 세 금속은 방벽을 향해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좌우로 벌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이 길과 경계 교대, 방벽의 높이를 재는 움직임이었다.
“살려 잡아야겠군.”
라칸이 허리의 검을 뽑으려 하자 강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검은 두고 가십시오.”
“맨손으로 잡으라고?”
“방패를 드십시오.”
라칸은 강무진을 잠시 보더니 연습용 방패 하나를 집어 들고 나무 곤봉도 허리춤에 끼웠다.
강무진은 자경대원 네 명을 골랐고 오래 사냥꾼으로 살았던 인간 둘과 돌길에 익숙한 염소수인 하나, 짐마차 호위를 했다는 중년 여자였다. 아직 전사라 부르기에는 움직임이 굳어 있었으나 지시를 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죽이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도망치면요?”
사냥꾼 하나가 물었다.
“다리를 노리십시오.”
“저쪽이 먼저 죽이려 들면?”
“그때는 사십시오.”
짧은 대답에 네 사람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강무진은 방벽 북문을 열지 않고, 공사 자재를 들이기 위해 서쪽에 만들어둔 좁은 틈으로 빠져나갔고 문이 움직이면 경첩과 빗장의 쇠가 울렸기에 멀리서 살피는 자에게 출동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비탈 아래로 내려가자 강철보루의 망치 소리가 멀어졌다.
강무진은 눈보다 금속을 따라갔다.
단검은 바위 뒤에 멈춰 있었고, 화살촉 하나는 왼쪽 사면을 오르는 동안 허리띠 죔쇠가 낮은 관목 사이로 우회했다.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이는 훈련된 자들이었다.
강무진은 손가락을 접어 방향을 나눴고 라칸이 염소수인과 함께 오른쪽으로 빠지자 나머지 셋은 아래쪽 퇴로를 막았다.
그는 혼자 바위 쪽으로 걸어가며 일부러 마른 가지를 밟았다.
딱.
바위 뒤의 단검이 움직였고,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차갑게 굳어 있던 쇠가 손의 체온을 받았다.
강무진은 검을 뽑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바위 옆으로 튀어나오면서 잿빛 피부와 뒤로 꺾인 뿔, 몸에 밀착된 가죽 갑옷이 드러났고 마족은 단검을 거꾸로 쥔 채 강무진의 목을 노렸다.
두 걸음.
한 걸음.
강무진이 왼손을 펴자 단검의 결이 뒤틀렸다.
날을 통째로 구부리는 대신 자루 안에 박힌 슴베만 비틀었다. 지나치게 힘을 주면 칼이 부러져 파편이 튀었으므로, 쇠의 탄성과 열처리된 범위를 가늠해 손잡이 안쪽에서 방향만 틀었다.
마족의 손목이 칼에 끌려 돌아가며 몸이 열리자 강무진의 주먹이 명치를 쳤고 마족이 숨을 토하며 무릎을 꿇자 그는 그 팔을 꺾어 등 뒤로 눌렀다.
왼쪽 사면에서 시위가 울렸다.
화살이 바위를 스치고 날아오자 강무진이 손을 당겼고 화살촉은 아래로 꺾이며 그의 발 앞 흙에 박혔고, 곧이어 덤불이 크게 흔들리면서 라칸의 고함이 터졌다.
“엎드려!”
방패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세 번째 마족이 아래쪽으로 달아나자 기다리던 사냥꾼이 돌을 던졌고, 중년 여자가 긴 막대로 발목을 걸었다. 넘어진 마족은 허리에서 작은 쇳조각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강무진은 그 금속의 성질을 느꼈다.
얇은 철갑 안쪽에는 유리관이 들어 있었으며 유리 속 물질은 알 수 없었으나 숨기듯 만든 물건이 멀쩡한 약일 리 없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철갑이 마족의 손에서 빠져나와 땅을 굴렀다.
라칸이 달려와 마족의 턱을 방패 모서리로 찍었고 이빨을 깨뜨릴 만큼 세게 치지는 않고 정신만 끊었다.
