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13화 미행(尾行)

마당에 남은 세 사람 사이로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검붉은 도를 찬 사내가 사라진 담장 너머에는 밤안개만 희미하게 떠돌았지만, 풍의 귓가에는 도와 주먹이 부딪치던 굉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괜찮으냐, 단풍아.”

현허의 물음에 풍은 얼얼한 팔을 천천히 굽혔다 폈고 뼈가 상한 듯한 통증은 없었으나 검붉은 도를 찬 사내의 도에 실렸던 힘이 속살 깊은 곳에서 웅웅 울렸다.

“견딜 만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정말 강했습니다. 기가 뻗어 나오는 길을 보았는데도 끝을 놓쳤어요.”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그 두려움 아래에는 처음 느끼는 열기가 끓고 있었다. 산을 떠나기 전까지 풍이 아는 강함이란 사나운 멧돼지를 맨손으로 밀어내고 가파른 절벽을 단숨에 오르는 정도였지만, 검붉은 도를 찬 사내의 도는 그보다 훨씬 크고 깊은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

현허는 풍의 두 팔을 차례로 짚어 기혈을 살핀 뒤 검붉은 도를 찬 사내가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뼈와 근맥에는 큰 이상이 없구나. 다만 저자의 도법은 마음에 걸린다.”

“마공 때문입니까?”

“마기는 분명했으나 힘을 잇고 흘리는 결에 정파무공의 흔적이 섞여 있었어. 오래전 어디선가 본 듯도 하다만, 지금은 확언할 수 없겠구나.”

풍은 검붉은 도를 찬 사내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칼끝을 비껴 내던 모습을 떠올렸다. 누구의 명을 받고 누구를 노렸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고, 아영이 나타난 뒤에도 그녀에게는 도를 돌리지 않았다. 적이라 부르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칼을 맞댄 상대를 믿을 수도 없었다.

그때 아영이 성큼 다가와 풍의 뺨을 거칠게 닦았고 소매 끝에 피가 묻자 그녀의 눈썹이 바짝 치켜올라갔다.

“바보야. 혼자 막아 서면 어떡해?”

“아영이 뒤에 있었잖아.”

“그래서 네가 다치면 나는 좋아할 줄 알았어?”

풍이 멋쩍게 웃자 아영은 더 꾸짖으려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검을 쥔 손이 아직 희게 질린 것을 본 풍은 가슴이 뜨끔했으나, 미안하다는 말보다 먼저 북쪽 장원의 지하가 떠올랐다. 독에 취해 수레로 끌려간 일곱 사람이 지금도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서둘러야 합니다.”

풍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수레에 실린 사람은 일곱이었습니다. 지하로 옮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언제 다른 곳으로 보내질지 모릅니다.”

현허는 곧장 객잔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과 창을 닫고 방음용 기막을 펼치는 동안 아영이 종이와 먹을 가져왔고, 풍은 자신이 확인한 후문과 수레가 사라진 돌계단, 중앙 전각과 서편 비탈의 위치를 빠르게 그렸다.

“네 기척을 알아챘다면 경비부터 바꿨을 게다. 같은 길로 서두르면 포로를 옮기거나 독을 터뜨릴 수도 있어.”

현허의 말에 풍은 당장 담을 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아영은 약식 지도를 살피다 지하의 북쪽 벽에 붓끝을 댔다.

“사람을 몰래 넣고 빼는 통로가 따로 있지 않을까요?”

“정문과 후문의 경비가 저 정도라면, 포로를 눈에 띄지 않게 옮길 다른 길이 있을 겁니다.”

풍의 관찰과 아영의 추측이 맞물리자 현허는 장원 둘레에 원을 그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바깥에서 움직임을 살핀다. 납치자들이 나타나면 뒤를 밟고, 통로가 열리면 안쪽 갈림길까지 함께 들어간다. 거기서 내가 경비를 떼어 낼 테니 단풍이는 갇힌 이들의 기맥과 독의 흐름을 찾고, 아영은 해독약을 나누며 퇴로를 표시하거라.”

풍은 금빛 반지가 끼워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힘이 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요?”

현허는 풍의 손목 위 세 혈도를 짚었다.

“기운을 완전히 누르지 말고 이쪽으로 나누어 흘려라. 터지는 순간을 늦춘 뒤 독항아리와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벌려야 한다.”

짧은 계획이 정리되자 세 사람은 남은 밤을 번갈아 지키며 몸을 쉬었다.

동이 틀 무렵 세 사람은 짧게 눈을 붙였다. 낮이 되자 일부러 짐을 챙겨 객잔을 나섰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남쪽 고개를 넘어간다고 말한 뒤 노하촌 어귀를 벗어났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조사를 포기한 것처럼 보여야 했다.

