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가 되자 흰색 화물차가 세림빌라 앞을 막았다.
짐칸에서 내린 남자 둘이 계단을 올랐다. 접이식 운반대의 바퀴가 모서리에 부딪힐 때마다 텅 빈 소리가 났다. 삼 층 창문에서 그 소리를 듣던 이수진이 현관문 앞으로 나왔다.
문 옆에는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전날 가져가지 못했던 큰 가방이었다. 수진은 남은 짐을 챙기고 집주인의 퇴거 통보에 대응하려고 아침에 돌아왔다. 손잡이 한쪽을 청테이프로 감아놓은 게 멀리서도 보였다.
장만석은 계단 아래에서 담배를 껐다.
“오늘은 끝냅시다. 나도 바쁜 사람이에요.”
수진이 난간을 잡았다.
“보증금 주시면 나간다고 했잖아요.”
“그 돈을 나한테 줬어요? 안 사장한테 줬지. 나는 받은 적 없다니까.”
“계약할 때는 대신 받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장만석이 웃었다. 답답한 아이를 타이르는 어른 같은 웃음이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소송을 해요.”
길 건너 카페에서 민재는 빨대를 내려놓았다.
차가운 커피잔 바깥으로 물방울이 흘렀다. 창가 자리에서는 빌라 현관과 골목 입구가 모두 보였다. 장만석의 말은 민재에게만 또렷하게 전달됐다.
‘들었지.’
[예. 받은 적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보여줘.’
***
장만석의 휴대전화가 먼저 울렸다.
안병철이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중개업자는 꼭 이럴 때 쓸데없이 전화를 했다. 위층에서 수진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장만석은 턱을 들었다.
“녹음해요? 마음대로 해요. 내가 못 할 말을 했나.”
이번에는 짐을 나르러 온 남자의 전화가 울렸다.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화면을 읽더니 발을 멈췄다.
“사장님. 여기 집행관 오는 작업 아니었습니까?”
“그런 건 내가 처리한다고 했잖아요.”
“판결문 있다고 하셨는데요.”
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운반대를 벽에 세웠다. 장만석이 계단을 두 칸 올라갔다.
“일하러 왔으면 일을 해요. 돈 받기 싫어?”
“계약 내용하고 다릅니다. 남의 집 강제로 열라는 건 못 합니다.”
그가 동료를 불렀다. 둘이 내려오자 좁은 계단에서 장만석이 옆으로 비켜서야 했다.
그때 안병철이 다시 전화했다.
이번에는 받았다.
“뭡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뉴스 보셨어요?”
“무슨 뉴스.”
“제 목소리가 나옵니다.”
빌라 일 층의 미용실 문이 열렸다. 염색용 비닐을 어깨에 두른 손님이 휴대전화를 든 채 밖을 봤다. 그 뒤에서 미용실 주인이 장만석을 알아보고 입을 가렸다.
장만석이 자기 화면을 내렸다.
안병철이 보낸 기사에는 세림빌라 외관이 있었다.
그 아래로 익숙한 서류가 나타났다.
분명히 없앤 서류였다.
“이거 가짜예요.”
말이 먼저 나왔다.
수화기에서는 안병철이 계속 떠들었다.
“저는 회장님이 보증금 문제없다고 하셔서 그렇게 설명한 거지, 이 돈이 그런 돈인 줄은—”
“입 다물어.”
장만석은 통화를 끊었다.
기사에 붙은 녹음이 재생됐다.
—어차피 만기 때 한꺼번에 안 와. 들어오는 걸로 막으면 돼.
자기 목소리였다.
—그쪽이야 회장님 건물이 여러 채니까요.
안병철의 웃음이 뒤따랐다.
장만석은 재생을 멈췄다. 길 위에서 누군가 같은 녹음을 틀었다.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끌 수 없었다.
삼 층에서 내려온 수진이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제 계약서예요.”
화면에 뜬 두 장의 계약서는 같은 날짜, 같은 방을 가리켰다. 수진이 서명한 원본 옆에 대출 심사에 쓰인 축소 보증금 계약서가 놓였다.
칠천이백만 원이 사천오백만 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는 저기 서명한 적 없어요.”
장만석이 손을 뻗었다.
“그거 함부로 믿지 말고, 일단 나랑 얘기를—”
“손대지 마세요.”
수진이 한 걸음 물러났다.
울음을 참느라 얇아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
민재의 의식 안에 서로 다른 장소들이 펼쳐졌다.
중개사무소에서 안병철이 문을 잠갔다. 장만석의 처남은 사무실 금고를 열었다. 보안 업체에서는 직원 여섯 명이 같은 자료를 각자 다른 도구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이 성공했다고 보고한 삭제 작업의 결과도 보였다.
