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보루로 돌아온 강무진이 가장 먼저 들은 것은 망치 소리가 아니었다.
“전열 유지! 앞줄, 방패 세워!”
라칸의 고함이 낮은 방벽을 넘어왔다.
훈련장은 대장간 남쪽 공터에 새로 닦여 있었다. 흙바닥에는 석회 가루로 반듯한 선이 그어졌고, 그 안에 즉시 전투조로 분류된 서른 남짓한 대원이 세 줄로 늘어서 있었다. 인간과 수인, 드워프와 아인종이 한데 섞인 만큼 키도 팔 길이도 달랐는데, 같은 규격으로 만든 방패를 들려 놓으니 차이는 더 선명해졌다.
앞줄 오른쪽의 염소뿔 아인종은 방패 윗부분이 눈을 가렸고, 반대로 곰수인은 어깨가 너무 넓어 표준 방패 하나로 몸을 가리지 못했다.
“창 들어!”
두 번째 줄의 창대가 일제히 솟았다.
일제히, 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랐고 두 자루는 늦었고 한 자루는 앞줄 방패에 부딪히면서 나무와 쇠가 요란하게 울렸다.
라칸이 손을 들었다.
“그대로 멈춰.”
늦게 든 인간 청년이 창을 내리려다 굳자, 라칸은 그 앞까지 걸어가 창대의 위치를 살폈다.
“왜 늦었지?”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뭘 봤나?”
“예?”
라칸이 청년의 발을 발끝으로 툭 쳤다.
“앞줄 뒤꿈치. 옆 사람 어깨. 지휘 깃발. 볼 건 셋이나 있어. 적 얼굴 보려고 목 빼지 마.”
그는 방패 뒤에 몸을 낮추며 직접 창대를 잡았고 앞줄 방패와 방패 사이, 주먹 하나 너비의 틈으로 창날이 뻗었다.
“네가 찌르는 건 적이 아니다. 이 선이다. 적이 선 위로 오게 만들어.”
라칸이 창을 돌려주었다.
“다시.”
대열이 처음 자리로 돌아갔다.
강무진은 훈련장 가장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숲으로 떠나기 전의 자경대와는 달랐다. 그때는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서로의 빈틈을 메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라칸이 코를 벌름거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왔수?”
“왔습니다.”
“숲은?”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라칸의 귀가 뒤로 조금 눕더니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우린 우리 거 해야지.”
그가 다시 대열을 향했다.
“전열 유지! 스무 걸음 전진한다!”
방패벽이 움직였다.
첫 다섯 걸음은 그럴듯했으나 여섯째 걸음에서 보폭이 갈렸고 다리가 짧은 드워프가 뒤처지는 동안 성질 급한 늑대수인이 반 걸음 앞서면서 방패 사이가 벌어졌다. 라칸은 즉시 대열을 멈췄다.
“누가 빨랐지?”
늑대수인이 이를 드러냈다.
“접니다.”
“누가 느렸고?”
드워프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내가 느린 게 아니라 저 녀석 다리가 쓸데없이 긴 거다.”
몇 사람이 웃었지만 라칸은 웃지 않았다.
“전장에선 둘 다 같은 말이야. 틈이 생겼다는 말.”
그는 늑대수인의 발 앞에 선을 하나 긋고, 드워프의 발 앞에도 선을 그었다.
“빠른 놈은 늦춰. 느린 놈은 보폭을 외워. 혼자 빨라 봐야 옆구리만 내준다.”
늑대수인이 입술을 비틀었다.
“적이 바로 앞인데도 기다립니까?”
라칸은 허리에서 목검을 뽑아 그에게 던졌다.
“나와.”
대열이 술렁였다.
늑대수인은 목검을 받아 들고 앞으로 나왔고 어깨가 단단하고 움직임도 빨랐다. 접경의 사냥꾼 출신이라고 강무진은 기억했고 자경대가 처음 꾸려졌을 때부터 습격대 추적에 여러 번 나섰던 자였다.
라칸은 방패 하나만 들었다.
