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땅속의 다섯 해
섬광이 걷혔을 때, 풍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부터 확인했다.
목을 물어뜯으려던 괴물은 공동 반대편 벽에 처박혀 있었으며, 비늘 사이로 검은 피를 흘리던 몸통이 몇 차례 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조금 전까지 풍은 그 이빨 한 번 막지 못해 어깨와 발목이 부러진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괴물은 그가 휘두른 줄도 몰랐던 팔 한 번에 공동을 가로질렀고, 등이 찍힌 돌벽에는 몸통보다 넓은 금이 남아 있었다.
그 차이를 이해할 틈도 없었다. 금색 반지에서 힘이 솟아 뼈를 뒤흔드는 기세로 팔을 타고 올랐고, 뒤이어 은색 반지에서 낯선 기운이 살과 핏줄을 파고들었다.
“빼…… 빼야 해.”
양쪽 검지를 붙잡고 당겨도 반지는 꿈쩍하지 않았고, 손톱으로 틈을 후빌수록 찢어진 살에서 피만 배어 나왔으며, 그 피마저 금빛과 은빛 표면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두둑.
부러진 왼쪽 어깨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뒤틀린 오른쪽 발목이 뒤이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맞물렸고, 뼈가 어긋난 자리로 돌아갈 때마다 살이 안에서부터 다시 짜였다. 상처가 붙는 만큼 고통은 오히려 깊어졌다.
치료가 아니었다.
부수고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금색 반지의 힘은 굳은 근육과 뼈를 억지로 벌렸고, 은색 반지의 기운은 찢어진 곳을 봉합하며 뒤틀린 핏줄을 갈무리했다. 몸과 기운으로 맞물린 두 힘이 풍의 뜻과 무관하게 온몸을 돌자, 막힌 혈도가 하나씩 강제로 열렸고 지나간 자리마다 검고 끈적한 땀이 피부 밖으로 배어 나왔다.
풍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등골을 타고 오른 힘이 정수리에 닿으면 눈앞이 하얗게 뒤집혔으며, 뒤따라 감겨든 기운이 내려올 때는 온몸의 감각이 모조리 사라졌다. 정신을 잃었다가 되찾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에서는 썩은 피와 진흙을 섞은 듯한 악취가 났다. 상처는 흔적만 남긴 채 아물어 있었지만, 피부 아래에서는 전과 다른 힘이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어디서 생겨났는지조차 모르는 거센 물줄기가 몸 안에 갇혀 출구를 찾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자 두 반지가 팔다리를 제멋대로 잡아끌었다.
두 발이 어깨너비로 벌어지고 허리가 억지로 낮아졌다. 혀끝이 입천장에 눌러 붙고 숨이 코로 길게 빨려 들었으며, 아랫배에 모인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끌려 올라갔다. 정수리를 지난 흐름은 얼굴과 가슴을 타고 내려와 다시 배꼽 아래로 돌아왔다.
말도 뜻도 스며들지 않았지만, 반지는 같은 동작을 몇 번이고 되풀이시키며 몸에 새겼다.
풍이 주저하자 금색 반지가 왼손 검지를 옥죄었다. 팔이 제멋대로 들리며 막 재편된 어깨와 팔꿈치가 거칠게 돌아갔고,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몸속의 기운까지 손등으로 쏠렸다.
쾅!
주먹은 돌에 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까운 돌바닥이 움푹 파였고, 파인 자리에서 뻗은 균열이 공동 벽까지 달려가며 묵은 돌가루를 비처럼 쏟아 냈다. 반동은 팔을 거슬러 올라와 가슴을 후려쳤고 풍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기운이 정해진 길을 벗어나 경맥을 들이받은 탓인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속이 칼로 찢기는 듯했지만, 두 반지는 대답 대신 아랫배에 다시 억센 힘과 기운을 밀어 넣었다.
살아남으려면 움직여야 했다.
풍은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웠고, 몸은 반지가 새겨 놓은 자세를 저절로 잡았다. 들이마신 숨을 아랫배까지 끌어내리자 흩어져 날뛰던 힘이 조금씩 한곳에 모였으며,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은 채 등줄기로 올렸다. 기운은 몇 번이나 혈도에서 벗어나 살 속을 헤집었고, 억지로 밀어붙일 때마다 검은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쓰러지면 다시 앉고, 또 쓰러지면 또 앉기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몇 차례를 견딘 끝에, 정수리와 가슴을 돌아온 기운이 배꼽 아래에 가라앉았다.
