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5화 흐름을 읽는 눈

이튿날 아침, 풍은 처마 밑에서 지저귀는 산새 소리에 눈을 떴다. 무저갱에서는 잠들기 전과 깨어난 뒤의 어둠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창호지 너머로 번지는 빛만 보아도 아침임을 알 수 있었다. 낯선 천장과 반듯하게 덮인 이불을 한동안 바라보던 풍은 손가락부터 확인했다.

금빛 반지는 잠잠했고, 은빛 반지는 여전히 북쪽을 향해 희미한 맥박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밤새 현허가 둘러놓은 경계실이 눈에 들어왔다. 끊어진 곳은 없었으며 숲에서도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북쪽 능선 너머에는 잿빛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반지가 가리키는 것이 그 너머의 사람인지, 독인지, 죽음의 흔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어났으면 세수부터 해. 죽 다 식겠다.”

문밖에서 아영의 목소리가 들렸고 풍이 대답하려는 사이 발소리는 벌써 부엌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마당의 찬물로 얼굴을 씻고 방에 들어가자 작은 상 위에 흰쌀죽과 장아찌가 놓여 있었다. 아영은 자기 그릇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고, 현허는 펼쳐 놓은 천 조각 위에서 어젯밤의 검은 가시를 살피고 있었다. 가시 둘레에는 약재를 빻은 가루가 둥글게 뿌려져 있었다.

“앉거라. 독은 밥을 먹고 보아도 달아나지 않는다.”

풍이 자리에 앉자 아영이 죽그릇을 내밀었고 퉁명스러운 표정과 달리 풍의 그릇에만 잣가루가 한 숟갈 더 얹혀 있었다.

“제가 먹어도 됩니까?”

“그럼 구경하라고 차렸겠어?”

풍은 나무숟가락으로 죽을 떠 입에 넣었고 부드럽게 풀어진 쌀알 사이로 고소한 잣 냄새가 번졌고, 뒤이어 은근한 소금기가 혀끝에 남았다. 지난밤에도 따뜻한 밥을 먹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 끓인 음식을 받는 일은 또 다른 느낌이었고 물을 긷고 불을 지핀 손길이 죽 한 그릇에 고스란히 남은 듯해, 목 안쪽이 까닭 없이 뻐근해졌다.

“왜 그렇게 천천히 먹어? 맛없어?”

“아닙니다.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아영이 눈을 깜빡였다.

“죽이 뭐가 아까워?”

“따뜻해서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고 대신 장아찌 접시를 풍 쪽으로 밀어 놓고는 제 죽만 휘휘 저었다. 현허도 말없이 검은 가시를 천으로 덮었다.

식사가 끝난 뒤 세 사람은 마당으로 나왔다. 현허는 검은 가시를 집게로 들어 햇빛에 비춰 보더니, 물에 적신 흰 종이 위로 독을 아주 조금 긁어 냈다. 누르스름하던 종이가 삽시간에 검붉게 변했다.

“혈맥을 굳히는 독이다. 양은 적어도 사람 하나를 죽이기에는 충분하지.”

“어디서 쓰는 독입니까?”

“재료만 놓고 보면 변경에서도 구할 수 있다. 하나 이처럼 여러 독성이 서로를 잡아먹지 않도록 섞으려면 상당한 솜씨가 필요해. 평범한 산적이나 사냥꾼의 물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현허는 독침을 다시 싸서 작은 나무함에 넣었고 이어 풍에게 손을 내보라 한 뒤 은빛 반지 가까이로 함을 가져갔다.

반지가 나직이 떨렸다.

풍이 손가락을 움츠리자 북쪽을 향하던 미약한 당김이 독침 쪽으로 틀어졌고 나무함을 멀리하니 방향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

“독을 좇는 것 같습니다.”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현허는 나무함을 아영에게 들려 동쪽으로 걷게 했다. 풍의 손가락은 잠시 함을 따라 움직였지만, 아영이 마당 끝을 지나자 북쪽에서 전해지는 당김이 한층 강해졌다. 서로 다른 두 줄이 손가락 안쪽을 잡아끄는 듯해 풍은 미간을 좁혔다.

