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6화 산정상의 나날

아영과의 대련을 마친 그날 저녁, 현허가 풍 앞에 뭉툭한 침 하나를 내려놓았다.

“네 눈보다 더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풍은 낮의 대련에서 너무 크게 일어나던 힘을 떠올리며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제 힘입니까?”

“정확히는 네가 미처 다 거두지 못하는 힘이다. 큰 힘일수록 조금만 새어도 크게 부수는 법이니, 가늘게 거두지 못하면 결국 네가 지키려던 것부터 상하게 되느니라.”

현허는 뭉툭한 침에 기운을 실어 풍의 어깨를 찔렀다. 살의를 마주한 순간 손끝에 답하려는 힘이 실렸는데, 그 크기가 방 안에서 감당하기엔 너무 컸다. 풍은 그것을 억지로 가두는 대신 비어 있는 쪽으로 흘리려 했다. 첫날에는 탁자 모서리가 뜯겨 나갔고 다음에는 창틀과 찻잔이 차례로 깨졌다. 아영에게 못질을 배우며 힘보다 방향을 먼저 잡는 감각을 익힌 뒤에야 그 힘을 땅과 바람으로 돌릴 수 있었으나, 마지막까지 남은 찻잔에도 바닥을 따라 머리카락만 한 금이 가 있었다.

“이겼는지보다 무엇이 상했는지를 먼저 보아라.”

풍은 그 잔을 수련 자리 곁에 놓았고 공격을 막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힘이 지나간 자리까지 살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날이 갈수록 풍은 그 힘을 조금씩 더 곱게 거두었고, 미처 다 줄이지 못한 기세는 발밑으로 흘렸고, 그것마저 위험하면 허공을 향해 틀었다. 아영은 담벼락에 구멍이 날 때마다 눈을 흘겼으나, 어느 날은 망치를 건네면서 손잡이를 쥐는 법부터 다시 가르쳐 주었다.

“세게 치는 건 누구나 해. 못대가리를 보고 똑바로 쳐야지.”

“이 힘도 못처럼 다룰 수 있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 몸에 붙어 있잖아.”

퉁명스러운 대답이었지만 아영은 풍이 벽을 고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현허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모르는 척하며 차를 마셨고, 찻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금이 더 벌어지지 않았는지 풍부터 살폈다.

산정상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이 산마루를 하얗게 덮었을 무렵, 눈보라 속을 헤치고 약장수 하나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등에 멘 약상자를 내리지도 못한 채 쓰러졌으며, 오른쪽 종아리에는 검붉게 굳은 피가 엉겨 있었다.

아영이 물을 데우는 사이 풍은 상처를 살폈고 칼날이 스친 자국은 깊지 않았지만 먹빛 독기가 가는 뿌리처럼 기맥을 파고들어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독입니다.”

현허가 약장수의 눈꺼풀을 젖혀 동공을 확인하자, 사내는 마른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서북쪽 고개 아래에서 복면인 셋을 만났습니다. 사람을 보았느냐고 묻더니, 모른다 하자 약상자와 장부를 뒤졌습니다.”

그가 품속에서 꺼낸 장부에는 변경 마을을 돌며 약재를 사들인 기록이 빼곡했다. 몇몇 지명 옆에는 붉은 동그라미가 그어져 있었고, 북쪽 끝에서 시작된 표시는 폐쇄된 옛길을 따라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 표시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라진 곳들입니다. 지난달에는 백운령 아래에서도 셋이 없어졌고, 어린아이까지 사라졌다는 마을도 있었지요. 놈들은 자꾸 노하촌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세 글자를 듣는 순간 풍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하촌 옆에는 아직 붉은 동그라미가 없었으나, 누군가 먹으로 그은 가느다란 선이 북쪽 마을들을 향해 뻗어 있었다.

동구 할멈은 무사할까. 황우는 자신이 남긴 편지와 붉은 영초를 보았을까. 무저갱에 떨어진 뒤 다섯 해가 흘렀고, 세상 밖으로 나온 뒤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터라 그동안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은빛 반지가 북쪽을 향해 가늘게 떨었다.

“제가 놈들을 찾아보겠습니다.”

풍이 일어서자 현허가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먼저 이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

“해독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설령근이 모자란다. 지금 동쪽 벼랑으로 가면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게다.”

문밖으로 나가면 복면인들의 흔적을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망설이는 동안에도 먹빛 독기는 약장수의 심장 가까이 번지고 있었고, 사내의 숨결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어졌다.

풍은 이를 악물며 약초 바구니를 들었다.

“설령근부터 가져오겠습니다.”