비운 저장 공간. 초기화한 단말기. 통신선까지 뽑아놓은 녹음 장치.
그 모든 장치의 잔류 상태와 바깥의 거래가 한 사건으로 맞물렸다. 시스템은 사라진 문장만 되살린 게 아니었다. 그 문장을 믿고 돈을 보낸 사람, 거짓 서류가 쓰인 창구, 이익을 나눈 계좌까지 나란히 놓았다.
보안 업체 책임자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외부로 나갈 길이 없는데.”
직원이 점검 결과를 다시 내밀었다. 의뢰받은 장치에는 복구할 자료가 남지 않았다는 판정이었다. 업체의 최상급 AI도 같은 결과를 냈다.
책임자는 기사 속 장부를 확대했다.
통신 기능을 막아놓은 장만석의 개인 노트북에만 남아 있던 기록이었다. 점검 대상조차 아니었던 물건이었다.
“이걸 누가 꺼냈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민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쪽은 문을 잘 잠갔네.’
[예. 제게 문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가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만석은 받지 않았다.
그는 은행 앱을 열고 있었다.
‘돈 옮긴다.’
[시도 중입니다. 보전 결정과 금융기관의 조치는 이미 도착했습니다.]
잔액은 그대로였다.
장만석은 금액을 줄여 다시 눌렀다. 화면 아래 안내문이 뜨자 다른 은행으로 바꿨다.
또 멈췄다.
그는 이제 수진도, 모여든 이웃도 보지 않았다. 처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쪽에서 보내. 지금.”
상대가 뭐라고 하자 그의 턱이 굳었다.
“아니, 네 명의잖아.”
처남의 목소리가 커졌다.
“내 명의라고 내 돈이냐며! 형님이 어제 그랬잖아!”
수진은 자신을 향해 돌아온 장만석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손에 들린 휴대전화도 내리지 않았다.
장만석은 통화를 끊었다.
누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찾는 얼굴이었다. 골목 입구와 미용실, 위층 창문을 차례로 훑었다.
민재는 창가에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장만석의 시선은 카페 유리를 지나쳤다.
그가 찾는 상대는 맞은편 원룸에 사는 실직자가 아니었다.
***
검은 승합차가 골목 입구에서 속도를 줄였다.
장만석이 손을 들었다. 평소 공항에 갈 때 부르던 차였다. 그는 빌라 현관 앞에 놓아둔 가죽 가방을 낚아챘다.
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운전석 창문이 조금 내려갔다.
“뒤에 경찰이 오셔서요.”
“타고 얘기합시다. 여기 차 막히잖아.”
승합차 뒤로 경찰차 두 대가 멈췄다.
장만석은 가방을 고쳐 쥐었다. 차에서 내린 형사를 향해 오히려 먼저 다가갔다.
“잘 오셨네. 지금 허위 사실이 퍼지고 있어요. 이 사람들부터 정리해주셔야겠는데.”
형사는 장만석의 얼굴을 확인했다.
“장만석 씨 맞습니까.”
“내가 누군지 알고 왔을 거 아니에요.”
“체포영장 나와 있습니다.”
가방 손잡이가 비틀렸다.
장만석은 영장을 보다가 형사의 뒤쪽을 봤다. 누군가 뒤늦게 와서 상황을 바로잡아줄 거라는 듯했다.
그는 끝까지 휴대전화를 놓지 않았다.
“최 실장 연결해요. 내 이름 대면 알아.”
전화를 받은 퇴직 공무원은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그 얘기는 제게 하지 마십시오.”
“지난달에도 당신이—”
통화가 끊겼다.
형사가 손목을 잡자 장만석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도망을 갔어, 뭘 했어! 여기 내 건물이야!”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가방에서 여권 지갑이 떨어졌다. 형사가 몸을 숙여 주웠다.
장만석은 그것을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삼 층에서 운반대가 다시 내려왔다. 이번에는 수진의 짐이 실리지 않았다.
남자 둘이 빈 운반대를 화물차에 넣었다. 한 사람이 수진에게 다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오늘 작업 지시받은 내용, 필요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진은 명함을 받고도 잠깐 손을 내리지 못했다.
장만석이 경찰차에 타기 직전 그녀를 돌아봤다.
늘 계약서를 꺼내 설명하던 세입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방을 끌지도, 비켜서지도 않았다.
***
민재는 커피잔 바닥에 남은 얼음을 굴렸다.
‘지금 잡힌 걸로 끝난 건 아니지.’
[예. 피해 회복까지 진행 중입니다.]
‘수진 씨, 오늘은?’