“둘 다 느껴집니다. 가까이 있는 독침과 북쪽의 무언가가 따로 있습니다.”

“그 무언가도 같은 독일 수 있겠군.”

“아니면 독에 당한 사람일 수도 있고요.”

풍의 말에 아영의 걸음이 멎었고 그녀는 손안의 나무함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양가촌 근처에서 사라졌다는 사람들 말이야. 설마 그 사람들에게 이 독을 쓴 건 아니겠지?”

현허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고 나무함을 받아 든 손가락으로 뚜껑을 한 차례 두드린 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확인되지 않은 짐작으로 움직이면 찾을 사람도 놓치고 기다리는 덫에도 빠지기 쉽다. 우선 풍의 반지가 무엇에 반응하는지부터 알아보자꾸나.”

두 반지를 살피기에 앞서 현허는 몇 가지 조건을 정했고 억지로 빼지 않을 것, 반지 안으로 내공을 주입하지 않을 것, 풍이 이상을 느끼면 즉시 손을 뗄 것. 전날 산에서 반지가 외부 기운을 튕겨 냈던 만큼 작은 시험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은빛 반지의 표면을 건드렸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약초 달인 물과 해독분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도 마찬가지였으나, 독침이 든 함을 가까이하자 은빛 무늬 사이로 가느다란 기운이 흘렀다.

“내 기운을 네 몸 안에 넣지는 않겠다. 손목 가까이에서 흐르게만 할 테니 무엇이 보이는지 말해 보거라.”

현허가 두 손가락을 세우자 푸른빛을 띤 가느다란 기운이 그 끝에 모였고 풍의 눈에는 맑은 물줄기 같은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기운이 손목 한 치 앞에서 원을 그리자, 풍은 그 결을 마주 읽어 보려 제 기운을 아주 조금 끌어올렸다.

“멈추십시오.”

현허가 손을 물린 것과, 풍이 끌어올린 힘이 걷잡을 수 없이 넘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금빛 파문이 허공을 때렸다.

둥글게 밀려난 먼지가 마당을 한 바퀴 쓸었고, 현허는 소매를 휘둘러 기세를 흘렸지만 뒤에 놓인 물동이까지 지키지는 못했다. 항아리 표면에 금이 가며 물이 가느다란 줄기로 새어 나왔다.

아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된 거예요?”

“저도 막지 못했습니다.”

풍은 깨진 물동이로 다가가 손바닥으로 금을 막았다. 무저갱에서는 바위를 쪼개지 않고 밀어내고, 달려드는 산짐승의 뼈를 상하게 하지 않은 채 쓰러뜨리는 법을 익혔다. 하지만 그때 조절해야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스려야 하는 힘은 그때와 견줄 수 없이 크고 거칠었다. 실오라기만큼만 내보내려 해도, 마당의 물동이 하나조차 성히 남겨 두지 못할 만큼 넘쳐흘렀다.

“제 힘은 아직 제가 원하는 만큼 가늘게 줄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힘을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다루는 법부터 익혀야겠지.”

현허는 깨진 물동이를 살피며 수염을 쓸었다.

“살아 있는 상대와 손을 맞대 보면 물건에 대고 하는 것보다 힘을 훨씬 섬세하게 거둘 수 있을 게다. 물건만 들이대서는 익히기 어렵겠구나.”

“사람을 상대로 해 봐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맞아 봐야 안다는 소리는 아니다. 네 힘을 어디까지 가늘게 거둘 수 있는지 차근차근 가늠해 보자는 게지.”

대문가에 서 있던 아영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허리에 손을 얹었다.

“대련하면 되잖아요.”

풍이 그녀를 바라보자 눈썹이 곧장 치켜 올라갔다.

“왜? 내가 약해 보여?”

“그게 아니라, 다칠 수 있습니다.”

