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황무지에서 검은 전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는 넓은 방패를 맞댄 보병이었다. 검게 칠한 철판이 무릎부터 턱까지 가렸고, 방패 사이로 긴 창날이 비스듬히 솟아 있었다. 그 뒤에는 여섯 명씩 멘 공성추 두 대가 따랐는데, 통나무 머리에 씌운 쇠가 햇빛을 삼키듯 어두웠다.
강무진은 그 쇠의 무게부터 가늠했다.
한 덩이로 주조한 물건이 아니라 여러 장의 철판을 달구어 겹친 뒤 띠쇠로 조인 물건이었다. 탄소 함량이 고르지 않은 데다 앞쪽 두 장 사이에는 식는 속도가 달라 생긴 미세한 틈이 있었다. 정면으로 받으면 문이 먼저 깨지겠지만, 옆으로 비틀 힘만 제대로 줄 수 있다면 철판끼리 물린 자리가 벌어질 터였다.
문제는 거리였다.
철의 축복은 쇠의 결을 느끼게 했지만, 손을 뻗지 않고 산 하나를 움직이는 권능은 아니었다. 무겁고 먼 쇠일수록 붙드는 데 더 많은 힘이 들었다. 저 공성추를 꺾으려면 방벽 가까이 끌어들여야 했다.
“로젠.”
로젠은 이미 도면을 펼친 채 북문 뒤에 서 있었다.
“공성추를 문 앞까지 들이십시오.”
그의 시선이 공성추와 강무진을 번갈아 오갔다.
“어디까지입니까?”
“열다섯 걸음.”
“그 뒤에는?”
“왼쪽으로 넘깁니다.”
로젠은 이유를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무진이 쇠를 두고 거리를 말할 때에는 그 수치가 곧 한계이자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문 전열, 첫 충격까지 물러서지 마라! 궁수대는 공성추 인부를 노린다. 자경대 이열은 갈고리를 준비하라!”
명령이 방벽을 따라 번졌다.
라칸이 북문 앞에 방패를 세우자 그 뒤로 자경대원 열여섯이 두 줄로 자리 잡았다. 갑옷도 몸집도 제각각이었으나 강무진이 벼린 창날만큼은 길이와 무게가 같았다. 같은 구령에 같은 거리로 뻗어야 비로소 방진이라 부를 수 있었다.
젊은 자경대원 하나의 창끝이 떨렸다. 라칸은 방패 가장자리로 창대를 툭 쳐서 아래로 내렸다.
“적을 죽이려 들지 마. 네 앞 한 걸음만 못 넘게 해.”
“예.”
“살아서 교대해라. 죽으면 다음 훈련 때 네 몫까지 뛰게 할 거다.”
말이 되지 않는 협박이었지만 자경대원의 입가가 잠깐 움직였다. 떨리던 창끝도 조금 낮아졌다.
검은 방패벽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실바나가 손을 들자 방벽과 후방 발판의 열여섯 장의 활이 일제히 기울었다. 남은 여덟은 교대·기동조로 화살을 메긴 채 대기했다. 화살에는 도리아가 만든 갈고리 화살촉이 달려 있었다. 살을 깊이 파고드는 모양이 아니라 방패 테두리와 갑옷의 이음매, 공성추를 멘 가죽끈과 철고리를 걸어 뜯기 위한 물건이었다.
“첫 표식.”
활시위가 한꺼번에 울렸다.
화살들이 선두의 방패를 넘어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여섯 발이 공성추 위로 쏟아져 멜빵과 손잡이 사이에 박혔고, 두 발은 철고리에 걸렸으며 나머지는 갑옷과 방패를 튕겨 냈다.
적은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사격이 이어지자 방벽 위의 궁수 여덟은 방패 사이를 노렸고, 뒤편 발판에 선 여덟은 높은 각도로 쏘았다. 공성추를 메던 병사 하나가 어깨끈을 놓치면서 긴 통나무가 한쪽으로 기울었지만, 뒤따르던 병사가 곧 빈자리를 메웠다.
낮은 뿔나팔 소리가 황무지를 훑었다.
