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12화 야습(夜襲)

북쪽 골목 끝으로 스쳐 간 검붉은 옷자락은 눈 깜짝할 사이 어둠에 녹아들었고 풍은 반사적으로 뒤쫓으려다 발을 멈췄다. 간밤에도 수상한 자를 혼자 쫓을 뻔했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현허와 아영에게 약속한 참이었다.

“저자입니다. 어제 주점에서 본 마교인.”

풍이 목소리를 낮추자 현허는 골목 끝을 살폈고, 아영은 검자루에 손을 얹은 채 뒤편 지붕과 닫힌 창문들을 훑었다.

“은빛 반지는?”

“저자가 아니라 북쪽 산자락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방향은 같지만 더 멀어요.”

현허는 잠시 생각한 뒤 빠르게 역할을 나누었다.

“단풍이는 반지의 방향과 저자의 기맥을 함께 좇아라. 아영은 뒤를 살피고, 나는 우리 셋의 기척을 누르마. 이상을 느끼면 즉시 알리되 혼자 앞서지는 말거라.”

세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검붉은 옷자락을 뒤따랐다. 밤의 노하촌은 낮과 전혀 다른 곳처럼 고요했으며, 집집마다 빗장이 걸린 골목에는 마른 흙과 썩은 약초 냄새만 떠돌았다.

젊은 사내는 지붕을 밟거나 담을 넘지 않고 그늘만 골라 나아갔는데도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풍은 검붉은 마기의 끝을 놓치지 않으려 기맥시에 힘을 더했지만, 은빛 반지가 전하는 기운의 결까지 더듬다 보니 이마에 금세 땀이 맺혔다.

마을 어귀에 이르렀을 때 현허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앞쪽 산길에서 수레바퀴가 젖은 흙을 짓누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무 그늘 아래 몸을 낮춘 풍이 기맥시에 집중하자 어둠 속에서 여러 갈래의 흐름이 떠올랐다. 수레 위에는 혼절한 듯 가늘어진 기운 일곱이 포개져 있었고, 그 주위를 검누런 독기를 두른 사내 넷이 에워싸고 있었다.

거적을 높이 쌓은 짐수레가 산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에 거적 한 귀퉁이가 들리며 사람의 손이 축 늘어진 채 드러나자, 뒤따르던 사내가 주위를 살피고는 그 손을 거칠게 밀어 넣었다.

풍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현허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살아 있다.”

현허의 전음이 귓속을 울렸다.

“지금 나서면 배후를 놓친다. 독도 당장 목숨을 끊는 종류는 아닌 듯하니, 끌려가는 곳부터 확인하자꾸나.”

풍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고 수레 위의 기운은 가늘어도 곧 끊어질 만큼 위태롭지는 않았다. 앞쪽 어둠에서는 검붉은 옷자락의 사내도 속도를 늦춘 채 수레를 지켜보고 있었으나, 납치자들과 만나려는 것인지 그들의 뒤를 밟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레가 굽은 산길로 들어섰을 때 아영이 등 뒤를 가리켰고 마을 쪽에서 기척 둘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하나는 지붕을 타고, 다른 하나는 숲 가장자리를 훑는 움직임이 수레 호위대가 남겨 둔 감시자들 같았다.

현허는 자신과 아영이 뒤를 막을 테니 풍에게 수레를 놓치지 말라는 손짓을 보냈다.

“장원의 위치와 출입구만 확인한 뒤 신호를 기다려라. 들키면 싸우지 말고 돌아와야 한다.”

혼자 모든 일을 떠맡는 것과 역할을 나누는 것은 달랐고 풍은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몸을 낮춰 수레를 좇았다.

산길 반대편의 검붉은 기운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고 멀어진 것이 아니라 거칠던 마기를 한순간에 가라앉힌 듯했다. 기맥시에 지나치게 의지하지 말라는 현허의 가르침을 떠올린 풍은 수레바퀴 자국과 나뭇가지의 흔들림까지 함께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자락 사이로 높은 담장이 모습을 드러냈고 낮에 이야기를 들었던 북쪽 장원이 분명했다. 겉보기에는 큰 약초상의 창고와 살림채를 합쳐 놓은 곳 같았으나, 담 위와 지붕 아래에는 무기를 지닌 자들이 촘촘히 숨어 있었다.