“넘어뜨리면 오늘 훈련 끝이다.”
늑대수인이 낮게 몸을 숙이자마자 곧장 달려들었고 목검이 방패 가장자리를 스치며 라칸의 목을 노렸다.
라칸은 피하지 않았다.
방패를 반 뼘 밀어 검의 궤도를 바꾸면서 앞으로 한 걸음 들어갔고 방패 윗부분이 늑대수인의 어깨를 눌러 균형을 무너뜨리자, 라칸의 발이 상대 발목 뒤를 걸었다.
두 동작이었다.
늑대수인이 등을 땅에 찧었다.
라칸은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빨라.”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혼자 죽기 좋다.”
늑대수인은 잠시 그 손을 보다가 붙잡고 일어났다.
“다시 하죠.”
“대열부터.”
라칸은 방패를 돌려주고 전열 앞으로 걸어갔다.
“강한 놈을 뽑는 훈련 아니다. 옆 사람 안 죽게 만드는 훈련이야. 종족도, 키도, 힘도 다르다. 그러니까 맞춰. 못 맞추겠으면 될 때까지 한다.”
강무진은 라칸의 목소리에서 전과 다른 결을 들었다.
광산에서 구해 냈을 때의 라칸은 자기 몸 하나를 살리는 움직임에 익숙했다. 강무진의 곁을 따르기 시작한 뒤에는 앞을 막아서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서른 명의 발을 한꺼번에 보고 있었다.
쇠를 다루는 것과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
성질이 다른 쇠를 같은 온도로 달구면 어느 한쪽은 반드시 상했다. 탄소 함량이 다르면 불에서 꺼내는 때도 달라야 했지만, 그렇다고 완성된 물건의 규격까지 달라서는 안 되었다. 쓰는 사람의 손에 맞추되 함께 놓였을 때는 같은 역할을 해야 했다.
강무진은 훈련장 한쪽에 쌓인 무기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축복의 감각이 쇠를 훑었다.
창촉 서른여섯, 검 스물두 자루, 철모 열아홉, 방패 테 마흔하나. 대장간에서 검사한 것들이었으나 훈련을 거치며 상태가 달라져 있었다. 창촉 셋은 투겁 안쪽이 느슨해졌고, 검 한 자루에는 날과 슴베가 이어지는 부분에 미세한 피로가 쌓였으며, 방패 테 둘은 못이 반쯤 빠져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굽히자 문제 있는 무기들이 낮게 울렸다.
짤랑.
대열 속에서 창 하나가 옆으로 끌려 나오더니, 이어 검과 방패가 주인의 손을 벗어나 공터 가장자리에 놓였다. 놀란 대원들이 빈손을 움켜쥐었다.
“이것들은 다시 손보겠습니다.”
강무진이 말했다.
라칸이 빠진 자리를 세어 보았다.
“무기 없이 훈련 못 하는데.”
“예비품은 무기고 둘째 칸에 있습니다.”
“다 같은 규격?”
“창은 같습니다. 검은 손잡이 두께가 다릅니다.”
“왜?”
강무진은 대열 안의 손들을 보았고 두꺼운 손가락과 긴 손톱, 물갈퀴가 남은 손과 손바닥 전체를 덮는 털이 한데 섞여 있었다.
“손이 다르니까요.”
라칸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대열에선 맞추라면서 무기는 맞춰 주는군.”
“맞춰 쓸 수 있어야 맞춰 섭니다.”
“그건 맞지.”
라칸이 대원 셋을 지목했다.
“예비품 가져와. 뛰어.”
셋이 무기고로 달려갔다.
강무진은 문제가 생긴 검을 집었고 열처리는 제대로 되어 있었으나 슴베 어깨의 모서리가 지나치게 각져 있었다. 반복 충격이 그곳에 모였지만 완성할 때는 드러나지 않던 결함이었다.
실전 전에 드러난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엄지로 그 부분을 문지르자 쇠의 결이 손끝 안쪽에서 가느다랗게 갈라져 느껴졌다.
“훈련이 더 거칠어졌습니까?”