그 자리에 손톱만 한 온기가 맺혔다.
작은 순환이 겨우 이어진 것이다. 한 바퀴를 더 돌릴 때마다 찢긴 경맥이 조금씩 아물었고, 그곳이 단전이라는 사실을 풍은 알지 못했다. 다만 호흡을 제대로 고르면 힘이 그 자리에 머물고, 흐트러지면 사방으로 날뛴다는 것만 깨달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마저 남지 않았을 때, 풍은 축축한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이 첫 수련이었다.
땅속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배가 고프면 시간이 흘렀다고 짐작하고, 잠에서 깨면 하루쯤 지났으리라 여길 뿐이었다. 풍은 죽은 괴물의 살을 얇게 저며 푸른 돌 가까이에서 말렸고, 공동 벽을 타고 흐르는 물로 목을 축였고 붉은 꽃의 뿌리가 뻗은 흙굴을 따라가서는 먹을 수 있는 열매와 산마도 찾아냈다.
벽 너머의 좁은 틈을 헤매던 어느 날에는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사냥굴을 발견했고 몸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구멍이었지만 바깥으로 이어지는 분명한 길이었다.
풍은 손바닥과 무릎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기어올랐고 흙냄새 사이로 풀 냄새가 섞였고, 새 우는 소리까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손을 뻗으면 햇빛에 닿을 듯 가까워졌을 때였다.
두 반지가 손가락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단전에 있던 기운이 거꾸로 치솟아 가슴을 후려쳤고 입에서 피가 터지는 동시에 몸이 굳었고, 풍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비탈진 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다시 공동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신을 살린 보물이라 여겼던 반지는 출구 앞에서 쇠사슬이 되었다.
풍은 수련을 거부했다. 반지가 팔다리를 일으켜 세우려 해도 벽에 기대앉았으며, 팔다리를 제멋대로 움직이게 하면 온몸에서 힘을 빼 버렸다. 금빛이 근골을 억지로 벌리고 은빛이 뼛속까지 기운을 밀어 넣어도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끝없는 침묵이었다.
잠결에는 황우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눈을 뜨면 푸른 돌빛만 공동을 채우고 있었고, 아무리 대답해도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는 사실보다, 기억 속 얼굴들이 조금씩 흐려지는 일이 더 무서웠다.
“웃는 얼굴에는 복이 깃든다.”
어머니가 자주 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자 공동이 같은 말을 몇 차례 되돌려 주었고 풍은 그 메아리가 사라질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황우 아저씨는 등짝부터 때리겠지.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고.”
이번에도 돌아온 것은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여기서 죽는다면 누구도 풍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할 터였다. 황우는 산을 헤매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기다릴지도 몰랐으며, 동구 할멈은 끝내 약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풍은 한참 뒤 고개를 들었다.
반지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여서는 출구 앞에서 또 쓰러질 게 분명했고 그렇다고 고통을 견디며 앉아 있는 것만으로 바깥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묶은 힘이라면, 먼저 그 힘이 움직이는 이치를 알아야 했다.
그날 풍은 다시 일어섰다.
반지가 주먹을 뻗게 하자 어깨와 팔 안쪽에서 먼저 일어나는 감각을 기억했고, 기운이 손등에 닿기 직전 어느 혈도를 지나는지도 살폈다. 처음에는 몸이 끌려가는 대로 움직이면서 한순간 늦게 힘을 거두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 결과 주먹은 돌기둥을 부순 뒤에야 멎었다.
풍은 날아온 돌조각을 피해 바닥을 굴렀고 오른손 마디가 찢어지고 팔이 저렸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자세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찬물에 손을 담근 채 호흡을 고르며 날뛰는 기운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반지가 재촉하듯 검지를 옥죄었다.
“몸이 상했잖아.”
풍은 이를 악물고 손을 물에서 빼지 않았다.
“나으면 해.”
금빛이 몇 번 더 맥동하다가 약해졌고 아주 작은 양보였지만 풍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몸이 버틸 수 있을 때 움직이고, 상한 곳이 있으면 먼저 회복하며 그것이 반지에 세운 첫 번째 규칙이었다.
다음에는 주먹이 돌기둥에 닿기 직전 단전의 힘을 어깨 아래에서 흩어 보았다. 절반은 옆구리를 따라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손목에서 멈추자, 주먹 끝이 돌에 닿았는데도 굉음이 일지 않았다.
쩍.
얇은 금 하나만 돌 표면에 생겼다.