적의 방패들이 일제히 위로 들렸다.
로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자경대, 투창!”
방벽 아래 엎드려 있던 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짧은 투창 열두 자루가 낮게 날아가 위쪽을 가리느라 드러난 정강이와 발등을 때렸다. 선두 몇이 무너지며 뒤따르던 줄에 걸렸고, 단단하던 방패벽의 보폭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보병 뒤편에서 거구 하나가 도끼창을 앞으로 기울였다. 다른 병사들보다 머리 하나는 컸으며, 견갑에는 붉은 쇠못이 세 줄로 박혀 있었다. 지시가 떨어지자 적병들은 넘어진 동료를 끌어내지 않았다. 그대로 밟고 전진하면서 벌어진 틈을 다시 방패로 채웠다.
상처 입은 병사조차 그들에게는 멈출 이유가 아니었다.
강무진은 검자루를 단단히 감쌌다. 저들에게 사람은 전열을 이루는 부품이었고, 쓰지 못하게 된 부품은 길바닥에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첫 공성추가 들어옵니다.”
쇠로 된 거대한 머리가 방벽 열다섯 걸음 앞을 지났다.
강무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감각이 사방으로 퍼지자 방벽의 꺾쇠와 북문의 쇠사슬, 자경대의 창날이 먼저 손끝에 닿았다. 각각 다른 온도와 장력을 지닌 쇠가 어둠 속의 불씨처럼 떠올랐고, 그 너머에서는 공성추 머리의 철판이 묵직하게 잡혔다. 겹친 판 사이의 틈은 머리카락보다도 얇았으므로 힘을 넓게 쓰면 통나무의 무게에 짓눌릴 터였다.
한 곳만 잡아야 했다.
강무진은 검을 거꾸로 들어 칼끝을 땅에 박고 두 손을 자루 위에 포갰다. 관자놀이가 팽팽하게 당기면서 손끝이 저려 왔다.
공성추가 열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자경대가 갈고리 밧줄을 던졌다. 다섯 개 가운데 세 개가 공성추 손잡이와 쇠고리에 걸리자 병사들이 반대쪽으로 달리며 밧줄을 당겼고, 동시에 강무진은 철판 왼쪽 가장자리를 붙들었다.
차가운 쇠가 손바닥 안에서 달군 쇳덩이처럼 선명해졌다. 그는 통나무를 통째로 밀지 않았다. 덜 붙은 틈에 힘을 밀어 넣어 망치로 쐐기를 박듯 한 치씩 벌렸다.
공성추가 문을 향해 내달렸다.
열 걸음.
다섯 걸음.
띠쇠 하나가 끊어졌다.
강무진이 왼손을 비틀자 공성추 머리가 반 뼘 돌아갔다. 밧줄을 당기던 자경대원들이 흙바닥을 미끄러졌지만 아무도 손을 놓지 않았고, 공성추를 멘 적병들의 발이 서로 엉켰다.
통나무가 북문 오른쪽을 스쳤다.
굉음과 함께 방벽의 흙채움이 움푹 꺼졌으며 말뚝 두 개가 갈라졌다. 충격이 쇠사슬과 고정 기둥을 타고 강무진의 감각까지 울렸으나, 봉쇄선은 열리지 않았다. 기울어진 공성추는 그대로 방벽 아래 도랑에 처박혔다.
“하나는 끝났다!”
도리아가 북문 위에서 긴 자루망치를 휘둘렀다. 방벽에 걸리려던 사다리의 갈고리가 찌그러져 튕겨 나갔다.
“내 화로 벽보다도 못 버티는 놈들이구먼!”
두 번째 공성추가 방향을 틀었다.
적병들은 북동쪽의 덜 굳은 방벽을 노리고 있었다. 그곳은 흙을 채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준비한 철심이 모자라 다른 구간보다 보강 간격도 넓었다. 적이 정찰로 알아냈는지, 눈으로 약한 지점을 골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움직임이 빨랐다.
실바나가 손을 내리자 엘프 궁수 한 조가 발판 위를 달렸다. 테르윈은 공성추 인부를 향해 화살 세 발을 연달아 보냈다. 두 발은 방패에 막혔지만 세 번째가 멜빵의 철고리에 꽂혀 들어갔다.