“셋, 맞지?”
“맞습니다.”
강무진은 주변의 쇠를 다시 훑었고 흙 속에 오래 묻힌 녹슨 화살촉 하나와 바위틈의 철광 알갱이, 붙잡힌 자들의 장비뿐이었다.
세 명 모두 살아 있었다.
그는 첫 번째 마족의 허리띠에서 검은 철판 하나를 찾아냈고 손바닥보다 조금 작고 얇은 철판의 표면에는 가는 선과 마계 문자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장식은 없었으며 모서리에는 일련번호처럼 보이는 숫자만 정갈하게 찍혀 있었다.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라기보다 물품에 붙이는 꼬리표와 닮았다.
라칸이 철판을 보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거 압니다.”
“읽을 수 있습니까?”
“전부는 못 읽어. 광산에서 감독관들이 들고 다니던 것과 비슷합니다.”
라칸은 철판을 받아들지 않았고 목덜미의 털이 일어서고 손등의 힘줄이 굵어지면서, 손목 보호대 아래로 오래된 낙인의 가장자리가 드러났다.
“맨 위에 찍힌 건 명령 등급입니다. 그 아래는…… 회수 목록.”
강무진은 철판을 천으로 감쌌다.
“보루로 돌아갑니다.”
붙잡힌 셋은 손을 뒤로 묶였고 강무진은 쇠사슬을 쓰지 않았다. 포로로 잡은 자에게 굳이 노예의 모양을 씌울 필요는 없었다.
대신 밧줄의 매듭을 두 번 확인했다.
정오가 되기 전, 로젠은 대장간 옆 창고를 비워 심문 자리를 마련했다.
창문은 하나뿐이었으며 문 앞에는 라칸이 섰고 자경대원들은 밖으로 물렸고 아이샤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포로 셋은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도록 각기 다른 곳에 두었으며, 먼저 한 명씩 불러 진술을 맞춰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마족은 검은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였고 계급장은 없었으나 다른 둘보다 장비가 좋았고, 가죽 갑옷 안쪽에는 가느다란 은실이 덧대어져 있었다. 칼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력을 흘리는 구조로 보였다.
로젠이 검은 철판을 탁자 위에 놓았다.
“읽어라.”
마족은 입가의 피를 혀로 훑었다.
“읽을 수 없는 자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다.”
로젠은 철판 옆에 종이를 펼쳤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부분만 확인하지. 발신자는 접경 침공군 지휘부. 수신자는 제십칠 관측조. 목적은 강철보루의 방어 능력과…… 보유 자원의 산정.”
마족의 눈이 아주 조금 가늘어졌고 로젠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은 듯 다음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자원은 광물이나 식량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 성인 백십에서 백사십. 수인 사십 이상. 드워프 기술 인력 하나. 불명 계통의 금속 기술자 하나.”
도리아가 없었기에 창고는 조용했고 그가 이 말을 들었다면 탁자부터 부쉈을지도 몰랐다.
강무진은 철판을 내려다보았다.
불명 계통의 금속 기술자.
그것이 자신이었다.
이름은 없었다.
아이샤의 이름도, 라칸의 이름도, 방벽을 쌓는 사람들의 이름도 없었고 사람은 종족과 숫자로 갈렸으며 쓸모에 따라 줄이 나뉘었다.
로젠이 물었다.
“이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지?”
마족은 한동안 침묵했다.
강무진은 그의 허리에서 떼어낸 쇠단추를 탁자 위에 올렸고 얇은 금속 뒷면에는 세 갈래 창을 닮은 각인이 있었다.
라칸이 말했다.
“바르가스.”
포로의 시선이 라칸에게 움직였다.
“그리모어 바르가스 장군의 표식이야. 광산으로 새 포로가 들어올 때마다 문서에 찍혀 있었어.”
로젠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장군이 직접 이런 소규모 정찰까지 지시하나?”
마족이 입꼬리를 당겼다.
