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반지는 북쪽 산등성이를 향해 나직이 맥동하고 있었다.
도망친 자의 기척이 사라진 뒤에도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풍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반지 표면의 흐릿한 무늬가 물결처럼 천천히 꿈틀거렸으며, 손가락 안쪽을 파고든 저릿한 기운은 손목까지 번져 왔다. 무저갱을 나온 뒤 반지가 저절로 움직인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선명하게 한쪽을 가리킨 것은 처음이었다.
현허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언가 느껴지느냐?”
“저쪽으로 가라고 재촉합니다.”
“도망친 자를 좇으라는 뜻이더냐?”
풍은 곧장 답하지 않고 북쪽 능선을 살폈다. 소나무와 바위가 겹친 숲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나 눈에 힘을 모으자, 희미한 기운의 흔적이 어둠 속 실오라기처럼 드러났다. 현허의 것처럼 크고 안정된 흐름은 아니었고 가늘고 끊어질 듯한 자취 곳곳에 검푸른 빛이 묻어 있었는데, 나무를 썩게 한 독침과 닮은 기운이었다.
자신과 현허가 맞부딪치는 모습을 엿본 자였다. 풍의 몸이 외부의 기운에 반응해 힘을 토해 낸 광경까지 보았다면, 그자는 단순히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알리러 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마을에 그림자를 끌어들일 수 없어 등을 돌렸는데, 그 그림자는 이미 자신의 뒤를 밟고 있었다.
“쫓아가 보겠습니다.”
풍이 발을 떼려 하자 현허가 팔을 들어 앞을 막았다.
“저자가 혼자라고 누가 장담하느냐?”
“놓치면 다시 올 겁니다.”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지. 네가 빠르다는 것은 보았다만, 강호의 추적은 발재간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달아나는 자가 남긴 길에는 흔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덫도 놓여 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빛 반지가 세게 떨렸다. 저릿한 기운이 팔꿈치 가까이 치솟자 풍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고, 무저갱에서 반지가 수련을 강요하던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뛰라면 뛰어야 했고 부수라면 부숴야 했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겨도 살아남으려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 위에 하늘이 있었으며 어느 길로 갈지 스스로 정할 수 있는데 영문도 모른 채 다시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풍은 굽혔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반지가 시킨다고 무작정 가지는 않겠습니다. 따라갈지는 제가 보고 정하겠습니다.”
은빛 반지는 불만을 드러내듯 한 차례 더 맥동했고 풍이 북쪽으로 나아가지 않자 현허는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앞선다. 세 장 이상 떨어지지 말고, 이상한 냄새가 나면 숨부터 멈추거라.”
“제가 뒤에 서기로 한 조건도 지켜 주십시오.”
“이 판국에도 꼼꼼하구나.”
현허가 쓴웃음을 흘리며 먼저 산등성이로 몸을 날렸고 그 나이가 무색할 만큼 가벼운 움직임이었으며, 소매가 솔가지를 스칠 때조차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풍은 바구니의 끈을 조여 매고 바로 뒤를 따랐고 아니, 따라가는 척해야 했다.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현허의 등을 훌쩍 앞지를 듯해 걸음마다 힘을 눌러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흔적을 찾기 어렵지 않았고 달아난 자는 마음이 급했던지 마른 솔잎을 헤치고 지나갔고, 부드러운 흙에는 발끝이 깊게 찍혀 있었다. 현허는 발자국을 밟지 않은 채 그 옆을 움직이면서 꺾인 가지와 눌린 이끼를 차례로 살폈고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으나 걸음에는 망설임도 없었다.
풍은 땅보다 나무 사이의 허공을 보았고 검푸른 잔흔은 실처럼 이어졌다가 바람 속에서 흩어졌으며, 능선을 넘을수록 빛깔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발자국은 그보다 더 깊고 뚜렷해졌다.
잠시 뒤 현허가 주먹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앞에는 너비가 두 길 남짓한 얕은 골이 놓여 있었으며 바닥에는 낙엽이 두껍게 쌓였고, 건너편 바위에 걸린 검은 천 조각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발자국은 몸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골짜기 아래로 곧장 이어져 있었다.
현허가 허리를 굽혀 작은 돌 하나를 집었다.
“잘 보거라.”