후문이 열리자 수레가 안으로 들어갔고 문지기는 거적을 들춰 사람 수를 헤아렸고, 수레를 몰고 온 사내는 허리춤에서 작은 나무패를 꺼냈다.

“일곱입니다. 둘은 노하촌 약초꾼이고, 나머지는 남쪽 촌락에서 골랐습니다.”

“독은 제대로 들었느냐?”

“내일 정오까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문지기는 검은 이리 문양이 새겨진 나무패를 살핀 뒤 장원 안쪽을 턱짓했다.

“지하로 옮겨라. 장로께서 흠집을 내지 말라 하셨다.”

풍은 담 아래 어둠에 붙어 수레의 행로를 좇았고 후문을 지난 수레는 안채 옆을 돌아 뒤편 돌계단으로 내려갔으며, 지하 입구에는 무사 셋이 버티고 있었다. 장원 안에 다른 포로가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끌려온 일곱의 위치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은빛 반지가 한층 또렷하게 떨렸다.

반지가 가리키는 곳은 지하가 아니라 장원 중앙의 큰 전각이었고 금빛 반지까지 왼손 검지를 묵직하게 잡아당기자 풍은 숨을 죽였다. 서로 다른 박자로 맥동하는 두 반지가 손가락을 전각 쪽으로 잡아끄는 듯했다.

자취를 감췄던 검붉은 기운이 전각 앞에서 다시 떠올랐다. 후문의 무사들은 젊은 사내를 보고도 무기를 들지 않았으나, 그중 하나가 피에 젖은 오른쪽 소매를 유심히 살폈다. 사내와 장원 무사들 사이에는 한패에게 기대할 만한 느슨함이 없었다.

풍은 물러날 때라고 판단했지만 철수 신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전각 안으로 사내가 들어가자 반지의 떨림이 거칠어졌고, 담 바깥 서편 비탈에서는 창문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풍은 소나무 가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내공을 귀로 모았다.

“……열리기 전에…… 반지부터…….”

낮은 말이 바람에 잘려 들려온 직후 탁자가 넘어지고 등불이 꺼졌고 검붉은 기운이 크게 일렁이자 경비들이 전각으로 몰렸고, 서편 회랑이 잠시 비었다.

풍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싸늘한 도끝이 목덜미에 닿았고 어느새 빠져나온 젊은 사내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지금 담을 넘으면 지하의 사람들부터 죽는다.”

풍이 고개를 돌리자 사내의 찢어진 붕대 아래로 피가 흘렀고 전각 안에서 상처가 더 벌어진 모양이었다.

“지하에 일곱이 있습니다. 언제 옮깁니까?”

“내일 정오 전. 그 뒤에는 여기서 찾지 못한다.”

“어디로 보냅니까?”

사내는 답하지 않은 채 발끝으로 돌멩이를 차냈다. 돌이 반대쪽 수풀을 때리자 경비들이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고, 전각에서 나온 무사 하나만 이쪽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사내는 풍의 멱살을 잡아 바위 그늘로 밀어 넣었고 침입자를 붙든 것처럼 보였으나, 세운 도신은 경비의 시야에서 풍을 가리고 있었다.

“왜 저를 숨겨 줍니까?”

“네 손의 것이 주인을 지키는지, 주인을 끌고 다니며 사람을 죽이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걸 알아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확인되지 않으면 지하도, 네 일행도 한꺼번에 넘겨진다.”

누구에게 넘긴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고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사내는 바위턱을 도로 내리쳤고, 굉음과 함께 돌가루가 솟았다.

“서쪽으로 갔다.”