그때 적진 뒤편에서 짧고 굵은 파열음이 났다.
“숙여!”
강무진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쇠뇌 화살이 방벽 위로 쏟아졌다. 굵은 화살 하나가 엘프 궁수의 어깨를 꿰뚫어 발판에 쓰러뜨렸고, 자경대원 둘도 방패를 올리기 전에 맞아 뒤로 넘어갔다.
실바나의 활 쥔 손이 떨렸다.
아주 짧은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쓰러진 동족에게 달려가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온 각도와 소리를 좇아 적진 뒤편을 바라보더니 활시위를 끝까지 당겼다.
“쇠뇌수. 검은 천막 아래.”
엘프들의 화살이 한 점으로 모였다. 먼저 날아간 화살들이 천막 앞의 방패에 연달아 박히며 틈을 만들었고, 정령의 바람이 뒤따른 두 발의 꼬리를 밀었다. 마지막 화살들이 방패 위를 넘어 검은 천막 안으로 사라진 뒤, 적 쇠뇌의 발사가 끊겼다.
“부상자는 뒤로!”
로젠이 외쳤다.
아이샤가 들것 한쪽을 붙잡고 달려왔다. 성인 남자의 몸은 작은 팔로 감당하기 버거웠으나 피난민 여인이 반대쪽을 들자, 아이샤는 바닥에 흩어진 창과 화살을 피해 걸음을 맞췄다. 들것이 기울 때마다 이를 악물었을 뿐, 무섭다거나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공성추가 방벽에 닿았다.
흙과 나무가 안쪽으로 터져 나오면서 말뚝이 휘고 발판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궁수들이 난간을 붙잡았으며, 갈라진 틈으로 검은 창날들이 뱀의 혀처럼 연달아 들어왔다.
“북동쪽을 막아!”
라칸이 달려가 첫 창을 방패로 흘리고 틈 앞에 몸을 세웠다. 자경대원 다섯이 그 뒤를 따르자 좁은 틈을 향해 창이 일제히 뻗었다. 적병 하나가 물러났지만 곧 뒤에서 새로운 방패와 창이 밀려왔다.
“허리 낮춰! 창끝 보지 말고 어깨를 봐!”
라칸은 틈을 완전히 막으려 하지 않았다.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는 적의 수를 둘로 제한한 채, 방패를 비스듬히 세워 창날을 흘렸다. 자경대가 그 뒤에서 번갈아 찔렀으나 실전의 호흡은 훈련처럼 맞지 않았다. 창 하나가 너무 깊이 나가 적의 방패에 끼자 라칸은 직접 창대를 걷어차 부러뜨렸다.
“무기 하나 살리다 목이 날아가면 손해다. 다음 걸 들어!”
강무진은 북동쪽을 향해 한 걸음 움직였다.
“강무진!”
도리아의 외침이 북문 위에서 떨어졌다.
붉은 쇠못이 박힌 견갑이 방패벽 사이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적의 지휘관은 공성추가 만든 틈으로 가지 않았다. 거구는 도끼창을 비스듬히 든 채 북문 앞의 자경대 전열을 향해 곧장 걸었다.
강무진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북동쪽의 틈은 미끼였다. 라칸과 예비 병력을 그곳에 묶어 둔 뒤, 지휘관이 직접 북문 전열을 깨뜨리려는 것이었다.
도끼창이 크게 휘둘러졌다.
자경대의 창 두 자루가 한꺼번에 부러졌고, 거구는 방패를 앞세워 벌어진 틈에 몸을 들이받았다. 첫 줄이 밀리면서 뒤에 선 자들의 발꿈치가 흙을 깊이 팠다. 한 명이 넘어지면 전열 전체가 무너질 거리였다.
라칸이 돌아보았다. 방패에는 검은 창날 하나가 걸려 있었고, 그의 송곳니 사이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 자리를 지켜라.”
강무진의 말에 라칸이 눈을 부릅떴으나 북동쪽 틈을 떠나지는 않았다.