“너희는 정찰 대상이 아니다.”
“그러면?”
“손실의 원인을 분류하는 절차다.”
목소리는 담담했고 경멸조차 없었고 마치 창고의 수량이 맞지 않아 장부를 다시 세는 것처럼 말했다.
“노예 상단 셋이 돌아오지 않았고, 하급 수색대 하나가 소실됐다. 회수 예정 물량이 기준치 아래로 내려갔다. 장군께서는 낭비를 싫어하신다.”
라칸의 손이 문틀을 움켜쥐자 나무가 낮게 울었다.
강무진이 물었다.
“사람을 잡아간 이유가 그것뿐입니까?”
포로가 그를 보았다.
“노동력은 필요한 곳에 배치된다. 채굴이 가능한 종은 광산으로, 손재주가 있는 종은 공방으로, 전투에 적합한 종은 소모 부대로 보낸다. 사용처가 정해지지 않은 자는 분류소에서 결정한다.”
“아이도?”
“성장 전 자원은 유지 비용과 예상 생산성을 비교한다.”
라칸이 한 걸음 움직였으나 강무진은 손을 들어 막았다.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
“당신들 장군은 강철보루를 어떻게 판단했습니까?”
“최초 평가는 무시 가능이었다.”
포로가 대답했다.
“지금은?”
“확인 중이다.”
로젠이 철판의 마지막 부분을 두드렸다. 명령문 아래에는 본문보다 깊고 거친 획이 덧새겨져 있었다.
“‘무시 가능’ 판정을 취소한다. 손실 원인을 현지 변수로 재분류하고 시험 전력을 정예 한 개 대로 격상한다. 금속 기술자는 생포하되, 나머지는 저항 비용에 따라 처분한다.”
그는 마지막 각인을 라칸 쪽으로 돌렸다. 세 갈래 창 아래에 짧은 이름이 직접 찍혀 있었다.
그리모어 바르가스.
포로의 보고를 기다린 명령이 아니었다. 노예 상단과 수색대가 사라진 순간, 그리모어는 손실을 장부의 오차로 넘기지 않고 강철보루를 자신이 꺾어야 할 변수로 올려놓았다.
“장군이 직접 등급을 바꿨군.”
로젠의 말에 포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면 충분했다.
강무진은 철판을 집었다. 차갑고 균일한 쇠는 탄소가 거의 없는 연철을 얇게 펴고 표면을 검게 부식시킨 것으로, 기록을 오래 남기기 위해 만드는 데 공을 들인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 위에 적힌 내용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 쇠를 쓰는 자가 거짓된 이름을 붙일 뿐이었다.
“시험 전력의 규모는?”
로젠이 물었다.
포로는 입을 다물었다.
라칸이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광산에서 배운 게 하나 있지. 마족도 아픈 건 싫어한다는 거야.”
강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놈들이 우리한테 한 짓을 몰라서 그래?”
“압니다.”
강무진은 포로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같아지지 않는 겁니다.”
라칸의 콧김이 거칠어졌지만 더 다가오지는 않았다.
로젠은 잠시 생각한 뒤 문밖을 바라보았다. 다른 두 포로는 서로 떨어진 곳에 갇혀 있었고, 한 명은 정신을 차린 뒤에도 입을 다문 채 밧줄만 시험하고 있었다.
“셋을 계속 분리해 두겠습니다. 각자에게 다른 둘이 이미 말문을 열었다고 알리면 진술이 갈리는 지점을 찾을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하십시오.”
“그 뒤의 선택지는 둘입니다. 심문을 계속해 편제와 진입로를 알아내거나, 한 명을 돌려보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꾸밀 수도 있습니다.”
강무진은 탁자 위의 지도를 보았다.
북쪽 비탈과 서쪽 자재 통로, 아직 절반밖에 올라오지 않은 동쪽 방벽이 그 위에 그려져 있었으며 적이 시험하려는 것은 병력만이 아니라 대응 속도와 지휘 체계, 약한 지점까지일 터였다.