눈 덮인 산길을 내달리자 나무와 바위가 무서운 속도로 밀려났다. 평범한 걸음으로 한 시진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으나 풍은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동쪽 벼랑에 닿았고, 기맥시로 차가운 흙 아래 숨은 희고 가는 뿌리를 찾아냈다.

문제는 설령근 주변이었다. 벌레알처럼 작은 검은 점들이 군락 가장자리를 띠처럼 에워싸고 있었고, 젖은 흙에서는 희미한 독기가 배어 나왔다. 누군가 이 산에서 해독약으로 쓸 만한 설령근을 모조리 못 쓰게 만들 생각으로 독분을 뿌린 흔적이었다.

풍은 흙을 깊이 파헤쳐 독이 닿지 않은 뿌리 끝만 골라 냈고 양이 모자랐지만 다른 군락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현허는 설령근을 여러 약재와 섞어 달였고, 아영과 풍은 밤새 경련하는 약장수의 몸을 붙들었다.

“살 수 있습니까?”

“밤을 넘겨 봐야 안다.”

풍은 몇 번이나 문을 바라보았고 지금이라도 고개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약장수의 호흡이 끊길 때마다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사내가 고비를 넘긴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고, 숨결이 고르게 가라앉은 뒤에야 풍은 서북쪽 고개로 향했다.

전날의 눈 덕분에 발자국은 어렵지 않게 찾았고 모두 셋이었으며 하나는 오른발을 끌었고, 다른 하나는 무거운 짐을 진 듯 발자국이 깊었다. 하지만 흔적은 숲을 지나 절벽 앞에서 끊겼고, 그 자리에는 말라붙은 피 몇 방울과 불에 탄 종잇조각만 남아 있었다.

풍은 기맥시를 넓혔고 나무뿌리와 겨울잠에 든 짐승, 바위 밑을 흐르는 가느다란 물길까지 눈에 들어왔지만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놈들은 약장수를 놓친 순간부터 추적자가 올 것을 예상하고 흔적을 지운 뒤였다.

조금만 빨랐다면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절벽 아래까지 내려간 풍은 바위틈에 반쯤 박힌 나무패 하나를 발견했고 앞면에는 낯선 검은 이리 문양이 긁혀 있었고 뒷면에는 ‘열일곱’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패를 내밀자 현허의 표정이 굳었다.

“아시는 물건입니까?”

“확실하지 않다.”

현허는 문양을 종이에 옮겼고 손놀림은 평온했지만 붓끝에 먹이 지나치게 많이 묻어 마지막 획이 검게 번졌다.

“지금 뒤를 쫓으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면서 북쪽으로 달려갈 셈이냐?”

“가만히 있으면 노하촌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제가 처음부터 놈들을 쫓았다면 나무패보다 더 많은 단서를 찾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저 사람이 죽었을 수 있다.”

풍은 입을 다물었다. 약장수를 살렸다는 안도보다 복면인들을 놓쳤다는 초조함이 자꾸 앞섰고, 놈들이 고향으로 향한다면 선택의 대가를 노하촌 사람들이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강호에서는 어느 쪽을 골라도 잃는 일이 생긴다.”

현허는 나무패를 내려놓으며 풍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옳은 답이 있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지키고, 그 때문에 무엇을 놓칠지 감당한 뒤에야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때가 더 많지.”

“다음에는 둘 다 놓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려면 혼자 모든 것을 하려는 버릇부터 버려야 한다.”

“제 발이 조금만 빨랐으면…….”

“네 발보다 빠른 적은 언젠가 나타난다. 네 눈을 속이는 자도 생길 테고.”

현허는 장부와 나무패를 풍 앞으로 밀었다.

“네가 설령근을 캐는 동안 누군가 복면인들을 쫓았다면 어땠겠느냐? 아영에게 흔적을 맡기고 네가 약초를 구했다면? 힘이 모자라 놓치는 것만 패배가 아니다. 혼자 감당하려다 손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 역시 패배다.”

그 말은 오래도록 풍의 가슴에 남았다.

약장수가 떠난 뒤 풍은 금이 간 찻잔과 나무패를 수련 자리 곁에 나란히 두었다. 몸이 터뜨린 힘을 흘릴 때면 찻잔의 금부터 확인했고, 산길에 나설 때에는 혼자 판단하기에 앞서 현허와 아영이 본 것을 물었다.

세 사람은 약초꾼과 행상에게서 실종 소식이 들어올 때마다 날짜와 장소를 지도에 보탰다. 풍은 폐쇄된 옛길과 약초 운반로를 직접 살폈고, 아영은 장터를 오가는 상인들의 말을 모았으며, 현허는 무림의 오래된 표식과 독의 계통을 뒤졌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다시 산마루에 찬바람이 불 때까지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흩어졌던 점들은 조금씩 북쪽으로 향하는 길의 모양을 드러냈다.