“오늘부터 방패벽 충돌을 넣었수.”
“그렇군요.”
“망가졌다고 화내진 마쇼. 사람 대신 무기가 망가진 거니까.”
“잘 망가졌습니다.”
라칸이 강무진을 돌아보았다.
“그런 말도 하는군.”
“부러질 물건은 화로 가까이서 부러져야 합니다.”
강무진은 검을 따로 내려놓으며 같은 방식으로 만든 검들을 모두 다시 검사해야겠다고 판단했고 한 자루의 흠은 한 자루에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표준화는 빠르게 만드는 법인 동시에 같은 실수를 빠르게 늘리는 법이기도 했다.
그때 훈련장 입구에서 로젠이 두꺼운 장부를 옆구리에 낀 채 다가왔고, 그의 뒤로 잉크병과 나무패를 든 서기 둘이 따랐다.
“마침 모두 계시는군요.”
라칸이 얼굴을 찌푸렸다.
“또 이름 쓰라고?”
“이름만 쓰는 단계는 끝났습니다.”
로젠은 훈련장 옆에 세운 긴 탁자 위로 장부를 펼쳤다. 강철보루의 자경대·공역 명부에 등록된 백마흔두 명이 역할에 따라 나뉘어 있었고, 이름마다 소속과 장비를 적을 칸이 빼곡하게 그어져 있었다.
“소속, 병과, 지급 장비, 숙련도, 교대조, 부양가족, 부상 이력까지 기록합니다.”
“싸우는 데 부양가족이 왜 필요하지?”
“병사가 성벽 위에 있는 동안 그 가족에게 식량이 끊기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
라칸은 입을 다물었다.
로젠이 다음 장을 넘기자 이름 옆으로 검은색과 붉은색 선이 이어져 있었다.
“전체 거주자는 이백두 명입니다. 그중 교대 근무가 가능한 자경대·공역 등록자가 백마흔두 명이고, 즉시 전투 가능한 정식 전투조가 서른여덟 명, 훈련 예비조가 스물셋입니다. 나머지 여든한 명은 경계 교대와 수송, 공병, 취사로 나뉩니다. 어린아이와 간병 전담자, 병상에서 회복 중인 사람 등 예순 명은 별도 거주자 명부에서 배급과 보호 대상으로 관리합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각 항목을 짚어 내려갔다.
“궁수는 열둘뿐이고 그중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인원은 다섯입니다. 야간 경계는 전투조와 경계 인원을 섞어 세 개 조로 돌리고 있으나, 북쪽 망루는 매일 두 시각씩 비게 됩니다.”
“안 비었는데.”
“라칸 경이 대신 올라가 있으니 그렇습니다.”
“그럼 된 거 아냐?”
“지휘관이 매일 밤 망루를 지키면 낮 훈련의 판단이 흐려집니다. 체력은 병참으로 보급할 수 없습니다.”
라칸의 꼬리가 한 번 거칠게 흔들렸다.
“경은 빼쇼.”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자경대는 개인의 호의로 움직이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젠은 앞면에는 이름과 번호가, 뒷면에는 소속 조가 새겨진 나무패 하나를 들었다.
“지급품은 이 번호로 관리합니다. 창을 받으면 기록하고, 부러뜨리면 반납합니다. 식량도 같은 방식으로 나눕니다. 누가 더 많이 싸웠다고 더 먹고, 늦게 왔다고 덜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곰수인 하나가 대열에서 손을 들었다.
“우리 종족은 인간보다 두 배는 먹는다.”
“알고 있습니다.”
로젠은 다른 장부를 펼쳤다.
“종족별 기준 배급량을 따로 두었습니다. 일률적으로 나누는 것이 공평한 것은 아니니까요. 대신 같은 종족 안에서는 같은 양을 받습니다.”
뒤쪽의 인간 대원이 물었다.
“그러면 저희 몫이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필요한 총량을 먼저 계산합니다. 부족하면 줄을 세우는 대신 더 구해 와야 합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로젠의 답은 부드러웠으나 빈틈이 없었다.