그가 차갑게 명령하자 무사들은 무너진 비탈 쪽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한 사람은 떠나기 전 피 묻은 소매와 빈 바위 그늘을 번갈아 보았고 사내가 풍을 빼돌리기 위해 발각될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숲 아래에서 올빼미 울음이 두 번 짧게 들렸고 현허의 철수 신호였다.

풍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지하의 일곱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고 사내가 열어 준 반대편 틈으로 빠져나오자 뒤에서 장원 무사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 피는 어디서 난 것이오?”

대답 대신 짧은 파공성이 울렸고 누군가의 칼과 도가 부딪친 듯했으나 풍은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할 일은 얻은 정보를 가지고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숲 아래에서 현허와 아영을 만났을 때 검붉은 기운은 이미 장원의 반대쪽 담을 넘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 사내가 저를 발견했지만 경비를 다른 쪽으로 돌렸습니다. 내일 정오 전에 지하의 사람들을 옮긴답니다. 제 반지를 확인하겠다며 객잔으로 갈 듯한 말을 했어요.”

현허의 표정이 굳었다.

“반지를 미끼 삼아 너를 부르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객잔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먼저 가서 피하게 해야 합니다.”

현허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추격을 끊고 뒤따르마. 아영은 서쪽 지름길로 가서 사람들을 깨워라. 단풍이는 먼저 가되 맞서는 것보다 대피를 우선하거라.”

풍은 산길을 내달렸고 아영의 기척은 도중에 서쪽으로 갈라졌고, 현허는 뒤쪽의 추격자들을 막느라 거리가 벌어졌다. 젊은 사내의 경공은 훨씬 빨라 검붉은 기운이 벌써 마을 가까이 이르러 있었다.

객잔 담을 넘어선 풍은 사람들을 모두 피하게 할 틈을 얻지 못했다.

마당 한가운데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현허가 쓰던 닫힌 방문이었고, 검붉은 마기는 도신을 타고 창호를 향해 뻗어 가고 있었다. 처마 밑에서는 아영이 깨운 손님 둘이 뒷문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멈추십시오!”

풍이 방문 앞을 막아서자 사내의 시선이 두 반지를 차례로 훑었다.

“시간이 없다.”

“무슨 수작인지는 몰라도 사람을 향해 칼을 들게 두지는 않겠습니다.”

도가 허공을 갈랐다. 칼끝은 풍과 그 뒤의 창호를 한꺼번에 노리는 듯했으나, 풍이 양손으로 도신을 비껴 내는 순간 사내의 손목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검붉은 도기가 방문 대신 빈 처마 끝을 후려쳤다.

충격은 거짓이 아니었다. 팔을 타고 어깨 깊숙이 파고든 힘에 풍의 뼈마디가 얼얼해졌고, 한 박자 늦게 터진 바람이 창문들을 사납게 흔들었다. 사내의 기운은 칼끝에서 수없이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모였으며, 정파의 운기와 거친 마공이 한 몸 안에서 맞물린 듯한 흐름이었다.

사내가 도를 되감자 풍은 몸을 낮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가슴을 치는 대신 상처 입은 팔꿈치 아래의 기맥을 눌러 궤도를 틀었지만, 도자루가 어깨를 스치며 묵직한 통증을 남겼다. 검붉은 도기는 마당의 빈 물통을 쪼개고 땅에 박혔다.

“장원에서는 저를 놓아주고 여기서는 칼을 휘두르는군요. 대체 누구를 속이는 겁니까?”

풍의 물음에도 사내는 입을 다문 채 도를 뽑아 올렸다.

세 번째 공격과 함께, 도에 맺힌 살기를 읽은 풍의 손끝으로 거대한 힘이 차올라 왼손 검지를 타고 팔을 뻣뻣하게 당겼다. 그 힘이 미처 가늘어지기도 전에, 은빛 반지는 반대편 손가락에서 북쪽으로 그를 잡아당겼다. 두 흐름이 동시에 밀려들자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대로 내보내면 눈앞의 사내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당 너머에는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객잔 주인과 손님들이 있었으며, 뒤편 회랑에서는 아영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풍은 반보 옮겨 방문을 등으로 가리고 솟구친 힘을 양팔과 발밑으로 나누어 흘렸다.