그동안 풍의 힘도 달라졌다. 살의를 앞서 읽으면서도 힘은 오직 풍이 정한 방향으로만 났고, 은빛 반지는 변함없이 북쪽을 가리켰다. 무엇보다 풍은 혼자 먼저 달려 나가는 대신 두 사람과 보폭을 맞추는 법을 배웠다.

마지막 가을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산 아래 장터에 다녀온 아영이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방문을 열었고 손에는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노하촌에서 사람이 사라졌대.”

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요?”

“확인된 것만 넷이야. 며칠 전 백운령 아래에서 없어진 둘도 노하촌으로 약재를 팔러 가던 중이었고.”

종이에는 실종된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노하촌이라는 세 글자 아래 찍힌 네 개의 점을 보는 순간 풍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으며, 동구 할멈과 황우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풍은 지도를 펼쳐 새로 들어온 장소들을 표시했다. 큰길만 놓고 보면 아무런 규칙이 없었지만 약초 산지와 옛길을 따라 선을 잇자 노하촌과 백운령 남쪽 계곡의 점들이 하나의 운송로로 이어졌다. 그 끝은 약장수의 장부에 그어진 먹선과 마찬가지로 북쪽을 향했다.

“현허.”

풍이 지도를 돌려 보이며 선을 짚었다.

“놈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사람을 모아 북쪽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현허는 지도와 나무패를 번갈아 살폈고 그동안 모인 기록에 이번 실종자들을 더하자 숫자는 공교롭게도 열일곱이었다.

“이 패는 사람을 세는 표식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은빛 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떨렸다.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그 말은 충동처럼 튀어나오지 않았고 풍은 어디서부터 살피고 누구의 도움을 구할지까지 헤아린 뒤 입을 열었다.

“노하촌의 생존자를 먼저 찾고 실종된 장소를 확인하겠습니다. 장부와 나무패의 문양은 관아보다 무림 쪽에서 알아봐야 합니다. 저 혼자 가지 않겠습니다.”

현허의 눈에 짧은 빛이 스쳤고 그는 벽장 깊숙한 곳에서 오래 묵은 목함을 꺼내 낡은 신패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희미해진 표면에는 ‘무림맹’이라는 세 글자가 남아 있었다.

“나도 함께 간다.”

“현허께서도요?”

“이 문양이 내가 아는 것과 같다면 노하촌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아영도 탁자 앞으로 다가와 지도 귀퉁이를 눌렀다.

“저도 가요.”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혼자 모든 걸 하려는 버릇부터 버리라던 말, 벌써 잊었어?”

풍은 입을 다물었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날이 밝으면 산을 내려갈 준비를 시작한다.”

현허는 서쪽 옛길과 장터를 차례로 짚었다.

“노하촌으로 곧장 들어가기 전에 이 두 곳부터 살핀다. 놈들이 사람을 고르고 옮긴다면 흔적이 남아 있을 게다. 오늘 밤 안에 필요한 것을 챙기거라.”

짐을 꾸리다 밖으로 나온 풍은 처마 아래에서 북쪽 산등성이를 바라보았고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자 등 뒤에서 문이 열렸고, 아영이 두툼한 겉옷을 내밀었다.

“또 밤새 서 있으려고?”

“잠깐 바람만 쐬려 했습니다.”

“매번 잠깐이라면서 동틀 때까지 있잖아. 감기 들면 업고 내려가야 하니까 입어.”

풍은 순순히 겉옷을 받아 걸쳤다. 옷깃에서는 햇볕에 잘 말린 풀 냄새가 났고, 아영은 먼저 돌아서면서도 풍이 뒤따라올 때까지 문을 닫지 않았다.

따뜻한 방으로 들어서자 행낭 곁에 물통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에는 현허가 늘 쓰는 낡은 매듭이, 다른 하나에는 아영이 좋아하는 붉은 실이 묶여 있었으며 마지막 것은 아무 표식도 없었다. 대신 그 아래에 놓인 풍의 오래된 약초 바구니가 새 가죽끈으로 단단히 꿰매져 있었다.

풍은 제 물통을 다른 두 개와 나란히 놓고 쓰러지지 않도록 끈으로 한데 묶었다.

문턱을 넘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영의 방 문틈으로 북쪽 지도와 손질을 마친 짧은 검,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떠날 날을 기다려 온 듯한 행낭이 나란히 보였다.

회차 끝 6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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