강무진은 장부 위 숫자들을 내려다보았고 쇠는 감각으로 셀 수 있었고,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와 어느 정도 닳았는지도 눈을 감으면 알았다. 그러나 사람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밤마다 망루에 대신 오르는지, 누구의 집에 먹을 입이 몇인지, 부상당한 뒤에도 창을 놓지 못하는지가 저 장부에 적혔다.
전투조 서른여덟 명만으로 성벽이 굴러가는 것도 아니었다. 화살과 식량을 나르는 손, 무너진 길을 다지는 손, 끓는 솥을 지키는 손이 끊기면 창을 든 자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성벽은 돌로만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명부에 등록하면 뭘 약속받습니까?”
강무진이 물었다.
로젠이 장부에서 시선을 들었다.
“우선 맡은 역할에 맞는 배급과 장비를 받습니다. 전투조와 예비조는 부상 시 치료 순서를 보장하고, 전사할 경우 부양가족에게 같은 배급을 한 계절 동안 지급합니다. 경계나 수송 중에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 합니다.”
“한 계절 뒤에는요?”
“현재 비축량으로는 그 이상을 확약하기 어렵습니다.”
강무진은 대장간 굴뚝을 보았고 그 너머로 곡물 창고의 낮은 지붕이 보였다. 무기는 늘고 있었지만 곡식은 쇠처럼 다시 녹여 만들 수 없었다.
“두 계절로 잡으십시오.”
로젠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그렇게 하면 겨울 비축분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외곽 농기구 수리를 우선하겠습니다. 개간용 쟁기와 괭이 생산도 늘리죠.”
“무기 생산량이 줄어듭니다.”
“화로 하나를 생활 도구 전용으로 돌리겠습니다. 아이샤와 견습들이 맡을 수 있습니다.”
로젠은 곧바로 답하지 않고 장부 빈칸에 몇 줄을 적으며 계산했다.
“가능합니다. 다만 목탄 배급을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
“도리아와 이야기하겠습니다.”
라칸이 팔짱을 꼈다.
“싸우다 죽은 뒤 먹을 걸 정해 놓으면 겁이 없어지나?”
강무진은 대열을 보았고 몇몇은 로젠의 장부를, 몇몇은 라칸을 보고 있었다.
“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뒤를 덜 돌아보게는 할 수 있습니다.”
라칸의 손이 무심코 손목을 스쳤고 소매 아래에는 노예 낙인의 흉터가 남아 있었으나, 그는 곧 손을 내리고 대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들었지? 이름 올렸다고 군인이 되는 건 아니다. 대신 이름 올린 놈은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다.”
라칸이 목검으로 땅의 선을 두드렸다.
“오늘부터 전투조는 열 명 안팎으로 나눈다. 예비조도 정식 전투조와 묶어서 같은 신호를 익혀. 종족끼리 몰려 서는 것 없다. 빠진 자리는 같은 조가 메운다. 도망치면 조 전체가 쫓아간다.”
누군가 작게 물었다.
“잡아서 처벌합니까?”
라칸은 그쪽을 보았다.
“살려서 데려온다.”
“또 도망치면요?”
“또 데려와.”
“계속 그러면요?”
“계속.”
라칸은 목검을 어깨에 걸쳤다.
“적한테 끌려가는 거랑 제 발로 도망치는 건 다르지만, 둘 다 되찾아 와야 할 우리 쪽 사람이야. 처벌은 살아 돌아온 뒤에 한다.”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강무진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라칸이 정한 규율이었다. 광산에서 사슬에 묶여 있던 자가 이제 다른 이들을 묶지 않는 군율을 세우고 있었다.
라칸은 훈련장 기둥에 전리품처럼 걸려 있던 끊어진 쇠고랑 하나를 내려 장부 옆에 놓았다.
“이건 우리 군율에 없다.”
대열 뒤쪽에서 목덜미의 흉터를 감추던 사람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도망친 자도 되찾고, 명령한 자는 이름을 남긴다. 병사만 책임지는 군대는 만들지 않는다.”