돌이 낙엽 위에 떨어지는 순간, 양쪽 수풀에서 쉭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가느다란 검은 침들이 돌 주위를 빗발처럼 꿰뚫었으며, 침 끝이 닿은 낙엽에서는 누런 연기가 피어올랐다. 풍은 코끝까지 밀려온 비린 냄새를 맡자마자 숨을 멈췄다.
“독침 덫이군요.”
“발자국이 지나치게 깊었지. 도망치며 남긴 것이 아니라 따라오라고 새긴 흔적이다.”
현허는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골 양옆을 살폈다. 은빛 반지는 여전히 건너편을 향했고 검푸른 자취도 그쪽으로 이어졌지만, 풍은 그 당김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반지가 무엇을 느끼는지 모르는 이상 위험을 찾는 것인지, 위험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려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골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의 굵은 가지가 건너편까지 뻗어 있었으며 풍이 그쪽을 바라보자 현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곳에도 손을 써 두었을 수 있다.”
풍은 뛰어오르는 대신 눈에 힘을 모았고 나무를 따라 오르는 생기가 희미한 빛으로 드러났고, 그 사이에 바늘처럼 검은 선 하나가 끼어 있었다. 가지 아래로 팽팽하게 걸린 실이었고 누군가 밟으면 끊어지면서 또 다른 독침을 쏟아 낼 터였다.
“아래쪽 가지에는 실이 있습니다. 그 위로 가겠습니다.”
풍은 실에서 멀리 떨어진 줄기를 골라 발끝으로 땅을 밀었고 몸이 새처럼 솟구쳐 나무줄기를 한 번 밟았고, 다음 순간에는 골 건너편 바위 위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힘을 다 눌러 움직였는데도 거리가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뒤따라 건너온 현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신법은 누가 가르쳤느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물어본 내가 잘못했구나. 다만 조금 천천히 가거라. 늙은이가 체면을 지킬 틈은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말과 달리 현허의 숨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풍은 입가를 살짝 풀었다가 오른쪽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 사이로 억눌린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바위 뒤에서 검푸른 흐름 한 줄기가 거칠게 요동쳤고, 달아나던 자는 더 움직이지 않은 채 몸을 낮추고 있었다.
기다리는 자의 호흡이었다.
풍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자 현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현허는 왼쪽 숲으로 스며들어 바위 뒤편의 퇴로를 막았고 풍은 정면에 남았다. 상대가 던질 독침의 방향을 읽으려면 시야를 가리는 것보다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풍은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세 걸음.
두 걸음.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바위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고 얼굴을 천으로 가린 중년 사내였다. 사내는 풍과 눈이 마주치자 주저하지 않고 손목을 털었고, 소매 안에서 세 줄기 검광이 번뜩였다.
독침이 날아오기 전에 사내의 기운부터 보였고 어깨에서 팔꿈치로, 다시 손목으로 흘러내린 힘이 세 갈래로 나뉘며 각기 다른 높이를 겨누었다. 풍은 몸을 반 발 비틀어 첫 침을 흘리고 손바닥으로 두 번째 침의 옆면을 쳐 냈으며, 마지막 하나는 허리를 젖혀 피했다. 검은 침이 가슴을 비껴 등에 멘 바구니 가장자리에 박혔다.
사내는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러나 퇴로 위에는 어느새 현허가 서 있었다.
“누가 보냈느냐?”
현허의 물음에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고 눈동자만 빠르게 좌우로 굴리던 그는 허리춤에서 짧은 칼을 뽑더니, 현허가 아니라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풍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고 손끝에서 튕겨 나간 기운이 칼등을 때리자 짧은 칼이 사내의 손을 벗어나 바위에 부딪쳤다. 하지만 칼을 막은 순간, 사내가 뿜어낸 살기를 읽은 풍이 그 손을 쳐 내려 내지른 힘은, 미처 가늘게 줄이기도 전에 거대하게 부풀어 사내의 가슴으로 쇄도했다.
이대로 닿으면 죽는다.
풍은 이를 악물고 팔을 틀었고 단단히 뭉친 기운은 말을 듣지 않고 되돌아오려 했으나, 어깨를 낮추며 힘의 방향을 옆으로 밀어 냈다. 금빛 파문이 사내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 바위를 후려쳤다.
