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3화 현허(玄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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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이 고개를 든 곳에는, 이미 한 노인이 서서 풍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눈가에 아주 짧은 경악이 스쳤다. 갓 세상 밖으로 나온 소년의 몸에서, 오래 산 고수조차 함부로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기운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어수룩한 아이였으나, 그 안쪽에 고인 힘은 이미 화경의 벽을 우습게 넘고 있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기척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것은 분명 느꼈는데, 어느새 코앞이었다. 풍은 내심 놀랐다. 다섯 해 동안 산짐승의 움직임 하나 놓친 적 없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 노인은 달랐다. 마치 본디 그 자리에 있던 한 그루 고목처럼, 어떤 기척도 흘리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풍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아챘다.

풍은 약초 캐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잔잔한 눈빛만으로도,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디서 온 노인일까. 이런 깊은 산중, 그것도 사람 발길 닿지 않는 절벽 아래에 홀연히 나타날 수 있는 자라면 결코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풍은 약초 바구니를 슬그머니 등 뒤로 내려놓고, 만일을 대비해 다리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다섯 해 만에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풍은 반가움보다 긴장이 앞섰다. 어찌 인사를 건네야 할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가물가물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풍은 어느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노인은 백발을 단정히 빗어 넘기고, 낡았으나 정갈한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눈빛이 깊고 형형했다.

“어허, 신기한 아이로고. 분명 신법은 상당한 고수였거늘, 어찌 기도는 이리 평범한고?”

노인이 풍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풍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그저 약초를 쥔 채 멀거니 서 있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노인은 풍의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했다. 풍은 어쩐지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노인의 눈빛이 돌연 번뜩이더니, 풍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묵직한 무언가가 풍을 향해 밀려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노인의 손이, 그리고 그 손을 타고 흐르는 어떤 기운이 — 마치 느릿느릿 굽이치는 강물처럼 — 풍의 눈에 또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땅속에서 제 몸을 들여다볼 때 보이던, 바로 그 흐름이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남의 몸에서, 그것도 이토록 또렷하게 보였다.

풍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제 몸이 아닌 남의 몸에서도 기의 흐름이 보일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섯 해 동안 제 안만 들여다보던 그 눈이, 어느새 바깥세상까지 꿰뚫어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을 곱씹을 새도 없이, 노인의 장(掌)은 이미 코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저 기운이… 저리로 흐르는구나.’

풍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 흐름의 끝을 비껴 살짝 옆으로 몸을 틀었다. 노인의 장이 조금 전까지 풍이 있던 자리를 묵직하게 스쳐 지나갔다. 등 뒤의 바위가 우수수 부스러져 내렸다. 직접 맞았다면 어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것은 다섯 해의 땅속 수련이 풍에게 안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상대의 기운이 어디로 흐를지를 미리 보는 눈. 그 하나만으로 풍은, 저보다 한참 윗길의 고수를 상대로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노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내 그 손이 기묘하게 꺾이더니, 방향을 바꿔 다시 풍을 노렸다. 처음보다 한층 빠르고 매서운 변초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으로 좇기도 전에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풍의 눈에는 그 흐름이 먼저 보였다. 어디로 뻗어 올지가 빤히 보이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풍은 피하는 대신 흐름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노인의 팔을 위로 가볍게 쳐올린 뒤, 그 가슴에 주먹을 세 번 가져다 댔다. 다치게 할 마음은 없어, 힘을 한껏 죽인 손속이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주르륵 밀려나, 나무에 등을 기대고서야 겨우 몸을 가눴다. 입가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노인은 제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화경(化境)에 이른 몸이었다. 어지간한 절정 고수의 일격쯤은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할 경지건만 — 한낱 소년의 주먹 세 대에 이리 속절없이 밀려나다니. 노인의 눈에, 경악과 흥미가 동시에 일렁였다.

“쿨럭… 허허. 신기한 아이가 아니라, 나보다 윗길이었다는 건가? 이거 원, 평생 겪을 놀라움을 오늘 하루에 다 겪는구나.”

“내 무공을 익힌 지 어언 예순 해다. 절정의 고수와도 숱하게 손을 섞어 봤지. 한데 너처럼 내 초식을 ‘미리 알고’ 움직이는 놈은… 정녕 처음이야. 대체 어떻게 한 게냐?”

풍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기운이 흐르는 길이 눈에 보였을 뿐이라고, 그것을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풍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풍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황급히 노인에게 다가갔다.

“괜, 괜찮으십니까? 어르신께서 먼저 손을 쓰시기에, 저도 모르게…”

“되었다, 되었어. 이 늙은이가 자초한 일이니. …한데 아이야, 내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느냐?”

노인이 소맷자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풍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노여움보다 호기심이 가득했다.