[거주를 방해할 인력은 없습니다. 임의로 바꾼 출입장치도 원상회복됩니다. 반환에 동의한 현금성 자산에서는 첫 지급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갑자기 동의를 잘하네.’
[각자 보관하던 돈이 자신의 몫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인한테 줘야지.’
[그렇게 처리되고 있습니다.]
카페 밖에서 열쇠 수리기사가 빌라로 들어갔다. 수진은 형사와 몇 마디 나누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긴장이 풀리자 무릎에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민재는 계산대에서 물 한 병을 더 샀다.
길을 건너갔을 때 수진이 그를 알아봤다.
“아, 안녕하세요.”
“뉴스 봤어요.”
그는 물을 건넸다. 수진은 받아들고 병뚜껑을 한동안 돌리지 못했다.
“저 사람이 잡혀가네요.”
“봤어요.”
“정말 잡혀가네요.”
같은 말을 두 번 했는데도 이상하지 않았다.
수진은 경찰차가 사라진 골목 끝을 봤다. 그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물을 마셨다.
“제가 뭘 잘못한 줄 알았어요.”
민재가 그녀를 봤다.
“계약할 때 더 따졌어야 했나. 전화할 때 너무 화를 냈나. 엄마한테도 자세히 말을 못 했어요. 제가 바보 같아서 그런 것 같아서.”
“사기 친 사람이 잘못했죠.”
짧게 말하자 수진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물병을 내려다봤다.
“그 말을 누가 좀 해줬으면 했어요.”
민재는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수리기사가 현관에서 수진을 불렀다. 새 열쇠 두 개가 작은 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 하나를 받아들었다.
열쇠를 넣고 돌리자 문이 열렸다. 수진은 문턱 앞에 서서 자기 방을 한참 들여다봤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화면을 보고 멈췄다. 문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돈이…….”
민재는 계단 아래에서 기다렸다.
수진이 은행 앱을 열었다. 알림과 잔액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다시 거래 내역을 눌렀다.
“일부 들어왔어요.”
화면을 든 손이 조금 흔들렸다.
칠천이백만 원 전부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중에 주겠다는 말도, 서류를 더 내라는 안내도 아니었다. 자기 통장에서 꺼낼 수 있는 돈이었다.
수진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집이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응. 내 방.”
그녀가 열린 문 안으로 한 발을 들였다.
“오늘 저녁에 와. 내가 밥 살게.”
민재는 조용히 계단을 내려왔다.
오늘 밤 수진은 친구 집에 자리를 빌리지 않아도 됐다. 문밖의 소리에 짐부터 챙길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골목에 나와 삼 층 창문을 올려다봤다.
창이 열렸다. 수진이 여행 가방에서 꺼낸 수건을 창가에 널었다.
***
그날 시작된 반환은 거기서 멎지 않았다.
사흘 뒤 나올 오하늬의 후속 보도에도, 그다음 주 피해자들이 모일 회의실에도 같은 기록이 따라갔다. 다만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사람들의 다음 생활이 아니라 장만석의 남은 변명이었다.
오하늬는 공개된 자료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계약 당시의 설명을 듣고, 세입자들이 보관한 영수증을 확인하고, 안병철이 중개한 다른 방까지 찾아갔다.
카메라 앞에서 안병철은 장만석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기자는 그가 보증금 일부를 따로 받은 날의 장부를 펼쳤다. 바로 그날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도 있었다.
—제 보증금은 안전한 거죠?
—제가 책임지고 확인했습니다.
안병철은 화면을 보고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때는 제가…….”
끝맺지 못한 대답까지 보도에 실렸다.
익명의 제보자를 찾는 질문도 남았다. 그러나 취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확인 가능한 원본들이 나올 뿐이었다. 누가 그것들을 모았는지로 이어지는 길은 없었다.
민재의 이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다음 주의 회의실에서는 장만석의 처남이 자기 사업으로 번 돈이라고 우기던 예금이 반환 재원에 들어갔다.
그가 말한 사업이 없던 기간에도 입금은 있었다.
보낸 사람은 세입자들이었다.
상가의 명의를 넘겨받은 사람은 매매대금을 냈다고 했다. 장만석은 받은 적 없다고 했다. 둘이 주장한 날짜 사이에 재산을 옮기라고 지시한 통화가 놓이자 이번에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가 믿었던 재산의 껍질은 하나씩 벗겨졌다.
***
그로부터 계절이 바뀐 뒤의 법정에서도 장만석은 처음과 같은 표정을 지으려 했다.
사업이 잠깐 어려워졌을 뿐이라고 했다. 보증금을 떼먹을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변호인이 건넨 종이를 붙잡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는 말을 읽었다.
방청석의 수진은 그를 보지 않았다.