“어제 내 손목을 낚아채서 사람을 자루처럼 끌어당긴 건 누구였더라?”

풍은 대꾸하지 못했고 독가시를 피하게 하려던 일이었지만 아영을 바닥에 주저앉힌 것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현허는 잠시 생각한 뒤 마당 한복판에 나뭇가지로 원을 그렸다.

“좋다. 다만 규칙을 정하마. 아영은 목과 눈, 명치를 노리지 말고 내공도 삼 할 이상 쓰지 말거라. 풍은 반격하지 말고 원 밖으로 밀어내거나 손목을 잡는 것만 허락하겠다.”

풍이 원 안으로 들어서자 아영도 겉옷을 벗어 마루 난간에 걸었고 소매를 단단히 묶는 얼굴에서는 아침의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발을 벌린 폭은 반듯했고 앞손으로 얼굴을 지키면서 뒷손의 움직임을 감추는 모양도 제법 익숙해 보였다.

풍이 눈에 힘을 주자 아영의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이 가슴과 어깨를 거쳐 팔로 뻗었다. 발끝에도 옅은 흐름이 모였기에 어느 쪽이 먼저 움직일지 훤히 보였으나, 보인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팔에 모인 기운은 미끼일 수 있었고, 주먹을 내다가 멈출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영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었다.

“시작해.”

현허의 말이 떨어지자 아영이 바닥을 찼고 앞손이 풍의 턱을 향해 곧게 뻗어 왔고, 풍은 주먹이 닿기 전에 손목을 붙잡았다. 힘을 거의 쓰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아영의 몸은 갑자기 멈추며 어깨가 크게 흔들렸고 그녀가 통증을 참듯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놀라 손을 놓는 순간, 발뒤꿈치가 풍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아프지는 않았으나 아영의 발끝을 마주 받아넘기려는 순간 손끝에 실린 힘이 대련에 쓰기엔 터무니없이 컸고, 그것을 알아챈 풍은 주먹을 등 뒤로 감추며 다급히 외쳤다.

“잠깐!”

아영이 두 걸음 물러났고 금빛 기운은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지만 풍의 발밑 흙이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었다.

마당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계속할 수 있겠느냐?”

현허가 묻자 풍은 대답하는 대신 아영의 오른쪽 어깨부터 살폈고 그녀는 잡혔던 손목을 뒤로 감추고 있었으며, 그 주변의 기맥은 희미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보다 손목은 괜찮습니까?”

“괜찮아. 이 정도로 호들갑 떨지 마.”

“기운이 막혔습니다. 오른팔을 올리면 아플 겁니다.”

아영이 시험하듯 팔을 들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알면서 그렇게 세게 잡았어?”

“세게 잡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부터 틀린 거잖아.”

옳은 말이었고 풍은 산짐승의 몸이 얼마나 질기고 어느 관절을 밀어야 다치지 않은 채 균형을 잃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은 달랐고 속이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며, 자존심 때문에 아픈데도 다시 달려들었다. 힘의 흐름만 읽고 마음의 움직임을 놓친다면 해치지 않으려던 손이 도리어 상처를 만들 수 있었다.

풍이 원 밖으로 나가려 하자 아영이 물었다.

“어디 가?”

“오늘은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아직 사람과 겨룰 준비가 안 됐습니다.”

“내 손목 하나 잡고 겁먹은 거야?”

“손목 하나라서 멈추는 겁니다. 다음에는 하나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영은 입을 다물었고 풍은 현허가 자신을 말릴 것이라 생각했으나, 현허는 수염 끝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그만두는 것도 선택이다. 다만 지금 물러나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알아도, 고칠 기회는 얻지 못하겠지.”

풍의 발이 멎었다.

“아영의 공격을 주먹과 발로만 보지 말거라. 숨이 달라지는 때와 시선이 머무는 곳, 다친 팔을 감추는 몸짓까지 모두 움직임의 일부다. 네 눈에 기맥이 보인다면 거기에 기대고 싶겠지만, 사람은 기운이 흐르는 대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니라.”