풍은 노인이 진심으로 자신을 해치려 한 것은 아님을 어렴풋이 느꼈다. 정말 죽일 마음이었다면, 그 마지막 장에는 좀 더 사납고 탁한 기운이 실렸을 터였다. 흐름을 읽는 풍의 눈은, 상대의 손속에 담긴 그 ‘마음’까지 어렴풋이 비춰 주고 있었다.

“어르신은 누구신데, 다짜고짜 제게 손을 쓰시고는 질문을 하신다 하십니까?”

“허허, 미안하게 됐구나. 내 너에게 장을 날린 것은 해치려는 게 아니라, 네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알아보려 함이었느니라. 멀리서 네 신법을 보고 엄청난 고수가 나타난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이리 앳된 아이가 서 있으니… 내 눈을 의심했지.”

“게다가 네가 펼친 그 보법이며 신법은, 내가 아는 그 어떤 문파의 것도 아니야. 그래서 더더욱 궁금하구나. 대체 어느 문파의 제자인고?”

풍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문파라니.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저 노인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상황 앞에서, 풍은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아이야, 혹 날 경계하는 거라면 그럴 것 없다. 내 비록 이리 늙었다만, 젊었을 적엔 강호에서 의(義)와 협(俠)으로 제법 이름을 날렸지. 어디 가서 현허라는 이름을 대면, 내가 허튼 사람이 아니란 건 금세 알 게다.”

현허라는 이름에도 풍은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풍은 방금 노인이 입에 담은 그 말 자체가 더 낯설었다.

“한데 어르신, 방금부터 말씀하시는 그 ‘강호’라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풍이 조심스레 묻자, 현허의 눈이 다시 한 번 휘둥그레졌다. 잠시 멍하니 풍을 바라보던 노인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강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게냐? 무공으로 이 늙은이를 눕힌 아이가, 정작 강호가 무엇인지를 몰라? …이거 점점 더 알 수 없는 아이로구나.”

현허는 한참을 껄껄 웃다, 이내 정색하고 풍을 다시 보았다. 웃음기 걷힌 그 눈에는, 이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무언가가 어려 있었다. 이만한 자질을 지니고도 강호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아이라니. 어쩌면 이 아이는, 제가 평생 만나 본 누구와도 다른 그릇일지 몰랐다.

“강호란 말이다.” 현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 어울려 사는, 또 하나의 세상이니라. 의(義)를 좇는 정파가 있고 사사로운 힘을 좇는 사파가 있으며, 그 사이로 별의별 사연과 은원(恩怨)이 강물처럼 얽혀 흐르지. 네가 지닌 그 무공이면, 좋든 싫든 머지않아 그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될 게다.” 풍은 그 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까닭 모르게 두근거렸다.

“그건 차차 일러 주마. 우선은, 그 사연 많아 보이는 사부님 얘기부터 들어야겠다만.”

“…사부님에 대해서는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정말입니다.”

풍은 또 한 번 막혔다. 사부라면… 그 반지였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입에 담는단 말인가.

‘반지가 스승이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당하기 딱 좋겠지.’

노인은 잠시 풍을 빤히 바라보더니, 더는 캐묻지 않았다. 무언가 깊은 사정이 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허허, 그런 게로구나. 그럼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그것도 말하기 어렵겠느냐?”

“풍입니다. 성은 단가이고요. 단풍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단풍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현허는 새삼스레 풍을 위아래로 다시 훑어보았다. 그 눈빛에는 풍을 향한 궁금증이 숨김없이 어려 있었다. 이만한 아이를 길러 낸 사부가 대체 누구일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현허에게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평생을 무도(武道)에 바친 노인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이 소년이 지닌 자질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그릇으로 비쳤다. 이대로 그냥 보내기엔, 너무도 아까운 아이였다.

“단풍아.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 급한 길이더냐?”

“아닙니다. 딱히 정한 곳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이다. 이 늙은이의 거처에서 밥이라도 한 끼 하고 가지 않겠느냐? 다치게 할 마음은 없었다 해도 어쨌든 네게 손을 썼으니, 그 사과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구나. 어떠냐?”

풍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노인의 말투에는 묘하게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고, 무엇보다 풍은 다섯 해 만에 만난 이 ‘사람’이 싫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 전 보았던 그 흐름의 정체를, 어쩌면 이 노인이 알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따뜻한 밥 한 끼라는 말이 풍의 마음을 흔들었다. 다섯 해를 거친 날고기로만 버텨 온 터였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 한 그릇을 떠올리자, 풍은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다섯 해 만에 맛보게 될 사람의 밥, 그리고 사람의 정이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풍의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풍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현허는 흡족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가자꾸나. 이 늙은이의 거처가 예서 그리 멀지 않으니.”

그렇게 풍은,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맺은 인연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다섯 해의 어둠을 지나 처음 닿은 햇살 아래, 소년의 안에서 잠든 힘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뉘엿뉘엿 기우는 해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약초꾼 소년 단풍의 길고 긴 강호행(江湖行)이, 그렇게 비로소 첫걸음을 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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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끝 3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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