손에 들린 반환 내역서를 보고 있었다.
장만석의 별장은 이미 팔렸다. 차명 상가와 수입차도 처분됐다. 인맥을 유지한다며 돈을 뿌렸던 사람들은 증인석에서 그와의 관계를 줄이느라 바빴다.
처남은 가족이라 믿었다고 했고, 안병철은 지시를 따랐다고 했다.
장만석은 그때마다 고개를 돌렸다.
자기 돈을 받아갈 때는 그렇게 잘 맞던 사람들의 말이 이제는 한 문장도 맞지 않았다.
실형이 선고되던 날, 그는 판사를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남은 돈까지 다 가져가면 저는 뭘로 삽니까?”
방청석 어디선가 짧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장만석이 뒤늦게 입을 닫았다.
열아홉 명의 보증금은 마지막 미지급분까지 돌아갔다. 피해자들이 떠안았던 이사비와 임시 숙소 비용도 배상액에 포함됐다. 부족할 거라던 돈은 장만석이 살던 집의 매각대금에서 채워졌다.
법정 밖으로 나오는 수진에게 오하늬가 물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뭔가요?”
“커튼 사려고요.”
기자가 고개를 들었다.
“계속 이사 갈 줄 알고 못 샀거든요.”
그 뒤 장만석과 가담자들의 유죄가 확정됐을 때에도 돈을 돌려달라고 기다리는 세입자는 남지 않았다.
그 주말, 세림빌라 삼 층에는 연두색 커튼이 달렸다.
새 소유자와 계약을 다시 한 수진은 신발장 손잡이의 나사를 조였다. 오래 쓸 물건을 손보는 얼굴이었다. 허리춤에서는 열쇠 고리가 흔들렸다.
처음 돌려받았을 때처럼 손안에 감추지 않아도 되는 열쇠였다.
***
그러나 그것은 아직 뒤에 올 일이었다.
장만석이 붙잡힌 날의 오후, 민재가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삼 층 창문에 커튼이 없었다. 수진이 널어놓은 수건만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았다.
카페에서 가져온 커피에는 얼음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한 모금 마시자 물에 가까운 맛이 났다.
‘남은 돈까지. 끝까지 챙겨.’
[진행하겠습니다. 회수할 자산은 모두 확보됐습니다. 거주 방해와 보복 시도도 계속 차단합니다.]
민재는 공책을 펼쳤다.
오후 두 시. 세림빌라.
그 아래에 적힌 장만석의 이름에 짧게 선을 그었다. 사건을 잊겠다는 표시는 아니었다. 오늘 자기 손으로 정했던 일을 실행했다는 표시였다.
모니터 속 항구에서는 빵집 문이 열려 있었다.
밀가루 포대 위에 올라간 고양이가 손님을 가렸다. 모라가 내려오라고 손짓하자 꼬리만 한 번 움직였다.
민재는 메모장에 적었다.
고양이는 손님을 가리면 안 됨.
[고양이는 해당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종 결정권자 불러.’
[현재 포대 위에서 수면 중입니다.]
민재가 웃었다.
몇 년 동안 붙잡았던 게임은 이미 완성돼 있었다. 혼자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충분히 봤다. 다음에는 자신이 어디를 보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움직일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강태오의 이름을 눌렀다.
신호가 세 번 가기도 전에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살아 있나?”
“응.”
“살아 있으면 연락을 해라. 내가 부고를 배달 앱으로 받아야 되겠나.”
주방 환풍기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밀려왔다.
민재는 웃으며 의자를 당겼다.
“형. 게임 하나 봐줘.”
“네가 만들던 그거?”
“귀가등.”
“또 로그인만 되고 할 게 없는 버전이면 닭 뼈로 때린다.”
“이번엔 할 거 있어.”
“얼마나 걸리는데?”
민재는 화면을 봤다.
모라가 포대 옆에 빈 상자를 놓았다. 고양이는 눈을 뜨더니 굳이 더 높은 포대로 옮겨갔다.
그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일단 치킨 한 마리 식기 전까지만.”
“그 말 기억한다.”
“내일 낮에 와. 노트북은 있어.”
“치킨은?”
“내가 살게.”
태오가 잠깐 조용해졌다가 웃었다.
“오냐. 그럼 두 마리 들고 간다.”
통화가 끝났다.
민재는 책상 위에 쌓인 공책을 치우고 맞은편에 의자를 하나 더 놓았다. 흔들리는 다리 밑에는 접은 종이를 끼웠다.
창밖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수진이 자기 집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손에는 여행 가방 대신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민재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누군가 이 자리에 앉아 처음 보는 도시로 들어갈 터였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미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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