풍은 제 주먹과 돌기둥을 번갈아 보았고 전에는 부수지 않으려 애써도 바닥이 패였는데, 이번에는 힘이 자신의 뜻을 따랐다.
그날 이후 수련의 주인이 조금씩 바뀌었다. 반지가 발을 내딛게 하면 풍은 바닥을 차기 전에 힘을 나누었고, 몸이 벽까지 날아가던 처음과 달리 세 걸음 앞에서 멈추었다. 먹이 냄새를 좇아 굴로 들어온 산짐승이 달려들었을 때는 주먹을 쓰지 않고 앞발 옆의 흙만 눌렀으며, 중심을 잃은 짐승은 몇 바퀴 구른 뒤 다치지 않은 채 달아났다.
사냥굴로 들어오는 바람도 몇 차례 결을 바꾸었고 꽃향기가 스쳤다가 매미 소리가 차오르고, 찬바람 뒤에는 낙엽 썩는 냄새가 흘러들었다. 그사이 작은 순환은 전신을 잇는 흐름으로 넓어졌으며, 풍은 눈을 감고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자리와 바위 너머를 기는 짐승의 움직임을 가려냈다.
돌을 부수는 힘보다 부수지 않을 힘을 고르는 일이 훨씬 어려웠다.
돌을 부수지 않는 법을 익힌 뒤에도, 몸속의 힘은 여전히 낯선 손님 같았다.
풍은 어느 밤 운기를 멈추고 가만히 앉았다. 반지가 팔을 잡아끌어도 맞서지 않았고, 기운이 혈도를 벗어나 살을 헤집어도 억지로 밀어내지 않았다. 힘을 붙들어 두거나 내치는 대신, 그것이 어디서 일어나 어디로 흐르려 하는지를 처음으로 끝까지 따라가 보았다.
두려움도, 통증도, 제멋대로 날뛰는 기운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몸 안에 갇혀 출구를 찾던 거센 물줄기가, 실은 제 숨결을 따라 흐르고 있었음이 보였다. 반지가 억지로 돌리던 흐름과 풍이 내쉬는 숨이 처음으로 어긋나지 않고 겹쳤다. 힘은 여전히 거대했으나 더는 낯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느끼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반지는 더 이상 풍의 몸을 통제하지 않았다.
팔을 잡아끌던 감각이 사라졌다.
혀끝을 붙이라 허리를 낮추라 몸을 몰아붙이던 강제가 조용히 물러났고, 남은 것은 풍이 스스로 고른 자세와 스스로 돌리는 숨뿐이었다. 머리끝까지 오른 기운이 가슴을 지나 단전으로 돌아오자 전신의 기맥이 잔잔하게 울렸고, 피부와 근골에는 다섯 해에 걸친 운기의 흔적이 단단히 배어 있었다.
풍은 천천히 손을 들어 보았다.
반지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든 손이었다.
주먹을 쥐자 단전의 기운이 팔을 타고 손끝으로 모였고, 손을 펴자 그 기운도 순순히 아랫배로 돌아갔다. 부수라 재촉하는 것도, 멈추라 막아서는 것도 없었다. 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몸 안의 모든 힘이 오롯이 풍의 것이었다.
두 반지는 잠잠했다.
강제는 끝나 있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반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풍은 무저갱에서부터 지녀 온 붉은 꽃을, 뿌리 한 가닥 상하지 않은 그 영초를 젖은 이끼로 감싸 공동의 높은 틈에 갈무리했다.
풍은 처음 발견했던 의복으로 갈아입고 빛바랜 서책을 행낭에 넣었고 젖은 이끼에 감싸 두었던 붉은 꽃도 조심스럽게 챙긴 뒤, 마지막 장에 남은 문구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대가 진정 준비되었을 때, 나머지가 스스로 그대를 찾아오리라.
반지가 어디서 왔으며 어째서 자신을 붙잡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풍은 서책을 덮고 사냥굴 너머의 빛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정해.”
출구에 이르러도 반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섯 해 전 이 자리에서 두 반지는 풍의 팔다리를 잡아끌어 그를 도로 굴 아래로 내동댕이쳤었다. 이제는 손가락 끝 하나 옭아매지 않았다.
풍은 무릎을 낮추고, 처음으로 오롯이 제 것이 된 힘을 두 다리에 실었다.
땅을 찼다.
몸이 좁은 흙길을 화살처럼 꿰뚫었고 다섯 해 동안 갇혀 있던 어둠이 뒤로 쏟아지듯 멀어졌다. 손을 뻗을 새도 없이 굴 끝의 빛이 얼굴을 덮쳤다.