굉음이 산허리를 흔들었다. 사람 키만 한 바위가 안쪽에서 터지며 파편을 쏟아 냈고, 현허는 소매를 펼쳐 사내 쪽으로 튀는 돌조각을 막았다. 풍 역시 사내의 목덜미를 붙잡으려 했지만 부풀어 오른 힘을 비트는 데 쓰인 찰나가 너무 길었다.
사내의 턱이 움직였다.
딱.
작고 단단한 것이 어금니 사이에서 깨지는 소리였다.
“뱉어라!”
현허가 달려들어 사내의 턱을 움켜쥐었으나 검은 피가 천 아래로 먼저 흘렀고 사내의 몸이 한 차례 크게 떨리더니 무릎부터 힘없이 꺾였다. 현허가 그를 땅에 눕히며 가슴과 목의 혈도를 빠르게 짚는 동안, 풍은 곁에 앉아 몸속의 흐름을 살폈다.
심장으로 모이던 빛이 무서운 속도로 탁해졌다. 목에서 가슴으로 퍼진 검은 기운은 혈맥을 타고 사방으로 번졌으며, 현허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잠시 멎는 듯하다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풍은 손을 내밀었다가 멈추었고 두 반지는 부러진 자신의 뼈와 찢어진 살을 되살렸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일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현허의 기운을 걷어 냈던 힘을 사내에게 넣었다가 남은 숨마저 끊을 수 있었다.
“살릴 수 없습니까?”
현허는 몇 군데 혈도를 더 눌렀으나 손끝 아래의 맥은 돌아오지 않았다.
“혓바닥 밑에 독환을 숨겨 두었다. 심맥까지 퍼졌구나.”
사내의 손이 흙 위에서 굳어 갔고 풍은 그 손과 멀리 튕겨 나간 칼을 번갈아 보았다. 부풀어 오른 힘을 누르는 데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손목부터 제압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턱이 움직이기 전에 막았을지도 몰랐다.
남을 죽이지 않으려고 힘을 비틀었는데도 눈앞의 사람은 죽었다. 산짐승은 살기 위해 덤볐고 물러날 길을 열어 주면 대개 떠났지만, 사람은 붙잡히지 않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허가 말한 강호는 무공을 지닌 자들이 은혜와 원한을 주고받는 곳이라 했다. 그러나 풍에게는 제 목숨까지 입막음에 쓰는 이 선택이 더 낯설고 두려웠다.
현허가 얼굴을 가린 천을 벗겼다. 볼에 불에 덴 듯한 흉터가 있는 낯선 중년인이었고, 목 아래에는 문신을 지운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아는 자입니까?”
“얼굴은 처음 본다.”
현허는 천을 손에 감은 채 사내의 소매와 허리춤을 살폈다. 독침과 엽전 몇 닢 외에는 신분을 밝힐 만한 물건이 없었으나, 가죽 주머니 밑바닥에서 검붉게 굳은 흙가루가 나왔다. 현허가 냄새를 맡지 않고 손끝으로 조금 비벼 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오래된 피가 섞여 있구나.”
“이 사람의 피입니까?”
“말라붙은 때가 달라 보인다. 한 사람의 것인지도 알 수 없고.”
풍은 검붉은 흙에서 북쪽 능선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내가 죽은 뒤에도 은빛 반지는 잠잠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 방향을 향한 당김이 전보다 뚜렷해져 있었다. 반지가 좇은 것이 이 감시자만은 아니었다.
“더 가면 이자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 수도 있겠지. 반대로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마련한 곳에 제 발로 들어갈 수도 있다.”
현허는 기울어진 햇빛과 독침이 박힌 골짜기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요즘 북쪽 변경에서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소문이 있다. 산촌마다 한두 명씩 없어져 처음에는 산짐승이나 도적의 짓으로 여겼지만, 소식이 닿는 곳이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지.”
“사라진 사람들은 돌아왔습니까?”
“내가 들은 바로는 없다.”