풍은 손목이 아픈데도 발을 내질렀던 아영을 떠올렸고 기운의 길은 보았으나 그녀가 내린 선택까지 읽지는 못했다.

“한 번만 더 하겠습니다.”

아영은 손목을 주무르면서도 원 안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또 날려 버리면 네가 물동이 새로 만들어.”

“원래부터 금이 갔습니다.”

“말대꾸하지 말고.”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 것을 보고서야 풍은 어깨의 힘을 풀었다.

두 번째 대련에서 아영은 다친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 채 천천히 거리를 좁혔고 풍의 눈에는 왼발로 모이는 기운이 보였으나, 그녀의 시선은 금빛 반지에 붙어 있었다. 풍이 한 걸음 물러나자 아영은 예상보다 깊이 들어와 오른손으로 소매를 잡았고, 팔꿈치를 당기는 순간 왼발로 흙을 걷어 올렸다.

먼지가 시야를 덮었다.

기맥의 빛이 흐려진 틈으로 아영이 몸을 낮춰 옆으로 파고들었고 풍은 눈으로 쫓는 대신 소매를 잡은 손의 떨림과 발밑으로 전해지는 무게를 느꼈다. 그녀가 오른쪽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같은 방향으로 따라 돌자, 아영의 힘은 허공으로 흘렀다.

풍은 그녀의 허리 뒤에 손바닥을 대되 밀지는 않았다. 방향만 막자 아영이 스스로 멈출 곳을 잃고 비틀거렸으며, 원 밖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옷깃을 가볍게 붙잡아 세웠다.

“잡아 세우면 어떻게 해? 밖으로 보내야 네가 이기는 건데.”

아영은 숨을 고르며 불평했으나 표정은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넘어지면 다시 다칠 것 같았습니다.”

“봐주지 말랬잖아.”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풍이 현허를 바라보자 현허가 낮게 웃었다.

“내 말을 제법 잘 써먹는구나.”

아영은 새침하게 돌아섰지만 풍이 내민 손을 피하지 않았다. 풍이 막힌 기맥 주변에 손끝을 가볍게 대자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으나 풍의 손끝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아영에게 위협이랄 것이 없음을 진작 읽은 그는, 기맥의 흐름보다 먼저 그녀가 접촉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현허가 다가와 풍의 손목을 살폈다.

“아까보다 힘을 훨씬 곱게 거두는구나. 네 마음을 따라 주는 구석이 생긴 모양이다.”

“아직 마음껏 곱게 거두지는 못합니다.”

“하루 만에 길들일 수 있었다면 고대의 기물이라 부르지도 않았겠지.”

이번에는 현허가 풍의 맞은편에 섰다. 그의 기운은 잔잔하지만 넓었으며, 팔과 다리 어디에도 힘이 몰리지 않은 채 몸 전체가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져 있었다. 기맥을 보고도 첫 수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대는 처음이었다.

풍이 조심스럽게 먼저 나아갔다. 주먹을 닿기 전에 멈출 생각이었으나 현허는 반 보 비껴나며 소매로 팔등을 스쳤고, 힘을 옆으로 흘린 뒤 빈틈을 내주지 않았다. 빠르지는 않은데도 풍이 닿으려는 자리에는 매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세 번째로 손을 뻗은 순간, 현허의 손바닥이 풍의 가슴을 향했다. 살기도 위압감도 없었으나 기운은 무겁고 정교했으며, 풍은 그 결을 손끝으로 고스란히 읽어 냈다.

풍은 손끝에 실리려는 힘을 실오라기만큼만 남기고 현허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손목을 꺾지 않고 팔꿈치에 손끝만 대어 흐름을 위로 밀자 현허의 장력은 허공을 향했고, 풍의 다른 손은 노인의 가슴 한 치 앞에서 멈췄다.

그 순간 현허의 두 손가락도 풍의 목젖 앞에 와 있었다.

둘은 동시에 손을 거두었다.