쿵!

흙바닥이 움푹 꺼졌다. 팔 안쪽이 찢어질 듯 아팠고 멈추지 못한 칼끝이 뺨을 얕게 갈랐으나, 검붉은 도기는 창호를 벗어나 처마 모서리에 박혔다.

“쓸 수 있는 힘을 왜 누르지?”

“누른 게 아닙니다.”

풍은 얼얼한 팔로 도신을 밀어내며 사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쓸 곳을 제가 정한 겁니다.”

찰나의 정적을 깨며 옆방 문이 열렸다.

“단풍아!”

아영이 겉옷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마루로 뛰쳐나왔고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고, 사람들을 내보내느라 거친 숨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사내의 시선이 아영에게 옮겨 가자 풍은 즉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그 앞을 가렸다.

들려 있던 도는 아영에게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당 밖의 기척을 확인하듯 칼끝이 잠깐 흔들렸고, 사내의 굳은 얼굴에는 장원에서 따라붙은 자들을 경계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때 현허가 반대편 담장을 넘어 들어왔고 차림은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소매 끝에는 검은 피가 묻어 있었다. 현허는 풍의 찢어진 소매와 뺨의 상처를 살핀 뒤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거기까지 하시게.”

현허가 마당에 발을 내딛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풍의 눈에는 평소 잔잔한 물처럼 잠겨 있던 내공이 거대한 산맥처럼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요란하게 뻗어 나오지 않았는데도 마당을 휘젓던 검붉은 마기가 밀려났고, 처마 끝의 풍경마저 소리를 잃었다.

사내는 도를 거두지 않은 채 현허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섯 걸음의 거리밖에 없었지만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으며, 맞부딪친 기운 탓에 마당의 모래가 가늘게 떨렸다.

현허의 눈매가 좁아졌다.

“마기를 품고도 힘을 잇는 결은 정파의 것이로군. 누구의 명을 받고 왔는가?”

사내는 답하지 않았다. 풍의 두 손과 꺼진 흙바닥, 사람이 없는 곳에 남은 도흔을 차례로 살피던 그는 먼 골목에서 다급한 휘파람이 두 번 이어지자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지가 네 선택보다 앞서지는 않는군.”

“그걸 확인하려고 객잔까지 온 겁니까?”

“오늘 밤 죽을 사람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지하의 일곱을 넘기지 마십시오.”

사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고 그는 현허와 아영, 풍을 차례로 본 뒤 한 걸음 물러섰다.

“정오 전이다.”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리자 검붉은 옷자락이 달빛을 갈랐다. 담장을 넘은 신형은 장원에서 온 듯한 기척들과 반대 방향으로 치달았으며, 잠시 후 밤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풍은 뒤쫓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객잔에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남아 있었고, 북쪽 장원 지하에는 독에 취한 일곱이 갇혀 있었다. 호기심 때문에 그 둘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긴장이 풀리자 도를 받아 낸 두 팔이 떨려 왔고 뺨에서는 뜨거운 피가 흘렀고 풍은 먼저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창호를 겨눈 듯했던 도흔은 모두 사람이 없는 바깥쪽으로 비껴 있었으며, 마지막 자국은 자신이 온전히 막아 내기 전부터 서까래 모서리를 향해 휘어 있었다.

사내는 장원에서도 발각될 위험을 감수해 경보를 돌렸고, 객잔에서는 사람을 베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를 믿을 수는 없었다. 지하의 포로들이 안전해진 것도 아니었고 정오까지 남은 시간도 길지 않았다.

풍은 북쪽 산등성이를 한 번 바라본 뒤 현허에게 돌아섰다.

“어르신, 후문으로 들어간 수레는 안채를 돌아 뒤편 돌계단으로 내려갔습니다. 지하 입구에는 무사 셋이 있었고, 끌려간 사람은 일곱입니다.”

회차 끝 12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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