북쪽으로 이어진 흐름이 풍의 눈앞에 아른거렸고 어쩌면 사라진 사람들과 관련된 흔적일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으며, 눈앞에서 죽은 자는 붙잡히는 순간을 대비해 독환까지 품고 다녔다. 같은 자들이 숲속에 몇이나 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풍은 부풀어 오른 제 힘을 완전히 거두지 못했고 사내를 비껴 바위를 부순 것으로 끝났지만 현허가 가까이 있었다면 파문에 휩쓸렸을지도 몰랐다. 사람을 구하러 간다면서 곁의 사람부터 해칠 수는 없었다.
풍은 북쪽을 향했던 발을 거두었다.
“오늘은 더 가지 않겠습니다.”
은빛 반지가 낮게 떨었으나 그는 손을 움켜쥐지 않았고 재촉을 느끼되 따르지는 않았다.
“대신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아보고 싶습니다. 반지가 왜 저쪽을 가리키는지도요.”
“그 답을 찾으려면 먼저 네 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한다.”
현허는 피 묻은 흙과 독침을 단단히 싸서 품에 넣었다. 사내의 시신은 가까운 암자에 알려 수습하기로 했고, 독침에 상한 바구니에서는 건질 수 있는 약초만 짧게 추렸다. 붉은 뿌리 하나가 독 묻은 낙엽 사이로 굴러 들어갔지만 풍은 손을 뻗지 않았다.
“아깝지 않으냐?”
“아깝습니다.”
풍은 낙엽 사이의 붉은 빛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도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현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뒤를 밟는 자가 없는지 살피며 산정을 향했고, 해가 산등성이에 걸릴 무렵 나무 사이로 등불 하나를 발견했다.
작고 정갈한 집의 부엌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마당 한쪽에는 마른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밥 짓는 냄새가 저녁 공기에 섞여 내려오자 풍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고 다섯 해 동안 빛 한 줄기 없는 땅속에 갇혀 있던 눈에는 창호지를 물들인 등불마저 눈부셨다. 사람이 피운 불과 지붕 아래에 고인 온기,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처럼 피어나는 연기가 잊고 지낸 세월만큼 낯설었다.
현허가 대문을 밀었다.
“영아야, 할애비 왔다.”
집 안에서 부산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풍의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었고, 단정히 묶은 머리 아래로 부엌일을 하느라 걷어 올린 소매가 보였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밥이 다 식겠…….”
여자아이의 시선이 풍에게 닿았고 흙투성이 옷과 검게 물든 바구니를 차례로 훑어본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이 꼬마는 누구예요?”
풍은 제 귀를 의심했고 여자아이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 보였다.
“누가 꼬마입니까?”
“너 말이야.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왔잖아.”
“저보다 작은데요.”
아이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키가 조금 크면 다 어른인 줄 알아?”
“그럼 먼저 꼬마라고 부르지 말았어야지요.”
현허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헛기침했다.
“이 아이는 단풍이다. 잠시 머물 손님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거라. 풍아, 이쪽은 내 손녀 현아영이다.”
아영은 팔짱을 낀 채 풍을 위아래로 살폈다.
“손님이면 손님답게 얌전히 있어. 부엌에 들어와서 아무거나 만지지 말고.”
“그럴 생각 없습니다.”
“말대꾸는 꼬박꼬박 하네.”
아영이 성큼 다가와 풍의 바구니를 집으려 했다. 풍이 내주려는 순간, 부러진 대나무 살 사이에 박혀 있던 검은 가시 하나가 드러났고 그녀의 손끝이 바로 그 위로 내려갔다.
“만지지 마십시오!”
풍은 아영의 손목을 낚아채 뒤로 당겼다. 너무 급히 움직인 탓에 아영의 몸이 가볍게 딸려 왔고, 풍의 가슴팍에 어깨를 부딪친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마당에 주저앉았다.
“아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영이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자 풍은 즉시 손을 놓았다. 애초에 그의 몸이 움찔할 일도 없었다 — 손목을 잡기 전부터 그는 아영에게 티끌만 한 악의도 없음을 훤히 읽고 있었다.
“가시에 독이 묻었습니다. 손이 닿을 것 같아서…….”
현허가 바구니를 받아 천으로 가시를 덮었다.
“풍의 말이 맞다. 손끝에 스치기만 해도 위험할 수 있으니 가까이 가지 말거라.”
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의 흙을 털었고 화가 덜 풀린 듯 입술이 삐죽 나왔으나 바구니에는 다시 손대지 않았다.