“빨리 끝내, 대장장이!”
“그러겠습니다.”
강무진은 북문의 쇠사슬 한 겹을 풀어 사람 둘이 나갈 틈만 열었다. 도리아가 발판에서 뛰어내려 그의 옆에 섰으며, 망치 머리에는 부서진 사다리의 나무 조각이 끼어 있었다.
“화로도 아닌데 간섭은 받겠지?”
“왼쪽을 맡으십시오.”
“크흠. 좋은 자리부터 고르는군.”
둘은 문밖으로 나갔다.
거구의 도끼창이 강무진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그는 검으로 정면에서 받지 않고 반걸음 비키며 칼등으로 자루를 밀었다. 도끼날이 땅을 찍는 순간 충격이 물림쇠를 타고 울렸다.
도끼날 자체는 단단했으나 자루와 연결한 쇠가 지나치게 두꺼웠다. 무게를 늘리려고 덧댄 철이 충격을 분산시키지 못하고 한곳에 모으고 있었다. 같은 자리를 세 번 치면 갈라질 결이었다.
거구의 방패가 강무진의 가슴을 노렸다.
옆에서 도리아의 망치가 날아와 방패 왼쪽 가장자리를 후려쳤다. 철판이 움푹 들어가며 거구의 몸이 반걸음 돌아갔지만, 그 틈으로 검은 창 두 자루가 도리아를 찔러 들어왔다.
“잔챙이는 내가 맡지!”
도리아는 망치자루로 첫 창을 걷어 낸 뒤, 두 번째 창날을 팔뚝 보호대로 밀어냈다. 갈라진 수염 끝이 어깨 위로 튀었으나 그는 한 올도 잘리지 않았는지 확인할 겨를조차 없었다.
거구의 도끼창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강무진은 검을 세워 물림쇠 바로 아래를 쳤다.
한 번.
손목이 저렸고 검날에도 작은 이가 나갔다. 제대로 된 검이라면 피해야 할 충격이었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날의 수명이 아니라 적 무기의 파손이었다.
거구는 곧 도끼창의 거리를 버리고 방패로 압박해 왔다. 약점을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같은 자리를 쉽게 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방패 모서리가 짧게 움직일 때마다 강무진은 뒤로 한 걸음씩 밀렸다.
북문 앞 도랑이 발꿈치에 닿았다.
거구의 방패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강무진은 땅속의 쇠를 붙들었다. 방벽 보강에 쓰려다가 길이가 모자라 묻어 둔 철심 세 개가 도랑 아래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녹이 얕게 밴 표면과 거친 절단면이 흙을 사이에 두고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가 손가락을 당기자 철심 하나가 흙을 뚫고 솟았다.
거구의 발목이 걸리며 중심이 앞으로 무너졌고, 자연히 방패도 내려갔다. 강무진의 검이 드러난 물림쇠를 다시 때렸다.
두 번.
금이 손끝에 와닿았다.
거구가 포효하며 도끼창을 내리찍었다. 강무진은 몸을 틀었으나 날 끝이 어깨 보호대를 스쳤고, 가죽 아래가 뜨겁게 갈라지면서 오른팔에서 힘이 빠졌다.
세 번째는 검으로 칠 수 없었다.
강무진은 왼손을 뻗어 금이 간 물림쇠를 직접 붙들었다.
쇠가 거칠게 저항했다. 적이 움켜쥔 무기인 데다 첫 번째 공성추를 꺾느라 이미 많은 힘을 쓴 뒤였다. 손가락 관절이 달군 집게에 눌린 듯 타들어 갔고, 관자놀이 안쪽에서는 맥박에 맞춰 통증이 뛰었다.
그래도 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한번 생긴 길은 힘이 들어올 때마다 깊어졌다.
강무진이 손을 비틀었다.
물림쇠가 찢어지며 도끼날이 자루에서 떨어졌다. 거구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뜨였다.
강무진은 남은 자루를 검등으로 쳐 내고 어깨를 밀어 넣었다. 거구가 급히 방패를 들려는 순간, 도리아의 망치가 반대편 무릎을 후려쳤다.