산바람과 풀 냄새, 햇볕에 데워진 흙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풍은 신법으로 하늘을 향해 뛰어올라 그대로 산 정상을 향해 내달렸다. 산 정상으로 뛰어올랐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산 정상을 넘어가고 있었다.
풍은 산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그를 붙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향 마을에 닿았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으며 익숙한 담장과 지붕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나, 기억 속 모습과는 조금씩 달랐다. 나무는 훌쩍 자랐고 낯선 문패가 걸린 집도 있었으며, 황우의 집은 전보다 작고 낡아 보였다.
창호지 너머로 등잔불이 비쳤고 안쪽에서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묵직한 숨소리가 들렸다. 틀림없는 황우였고, 그는 살아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풍은 문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골목에 멈춰 섰다. 다섯 해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사람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굵은 숨소리에 어릴 적 목소리가 겹쳐 떠올랐다.
“이 녀석, 또 북쪽 벼랑에 갔었지! 등짝을 후려쳐야 정신을 차리지.”
“딱 한 뿌리만 더 캐려고 그랬어요.”
호통을 치면서 못 이기는 척 약봉지를 쥐여 주던 목소리였고, 그 투박한 목소리가 문 하나 너머에 있었지만 풍은 끝내 손을 뻗지 못했다.
다섯 해 전 굴로 떨어진 아이는 이제 없었다. 담장 너머 황우의 숨결도 잠든 마을의 미약한 기척도 풍의 눈과 귀에는 낱낱이 읽혔고, 그 무엇도 그를 위협으로 흔들지 못했다. 다만 그렇게 달라진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 두 반지가 어디서 왔는지는 풍조차 아직 알지 못했다.
풍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목까지 차오른 이름을 끝내 삼키고 소리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등잔불은 여전히 창호지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는 더 다가가지 않았다.
그날 밤 풍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정체 모를 힘이 제 안에 깃든 이상, 그것을 좇아 누군가 뒤를 밟는다면 자신이 머무는 곳이 곧 위험이 닿는 곳이 될 터였다. 마을에 그 그림자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날이 밝기 전, 그는 행낭에서 붉은 꽃과 서책을 꺼냈다. 자신을 무저갱으로 이끌었으나 땅속에서 열매를 내어 목숨을 이어 준 영초였으며, 황우라면 함부로 쓰지 않고 꼭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쓸 수 있을 터였다.
서책의 빈 가장자리를 잘라 무릎 위에 펼친 풍은 나뭇가지 끝에 먹을 묻혔다.
황우 아저씨께.
풍이입니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
먹물이 종이 위에서 천천히 번졌고 풍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다음 글자를 이었다.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돌아갈 수 없지만, 제 힘으로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꼭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마지막 줄 아래에는 넓은 여백이 남았고 풍은 한참을 망설이다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마을로 내려간 그는 인기척이 없는 틈을 기다려 황우의 집 문가에 붉은 영초와 편지를 내려놓았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작은 돌로 종이를 누른 뒤 황우의 집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꼭 돌아올게요.”
차마 직접 전하지 못한 약속이었다.
풍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몸이 터뜨리는 반격을 다스릴 곳을 찾으려 산길을 올랐다. 능선을 가로막은 짧은 절벽 앞에서는 무릎을 굽혀 단전의 기운을 두 다리로 고르게 보냈으며, 바닥을 차는 순간 힘의 절반을 다시 거두었다.
몸이 가볍게 허공을 건넜다. 맞은편 바위에 내려선 발밑으로 낙엽 몇 장만 둥글게 밀려났지만, 거두지 못한 가느다란 기운 한 줄기가 바람을 타고 산마루 너머로 흘렀다. 너무 미세해 풍조차 뒤늦게 알아차린 흔적이었다.
풍은 손가락의 두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절벽 그늘에서 석잠초를 발견하고 몸을 낮췄다. 줄기를 상하지 않게 흙을 걷어 내며 잔뿌리의 방향을 더듬던 순간, 바람과 다른 움직임이 감각 끝에 걸렸다.
산짐승이 아니었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으나 낙엽을 밟기 직전마다 미세하게 무게를 옮기는 기척이 있었으며 한 사람의 몸 안에서 흐르는 기운은 바늘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바닥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깊었다.
그 기척은 망설임 없이 풍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풍은 캐던 약초의 뿌리를 놓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감상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