로젠이 장부 첫 장을 펴서 탁자 끝으로 밀었다.
“지휘관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라칸이 깃펜을 노려보았다.
“내가 글씨 못 쓰는 거 알잖아.”
“이제 배워야 합니다.”
“칼 잡는 법이면 충분해.”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남겨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명령의 책임도 물을 수 있습니다.”
라칸의 귀가 앞으로 섰다.
“책임?”
“병사는 이름을 올리는데 지휘관만 이름을 남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라칸은 한동안 로젠을 보다가 깃펜을 낚아채듯 집었고 잉크가 손가락에 묻었다.
“어디다 쓰면 되는데.”
로젠이 빈칸을 짚었다.
라칸은 혀끝을 살짝 내민 채 획을 그었고 첫 글자는 지나치게 컸고 둘째 글자는 옆 칸을 침범했으며, 마지막 획에서는 종이가 조금 찢어졌다.
라칸.
삐뚤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라칸이 펜을 내려놓았다.
“됐나?”
“첫 서명으로는 충분합니다.”
“두 번은 안 해.”
“내일 지급 명령서에도 하셔야 합니다.”
“젠장.”
대열에서 웃음이 터졌고 이번에는 라칸도 막지 않은 채 이를 드러내며 대원들을 훑었다.
“웃을 힘 남았으면 방패 들어.”
예비 무기를 가져온 대원들이 돌아오자 라칸은 잉크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전열 신호를 올렸다.
“전진!”
서른여덟 개의 방패가 처음으로 같은 순간 들렸다. 짧은 다리는 빨라지고 긴 다리는 보폭을 줄였으며, 광산에서 도망칠 때마다 서로를 밀치던 사람들은 이제 옆 사람의 빈틈을 먼저 메웠다. 대열은 두 번 흔들렸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라칸의 삐뚤어진 서명 아래에서 군율이 실제 움직임이 됐다.
해 질 무렵 정식 전투조와 예비조, 경계·수송·공병 인원의 배치가 확정됐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손바닥 표식을 남겼고 발톱 자국과 세 손가락의 흔적도 같은 장부에 올랐다. 로젠은 세부 배급표와 무기 번호를 서기들에게 넘겼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로젠은 서기들을 먼저 돌려보냈다. 라칸이 대원들의 방패를 정리하러 가고 주변이 조용해진 뒤에야,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얇은 가죽 서류철을 꺼냈다.
안에는 강철보루와 서쪽 국경을 잇는 길이 그려져 있었고, 그 끝에는 왕관 문양이 찍혀 있었다.
“레던 왕국으로 가려 합니다.”
강무진이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원을 청하러 말입니까?”
“병력, 식량, 의약품. 무엇이든 받아 와야 합니다. 지금 숫자로는 선봉은 막아도 본대는 어렵습니다.”
로젠은 지도 위 왕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다만 저들이 우리를 무엇으로 볼지가 문제입니다. 마을인지, 용병단인지, 국경을 멋대로 차지한 무장 집단인지.”
“우리가 누구인지는 여기 사람들이 압니다.”
“외교에서는 남이 무엇이라 부르는지도 중요합니다.”
바람이 장부의 귀퉁이를 넘기자 근무 명부의 백마흔두 이름과 그 아래 거주자 명부까지, 모두 이백두 개의 이름과 표식이 잠깐 드러났다가 다시 덮였다.
훈련장에서는 라칸이 마지막 방패를 무기 선반에 걸고 있었고, 대장간에서는 아이샤가 견습들과 함께 저녁 불씨를 정리했다. 방벽 위로는 서로 다른 종족의 경비병들이 교대하고 있었다.
이미 많은 것이 갖춰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한마디로 부를 이름은 아직 없었다.
로젠이 서류철 맨 앞의 문서를 내밀었고 지원 요청서 아래에는 보루 대표자의 인장을 찍을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저들은 가장 먼저 물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강철보루가 대체 어느 나라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하느냐고.”
강무진은 빈 인장 자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새길 문양도, 내세울 왕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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