큰길을 따라 한 시진가량 걸은 세 사람은 산굽이를 돌아 숲으로 들어갔다. 풍은 나무와 바위를 표지 삼아 북쪽으로 길을 틀었고,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도착했다.

전날과 달리 장원 담장 위에는 무사가 둘씩 붙었고 회랑을 도는 경비도 늘었다. 풍이 몸을 숨겼던 서편 비탈의 나뭇가지도 모조리 잘려 은신할 자리가 사라져 있었다. 검누런 독기가 담장 안을 엷게 감싸고 있는 가운데, 몇몇 무사는 코와 입을 천으로 가린 채 독항아리를 지하 쪽으로 옮겼다.

“정말 경비가 늘었네요.”

아영이 숨죽여 말하자 현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입구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독까지 더 들여놓는구나. 우리가 사람들을 구하러 올 것을 예상한 모양이다.”

풍은 두 눈에 기를 모아 장원 안을 살폈다. 지하에 갇힌 이들의 기맥은 땅과 벽에 가려 선명하지 않았으나, 전날 보았던 희미한 맥동이 아직 남아 있었다. 다만 동쪽 별채에서는 검붉은 도를 찬 사내가 남긴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내는 장원 안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방심하지 마라. 기척을 숨겼을 수도 있으니.”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동안 세 사람은 장원을 오가는 자들을 지켜보았다. 정문으로는 약재를 실은 수레 한 대가 들어갔지만 나오는 사람은 없었고, 북쪽 외벽 주변에는 경비가 유난히 드물었다. 빈틈처럼 보였으나 현허는 오히려 그곳을 오래 바라보았다.

“일부러 비워 둔 냄새가 나는구나.”

“함정일까요?”

“아니면 숨겨진 출입구를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더 가까이 가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어둠이 내려앉자 장원 곳곳에 등불이 밝혀졌다. 세 사람은 산등성이를 내려와 마을과 장원 사이의 잡목숲에 몸을 숨겼으며, 현허가 나누어 준 해독환을 입 안 깊숙이 물었다. 풍은 호흡을 낮추고 장원 안의 기맥을 하나씩 살폈다.

경비들은 전날보다 자주 교대했고, 지하 입구 주변에는 일류에 가까운 기운을 지닌 자가 셋이나 붙어 있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이길 수는 있어도 독항아리까지 지키며 포로들을 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결국 아영이 짐작한 별도 통로를 찾아야 했다.

밤이 깊어지던 무렵, 장원 북쪽의 어둠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흙과 덩굴로 덮인 비탈 일부가 안쪽으로 열리며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이 두 눈에 기를 끌어올리자 그들의 허리춤에 달린 독낭이 선명해졌다. 사내들은 주변을 세밀히 살핀 뒤 서로 다른 민가 쪽으로 흩어졌다.

“숨겨진 통로가 맞았군.”

현허가 바람보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

풍은 당장 그 입구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통로 안쪽에 어떤 장치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밖으로 나온 자들이 새 포로를 데려간다면, 되돌아갈 때 경계와 함정의 위치까지 드러낼 가능성이 컸다.

한참 뒤, 민가 쪽으로 사라졌던 그림자들이 다시 나타났다. 각기 한 사람씩 등에 업고 있었으며, 축 늘어진 몸의 코와 입가에는 풍의 눈에만 보이는 검누런 독기가 엉겨 있었다.

아영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현허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다시 자세를 낮췄고, 풍 역시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눌렀다. 지금 뛰쳐나가면 눈앞의 두 사람은 구할 수 있겠지만, 지하 깊은 곳에 갇힌 이들과 통로의 비밀을 놓칠 수 있었다.

풍은 끌려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조금만 견뎌 주십시오. 이번에는 전부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납치자들이 숨겨진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허는 손가락 셋을 모아 계획 변경 신호를 보냈다. 열린 문이 닫히기 전에 함께 통로를 넘고, 내부 갈림길에서 자신이 경비를 떼어 내겠다는 뜻이었다.

검은 옷의 사내들은 축 늘어진 사람들을 업고도 거친 비탈을 거침없이 올랐다. 앞선 자가 덩굴 아래로 손을 밀어 넣자 낮은 돌 마찰음과 함께 흙벽처럼 보이던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희미한 등불이 드러난 틈으로 사내들이 차례로 들어갔다.

마지막 사내가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 현허가 손을 들어 풍과 아영을 멈춰 세웠다. 사내의 시선이 세 사람이 엎드린 수풀을 천천히 훑었다. 풍은 숨을 죽인 채 금빛 반지의 기운까지 눌렀고, 이윽고 상대가 안으로 사라졌다.

비밀문이 닫히기 직전 현허가 바람처럼 비탈을 가로질렀다. 아영이 뒤를 따르고 풍도 열린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등 뒤에서 문이 맞물리자 바깥의 달빛은 가느다란 선으로 줄어들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회차 끝 13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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