“그럼 처음부터 독이 있다고 말하면 되잖아.”
“말하기 전에 닿을 것 같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풍이 고개를 숙이자 아영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러다 문을 활짝 열며 홱 돌아섰다.
“밖에 서 있으면 밥 냄새 다 빠져. 들어오기나 해.”
현허가 독 묻은 물건을 따로 치우는 동안 풍은 문턱 앞에 멈춰 섰다. 작은 상 위에는 된장 냄새가 밴 국과 나물 몇 접시가 놓여 있었고,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자 어머니와 살던 집의 저녁이 아득하게 떠올랐다. 기억 속 낡은 솥뚜껑이 달그락거리며 열리는 듯했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아영은 풍 앞에 밥그릇을 내려놓았고 손길은 퉁명스러웠지만 밥은 다른 그릇보다 수북했다.
“왜 안 먹어? 독이라도 든 줄 알아?”
“아닙니다.”
풍은 국물을 한술 떠 입에 넣었고 간이 조금 짰고 나물은 질겼지만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 무저갱에서는 붉은 영초와 이름 모를 열매로 허기를 버텼고, 밖으로 나온 뒤에도 산에서 캔 것으로 배를 채웠다. 누군가 자신이 돌아올 시각을 생각하며 불을 지피고 밥을 남겨 두는 일은 오래전에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밥을 먹자 아영은 몇 번 흘끔거렸고 이유를 묻지는 않고 자기 앞의 나물 접시만 풍 쪽으로 슬쩍 밀어 놓았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현허는 산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전했고 감시자와 독침 덫, 사내가 깨문 독환과 피가 섞인 흙에 관한 이야기였다. 반지의 힘과 풍의 눈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영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북쪽이면 양가촌 쪽 아니에요? 지난달에 다녀간 장꾼도 그 근처에서 사람이 또 사라졌다고 했잖아요.”
“그 흙이 양가촌에서 묻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실종된 사람이 벌써 여럿이라면서요.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현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식은 찻물을 한 모금 마시는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스쳤고, 풍은 그것을 보았으나 까닭까지 헤아릴 수는 없었다.
“짐작만으로 북쪽을 뒤지면 기다리는 덫에 들어갈 수 있다. 내일 독침부터 살펴보고, 풍이 가진 반지와 비슷한 물건이 기록에 남아 있는지도 찾아보마.”
현허가 풍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이면 될 줄 알았지만 일이 달라졌다. 너를 본 자가 더 있을 수 있고, 은빛 반지는 여전히 북쪽을 가리키고 있지. 지금 홀로 떠나면 추적당하는지조차 알아채기 어려울 게다.”
풍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사내를 죽일 뻔한 뒤로 풍의 몸은 잠잠히 가라앉아 있었고, 오른손의 은빛 반지만 상 아래에서 북쪽을 향해 희미하게 뛰었다.
따뜻한 집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온기가 아쉽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믿고 눌러앉는다면 반지의 재촉에 끌려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쪽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아내려면 현허의 기록과 경험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제 힘이 사람을 죽이기 전에 거두는 법을 익혀야 했다.
다음에는 눈앞의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지키려던 사람을 자신의 힘으로 해치는 일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
“며칠 머물겠습니다.”
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며칠만?”
“알아볼 것을 알아보면 떠날 겁니다.”
“누가 붙잡는대?”
아영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잠시 뒤 풍이 쓸 방에 새 이부자리를 가져다 놓았다. 현허는 문밖에 간단한 경계실과 방울을 둘러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한 뒤, 독침은 날이 밝으면 살펴보자며 풍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날 밤 풍은 사람의 온기가 남은 방에 누웠다. 창밖에서는 산바람이 나뭇잎을 쓸었고 멀리서 풀벌레 소리가 이어졌으며, 마당의 경계 방울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오른손을 이불 밖으로 꺼내자 은빛 반지가 북쪽을 향해 희미하게 맥동했고 풍은 창문 틈으로 고요한 마당과 검게 잠긴 숲을 바라보았다. 더 먼 능선 너머에서는 달빛을 머금은 잿빛 안개가 낮고 느리게 번지고 있었다.
그 안개 너머에서, 반지는 밤새 한 번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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