“무릎은 하나면 꿇는 법이지!”
갑옷이 찌그러지며 거구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댔다. 강무진의 검끝이 투구 아래를 겨눴다.
“무기를 놓아라.”
거구는 부러진 자루를 놓지 않았다. 한쪽 무릎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허리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강무진은 한 박자 기다렸다.
단검이 앞으로 움직이는 순간, 그의 검이 먼저 투구 아래로 파고들었다. 거구는 일어서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고 붉은 쇠못이 박힌 견갑이 흙바닥에 부딪쳤다.
적 전열이 흔들렸다.
도리아가 피 묻은 망치를 들어 올렸다.
“네놈들 대장이 식었다!”
북동쪽에서 라칸의 함성이 터졌다.
“밀어!”
자경대가 한꺼번에 창을 뻗었다. 엘프 궁수들은 방벽을 넘으려던 병사들의 손과 어깨를 정확히 꿰뚫었으며, 테르윈의 화살이 공성추를 묶은 마지막 멜빵을 끊었다. 지지대를 잃은 통나무가 옆으로 굴러가자 방벽에 붙어 있던 적병 셋이 황급히 몸을 피했다.
로젠이 북문 안에서 깃발을 내저었다.
대기하던 자경대 이열이 문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쓰러진 적에게 달려들지 않고, 먼저 버려진 방패를 빼앗아 세운 뒤 열린 공간을 한 걸음씩 되찾았다. 인간 피난민이 방패를 들고 수인이 옆을 지켰으며, 그들의 머리 위로 엘프의 화살이 지나갔다.
서로 다른 손이었지만 빈틈은 없었다.
검은 전열 뒤에서 뿔나팔이 길게 울렸다.
적병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방패를 앞세워 질서를 유지했으나 공성추를 버린 뒤부터는 걸음이 빨라졌고, 부상자를 챙기지 않는 탓에 대열 곳곳에 빈틈이 벌어졌다.
엘프들이 활을 당겼다.
실바나가 손을 들었다.
“사정거리 밖입니다.”
테르윈은 이를 악문 채 물러나는 적을 바라봤다. 잠시 뒤, 그의 손가락이 시위에서 떨어졌다.
강무진도 추격을 명하지 않았다. 북동쪽 방벽은 반쯤 무너졌으며 자경대의 대열에는 빈자리가 보였다. 등을 보인 적에게 달려들면 승리는 조금 커지겠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날 터였다.
“문을 닫으십시오.”
쇠사슬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검은 깃발들이 황무지 너머로 멀어졌지만 환호는 바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먼저 곁에 서 있는 자를 확인했고, 다음에는 땅에 쓰러진 이들을 살폈다. 그러고 나서야 짧은 함성이 터졌으나 몇 사람이 받아 외친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부상자는 열셋이었다. 그중 엘프 궁수 하나와 자경대원 둘은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으며, 나머지도 가벼운 상처만 입은 사람은 드물었다. 로젠이 약초와 붕대의 남은 수량을 세는 동안 실바나는 정령술을 다룰 줄 아는 궁수 둘을 치료에 붙였다.
세 사람의 숨은 가늘었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북동쪽 방벽은 여섯 걸음가량 다시 쌓아야 했다. 준비한 화살은 절반 넘게 사라졌고, 창 다섯 자루가 부러졌으며 북문의 쇠사슬 고정쇠 하나에는 금이 갔다. 자경대의 방패 가운데 네 개는 다음 전투에 쓰기 어려울 만큼 갈라져 있었다.
강무진은 피 묻은 어깨에 천을 감은 채 쇠사슬 고정쇠 앞에 앉았다.
아이샤가 곁에서 망가진 못을 골라냈다. 작은 손은 검댕과 흙으로 까매졌고, 소매 한쪽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이건 다시 써요?”
아이가 휜 못 하나를 들었다.
강무진은 그것을 받아 충격이 지나간 결을 살폈다. 겉만 휜 게 아니라 머리 아래에 미세한 균열이 퍼져 있었다.
“그대로는 안 된다.”
“펴도요?”
“속이 갈라졌다.”
아이샤는 못을 한참 들여다봤다.