“제가 진 겁니까?”

“서로 죽일 생각이었다면 둘 다 편히 끝나지는 못했겠지.”

현허는 소매를 털며 물러섰고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내 움직임이 보였느냐?”

“기운이 흐르는 길은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디로 움직이실지 알 수 없었지만, 아영과 겨루면서 숨과 눈, 발이 땅을 누르는 모양까지 함께 봐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것만으로 내 변초를 읽었다고?”

풍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전부 읽은 건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일부러 길을 열어 주신 것 같습니다.”

현허의 눈매가 가늘어졌고 그는 풍의 손가락에 낀 두 반지와 마당에 남은 발자국을 차례로 살핀 뒤 나직이 말했다.

“네 눈이 보는 것을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왜입니까?”

“강호에는 뛰어난 재주를 귀하게 여기는 자만큼이나 빼앗거나 없애려는 자도 많기 때문이다. 상대의 기맥을 읽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너를 탐내는 문파가 생길 것이며, 제 무공이 간파될까 두려워하는 자도 나타나겠지.”

풍은 북쪽을 향해 가늘게 뛰는 은빛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혼자 떠난다면 누가 뒤를 밟는지, 마주친 이가 도움을 청하는지 아니면 덫으로 이끄는지 제대로 가려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몰랐다.

“반지에 관한 기록은 며칠 더 찾아보마. 그동안 오늘 익힌 것을 되짚으면—”

“며칠보다 오래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현허의 걸음이 멎었고 아영도 찬물에 적신 천을 손목에 대다 말고 풍을 쳐다보았다.

“저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다시는 한곳에 갇히고 싶지 않아서 무저갱을 나왔고, 어제까지만 해도 반지의 일을 알아내면 바로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풍은 갈라진 마당과 금이 간 물동이, 아영의 붉어진 손목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과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것은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힘을 조절하지 못해 아영을 다치게 했고, 지키려다가 아영의 선택을 믿지 못했습니다. 혼자였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아영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끼어들지 않았다.

“반지를 다스리는 법만이 아니라 사람과 겨루는 법, 강호에서 누구를 믿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싶습니다. 북쪽의 일도 외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떠날 때를 남이 정하게 두지 않고, 스스로 준비되었다고 판단할 때까지 배우고 싶습니다.”

현허는 한동안 풍을 바라보았고 깊어진 눈가에 여러 감정이 스쳤으나 풍은 그 뜻까지 읽을 수 없었다. 잠시 후 현허가 수염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고자 하는 자를 내칠 만큼 이 집이 좁지는 않다. 다만 내 가르침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지루하고 고될 게다.”

“무저갱에서 다섯 해를 견뎠습니다.”

“허허, 내 잔소리는 무저갱보다 깊을 수도 있느니라.”

곁에서 듣던 아영이 벌떡 일어났다.

“뭐어? 쟤가 더 있는다고요?”

놀란 목소리와 달리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으며 풍과 눈이 마주치자 아영은 서둘러 표정을 굳히고 다친 손목을 내밀었다.

“그럼 물동이부터 고쳐. 내 손목도 네가 낫게 해 놓고.”

“물동이는 제 힘이 깼는데요.”

“그 힘이 네 손에서 나왔잖아.”

풍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기울 무렵, 풍은 약을 바른 천으로 아영의 손목을 감아 준 뒤 금이 간 물동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새는 물은 비웠지만 갈라진 틈은 생각보다 길었고, 손가락으로 표면을 더듬을 때마다 낮에 튀어나온 금빛 기운이 지나간 자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영은 한 손으로 물동이를 붙들면서도 매듭이 너무 단단하다느니 흙이 묽다느니 잔소리를 보탰다.

“풍아, 잠시 들어오너라.”

방 안에서 들려온 현허의 목소리에 풍은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섰다. 문턱을 넘자 등잔불이 작은 상 위를 비추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끝을 무디게 간 침 하나가 놓여 있었다.

회차 끝 5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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