한 명을 돌려보내면 거짓 정보를 쥐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셋 모두 보루 안을 어느 정도 살폈으며, 늘어난 피난민과 미완성 방벽, 자경대의 숫자도 헤아렸을 가능성이 컸다.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적은 관측조 셋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게 됩니다.”
“알아도 옵니다.”
강무진은 검은 철판을 지도 한쪽에 내려놓았다.
“이미 보낼 병력을 정했습니다.”
로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 밖으로 나오자 망치 소리가 다시 들렸다.
도리아는 아까 맡은 철괴를 길게 늘여 방벽용 띠쇠를 만들고 있었으며 열이 속까지 고르게 들어간 덕분에 망치가 닿을 때마다 쇳살이 옆으로 터지지 않고 곧게 뻗었다.
아이샤는 물통 옆에 앉아 무기 손질용 천을 크기별로 접다가 강무진을 발견하자 일어섰다.
“나쁜 놈들이야?”
강무진은 잠시 아이샤를 보았다.
어린 나이에 노예 상단으로 끌려가 이름 없이 자란 아이였고, 누군가는 지금도 그 아이를 성장 전 자원이라 불렀다.
“그렇습니다.”
“또 와?”
“옵니다.”
아이샤는 접던 천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모서리를 꼭 눌렀다.
“도망가야 해?”
“아닙니다.”
강무진은 대장간 벽에 걸린 작은 망치를 내려주었다.
“못을 더 만드십시오.”
“왜?”
“벽에 쓸 겁니다.”
아이샤는 망치를 두 손으로 받아 쥔 뒤 작업대로 갔다. 입을 다문 채 짧은 철편 하나를 화로 가까이에 놓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강무진은 로젠과 함께 방벽으로 향했다.
가는 길마다 이름이 있었다.
돌을 나르던 염소수인 바룬과 솥을 고치던 인간 여자 마레나, 말없이 흙을 다지던 오크 노인 우르담까지 로젠의 명부에는 모두 적혀 있었다. 서툰 글씨로 본인이 직접 쓴 이름도 있었고, 글을 몰라 대신 받아 적은 이름도 있었다.
누구도 백십에서 백사십 사이의 숫자가 아니었다.
방벽 위에 오른 라칸은 북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예가 올 겁니다.”
강무진이 말했다.
라칸은 놀라지 않았다.
“얼마나?”
“모릅니다.”
“언제?”
“그것도 모릅니다.”
“아는 게 별로 없군.”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라칸이 송곳니를 드러냈고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싸움을 앞둔 얼굴 같기도 했다.
“그건 알겠네.”
로젠이 품에서 도면을 꺼내자 바람에 종이 끝이 흔들렸다.
“동쪽 벽을 먼저 높이면 북문 공사가 늦어집니다. 북문을 우선하면 거주 구획이 사흘 동안 노출됩니다. 선택해야 합니다.”
강무진은 땅속과 방벽 안의 쇠를 느꼈다.
전날 박은 꺾쇠들은 돌의 무게를 고르게 받아내고 있었지만, 북문 경첩에 쓸 철은 아직 대장간 바닥에 놓여 있었다. 동쪽 벽 아래로는 광맥의 가느다란 가지가 지나갔고 쇠의 양은 적어도 돌기둥을 고정할 심봉 정도는 뽑아낼 수 있었다.
“동쪽 벽을 먼저 올립니다.”
“북문은 어떻게 합니까?”
“문짝을 만들지 않습니다.”
로젠이 눈썹을 움직이자 강무진은 도면의 북쪽 통로에 손가락을 댔다.
“두 겹의 쇠사슬을 걸고, 안쪽에 수레를 세웁니다. 공격이 오면 수레 사이를 쇠기둥으로 묶습니다.”
“임시 폐쇄물로 버틴다는 말씀이군요.”
“문보다 빨리 만들 수 있습니다.”
“통행은 불편해집니다.”
“살아 있으면 다시 고칠 수 있습니다.”