“녹이면?”
“다시 쓸 수 있다.”
아이는 못을 버리는 통이 아니라 쇳조각 통에 넣었다. 이어서 다음 못을 집었는데, 이번에는 묻지 않고 손가락으로 표면을 문질러 균열부터 찾았다.
실바나가 다가왔다. 활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으며 소매에는 동족의 피가 말라붙고 있었다.
“원로회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녀는 치료소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쓰러졌던 엘프 궁수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스물넷이 싸웠고, 스물넷이 돌아간다고.”
강무진은 망가진 고정쇠를 빼내며 대답했다.
“전부 걸어서 돌아가게 하십시오.”
실바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피 묻은 소매를 접어 올린 뒤 바닥의 새 고정쇠를 집어 강무진에게 건넸다.
라칸은 방패를 내려놓지 않은 채 치료소 입구를 지켰다. 방패에는 창 자국이 일곱 개 남아 있었고 왼팔에서도 피가 흘렀으나, 치료를 받으라는 말에는 아직 안쪽이 더 급하다며 고개만 저었다.
로젠은 부상자 명단과 소모품 수량을 같은 장에 적었다. 승리라는 글자는 어디에도 쓰지 않았다. 대신 무너진 방벽의 길이, 남은 식량, 다음 교대에 설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빈틈없이 채워졌다.
도리아가 부러진 도끼날을 끌고 왔다.
“쇠맛은 형편없다. 그래도 녹이면 벽 못 수백 개는 나오겠군.”
“갑옷도 거두십시오.”
“전부?”
“전부.”
강무진은 금이 간 쇠사슬 고정쇠를 모루 위에 올렸다.
“들것의 꺾쇠부터 고쳐야 합니다.”
도리아는 수염을 한 번 쓸어내렸으나 평소 같은 걸걸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망치에 묻은 흙을 닦은 뒤, 부러진 도끼날을 화로 쪽으로 끌고 갔다.
해가 지자 강철보루의 불이 다시 켜졌다.
한쪽에서 부상자를 돌보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무너진 방벽을 메웠다. 엘프들이 부러진 화살대를 고르자 자경대는 적의 방패에서 쓸 만한 철띠를 떼어 냈고, 피난민들은 흙과 돌을 날랐다. 누구도 종족별로 줄을 나누지 않았다. 필요한 자리에 손이 붙었다.
강무진은 새 쇠사슬 고정쇠의 마지막 못을 박았다.
탕.
망치 소리가 어둠 속으로 번졌다.
그리모어가 보낸 정예병과 맞선 첫 본격적인 방어전은 끝났다. 방벽과 자경대, 엘프 궁수대와 강철보루의 무기들이 처음으로 한 전장에서 맞물렸고, 미완성인 채로도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황무지 너머로 물러난 쇠의 수를 강무진은 잊지 않았다. 쓰러진 것보다 돌아간 것이 많았으며, 정예병이라 해도 그리모어의 본대는 아닐 터였다.
그는 모루 위에 놓인 적 지휘관의 붉은 쇠못 하나를 집었다.
못머리 안쪽에는 세 갈래 뿔을 감싼 왕관 문양이 작게 찍혀 있었다. 회수한 갑옷과 방패에도 같은 형틀의 붉은 쇠못이 박혀 있었고, 로젠의 사상자·퇴각 인원 기록을 합치면 돌아간 자들이 지닌 것만 수백 개였다.
북쪽 망루에서 내려온 관측병은 적의 불빛이 황무지 너머 세 지점에 멈춰 섰다고 보고했다. 정찰병이 남긴 지도에는 물러난 발자국이 흩어지지 않고 보루 양옆으로 갈라진 흔적이 표시되어 있었다.
강무진은 붉은 쇠못을 화로에 던졌다.
“도리아.”
“듣고 있네.”
“내일부터 화로를 쉬지 않습니다.”
도리아가 송풍 손잡이를 잡았다.
“크흠. 이제야 쇠맛 나는 소리를 하는군.”
불길이 높이 솟았다.
적은 멀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찰 기록 위에서 강철보루의 둘레를 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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