로젠은 즉시 도면에 선을 더했다.
강무진은 방벽 아래로 내려갔지만 작업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고 대신 경계조를 늘리고 쇠를 두드릴 수 있는 자들을 대장간으로 불렀으며 농기구 수리는 뒤로 미뤘다. 창끝보다 먼저 꺾쇠와 심봉, 방패 가장자리의 철띠를 만들게 했다.
무기를 많이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쇠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고 좋은 강철은 더 적었고 자경대원의 손은 아직 굳지 않은 데다 방벽도 낮았으므로, 가진 것을 어느 곳에 얼마나 쓸지 정해야 했다.
그 또한 담금질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부분을 단단하게 만들면 충격을 받는 순간 부러졌고 날은 단단해야 했고 등은 버텨야 했다. 강철보루 전체를 하나의 칼로 본다면, 사람들은 어느 한쪽에 몰아넣을 재료가 아니었다.
각자의 자리가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포로들의 장비가 대장간으로 옮겨졌다.
강무진은 검은 철판을 모루 위에 놓았다.
도리아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이걸 녹일 텐가?”
“아닙니다.”
“꼴 보기 싫은 물건인데.”
“남겨둡니다.”
“왜?”
강무진은 철판 한쪽의 글자를 정으로 찍어 지웠다. ‘불명 계통의 금속 기술자’라 새겨진 자리 옆에 자신의 작은 각인을 남기자 짧고 깊은 망치 자국이 검은 표면에 박혔다.
“누가 틀렸는지 기억해야 하니까요.”
도리아는 한동안 철판을 바라보다 코웃음을 쳤다.
“크흠. 그러면 잘 보관하게. 나중에 그 장군 놈 얼굴 앞에 던져줘야지.”
강무진은 철판을 벽에 걸었다.
그 아래에서는 아이샤가 만든 못들이 식고 있었으며 길이는 제각각이고 머리도 아직 고르지 않았지만, 쓸 수 있는 것과 다시 달궈야 할 것이 분명했다.
강무진은 못을 하나씩 나눠 쓸 수 있는 것들은 상자에 담고, 다시 손볼 것은 화로 옆에 놓았다.
버리는 것은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북쪽 경계대에서 짧은 종소리가 울렸다.
한 번.
잠시 뒤, 두 번이 더 이어졌다.
라칸이 방벽 위에서 외쳤다.
“불빛이다!”
강무진은 대장간 밖으로 나갔다.
북서쪽 산등성이 너머로 붉은 점들이 하나씩 나타났고 횃불이라기에는 간격이 지나치게 일정했고, 열을 넘고 스물을 넘어서도 계속 늘어났다.
그의 감각 끝에도 쇠가 걸렸다.
하나는 북서쪽 산길을 따라 길게 늘어진 무리였다. 금속의 양은 많았으나 대부분 가늘고 가벼웠으며, 일정한 무게로 만든 작은 촉들이 사람의 걸음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갑옷을 갖춘 군세라기보다 같은 규격의 화살을 대량으로 지닌 행렬에 가까웠지만, 이 거리에서는 주인이 누구인지까지 가려낼 수 없었다.
그보다 더 북쪽에는 별개의 쇠가 있었다.
숫자는 적어도 밀도가 높았고, 두꺼운 갑옷과 창, 넓은 방패의 테두리로 짐작되는 금속이 산등성이 뒤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북서쪽 행렬과 나란히 오는 듯하다가도 간격이 벌어졌으며, 서로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지조차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두 무리.
한쪽은 강철보루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고, 다른 쪽은 먼 능선 너머에서 방향을 재고 있었다.
강무진은 앞치마를 벗어 작업대 위에 접어두었다.
“불을 올리십시오.”
도리아가 송풍 손잡이를 움켜쥐자 화로가 숨을 들이마셨다.
누가 먼저 문 앞에 닿든, 강철보루는 빈손으로 맞을 수 없었다.
다만 뒤따라오는 쇠가 어느 편인지는, 문 앞에 닿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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