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동무
노하촌으로 향할 행낭을 꾸린 세 사람이 먼저 서쪽 옛길을 확인하기로 한 아침, 밤새 산을 두드리던 가을비가 그쳤다.
골짜기마다 흙탕물이 불었고 젖은 단풍잎은 길 위에 붉은 비늘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풍이 행낭을 메고 마당을 나서려는 순간 산 아래에서 다급한 종소리가 울렸다. 맹수를 쫓을 때 쓰는 짧은 종이 아니라, 사람이 산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 울리는 길고 낮은 소리였다.
현허가 처마 밑으로 나왔고 잠시 귀를 기울인 그는 풍과 아영에게 짚신을 단단히 묶으라 일렀다.
“서쪽 골짜기다. 비에 길을 잃은 자가 있는 모양이구나.”
세 사람은 곧 산을 내려갔고 종을 친 이는 서쪽 기슭에서 숯을 굽는 여인이었다. 여인의 아들 석구가 전날 아침 나무껍질을 벗기러 산에 올랐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으나 산길에는 익숙했고, 폭우가 올 것을 모르고 깊이 들어갈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이 애가 요 며칠 자꾸 검은 옷 입은 사람을 봤다고 했어요.”
여인은 젖은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옛길 쪽에서 서성이는 자들이 있었다고……. 제가 헛것 보지 말고 나무나 하라며 꾸짖었는데, 어제는 그 사람들을 다시 보면 뒤를 밟아 보겠다고 했습니다.”
현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옛길이라면 북쪽으로 난 폐로를 말하는가?”
“예. 무너진 토담을 지나 백운령으로 이어지는 길이요.”
풍은 아영과 눈을 마주쳤고 실종된 마을들을 지도에 이었을 때 드러났던 길 가운데 하나였다. 약초 산지와 장터를 잇다가 오래전에 버려진 길. 사람의 눈을 피해 북쪽으로 움직이려면 더없이 알맞은 길이기도 했다.
현허는 여인에게 석구의 신발 모양과 옷차림을 물은 뒤 세 갈래로 난 산길을 살폈고 빗물에 흙이 쓸려 발자국은 대부분 뭉개졌으나, 풍의 눈에는 발자국보다 오래 남는 것이 보였다. 나뭇가지와 바위틈에 희미한 기운이 실처럼 걸려 있었으며 산짐승의 탁한 잿빛 사이로 어린아이에게서 흘러나온 옅은 푸른빛이 서쪽 비탈을 향해 이어졌다.
그 곁에는 다른 흔적도 있었다.
먹물을 풀어 놓은 듯 검고 불쾌한 기운이었고 두 사람, 어쩌면 셋. 일부러 호흡을 낮추고 발을 죽였지만, 비를 맞은 나뭇잎에는 손끝에서 새어 나온 기운이 남아 있었으며 풍이 시선을 거두자 금빛 반지가 왼손 검지를 미세하게 잡아당겼다.
“찾았느냐?”
현허의 물음에 풍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고 산 아래에는 석구의 어머니뿐 아니라 종소리를 듣고 모여든 주민들이 있었다. 그들 앞에서 보이지 않는 기맥을 좇는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풍은 진흙 가장자리에 걸린 삼베 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쪽입니다. 석구의 저고리와 같은 빛입니다.”
현허는 풍이 가리킨 비탈과 손에 든 실오라기를 번갈아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래쪽 물길을 살피마. 둘은 비탈을 따라가되, 흔적을 찾으면 함부로 달려들지 마라.”
아영이 먼저 몸을 날렸고 풍도 뒤따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풍이 느려서가 아니었다. 아영은 빗물에 드러난 발자국과 꺾인 풀을 살피느라 속도를 낮췄고, 풍은 그보다 멀리 뻗은 기운의 자취를 한눈에 보고 있었다.
그는 아영보다 앞서 나가지 않았다.
산정상에서 함께 지낸 세월 동안 아영은 풍에게 수십 번 대련을 청했고, 수십 번 졌다. 처음에는 패할 때마다 씩씩거리며 마당의 돌을 걷어찼으나, 언젠가부터는 풍의 발을 묶는 방법과 시선을 속이는 수를 연구했다. 풍이 기운의 흐름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이는 흐름과 실제 움직임을 어긋나게 만드는 법을 익혔다.
며칠 전 대련에서는 풍의 소매 끝을 검 끝으로 베기도 했다.
“맞혔다!”
아영은 그날 반나절 내내 잘린 천 조각을 전리품처럼 들고 다녔고 풍이 옷을 꿰매야 하니 돌려 달라고 하자, 이긴 증거를 없애려 한다며 숨겼다. 밤이 지난 뒤 풍의 방문 앞에는 말끔히 기운 소매가 놓여 있었지만 아영은 끝내 자신이 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풍은 그런 아영의 걸음을 함부로 앞지르고 싶지 않았고 자신에게 흔적이 보인다는 이유로 아영의 판단까지 쓸모없는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좇는 것은 초식의 기맥이 아니라 사람의 악의였고 보이는 것만 믿었다가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늦을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빗물이 쏟아져 작은 폭포가 된 바위턱 앞에서 멈췄고 석구의 푸른 흔적은 그곳에서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북쪽 옛길로 이어졌고, 다른 하나는 급한 경사를 타고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아영이 진흙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끌려간 흔적이야.”
옛길 쪽에는 작은 발자국 사이로 깊고 넓은 자국이 찍혀 있었다. 성인 두 명이 아이를 붙들고 이동한 듯 간격이 흐트러져 있었으며, 바위 모서리에는 손톱으로 긁은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풍은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그쪽으로 흐르는 푸른 기운은 옅었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석구가 지닌 물건 하나가 떨어진 것일 수도 있고, 아이 자신이 그리로 향했을 수도 있었으며 문제는 검은 기운이었다. 옛길 쪽 흔적은 지나치게 짙고 반듯했고 기척을 숨길 줄 아는 자들이라면 이토록 많은 흔적을 남길 까닭이 없었다.
“아래부터 살펴야 합니다.”
“발자국은 저쪽이잖아.”
“너무 선명합니다. 우리에게 보이려고 남긴 것 같습니다.”
아영이 일어서며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게 함정이라 해도 석구가 저리로 끌려갔을 수 있어. 시간을 놓치면 북쪽 산길로 빠져나갈 거야.”
“계곡 아래에도 석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무슨 흔적?”
풍은 입을 다물었고 아영에게 기맥을 보는 눈을 숨길 생각은 없었으나, 지금은 그 눈에만 의지해 달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믿고 한쪽 길을 버리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나도 널 믿어.”
아영은 곧장 대답했지만 옛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도 저 흔적까지 없는 셈 칠 수는 없어. 네가 아래로 가. 나는 이쪽을 확인할게.”
“현허 어르신은 따로 움직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함부로 달려들지 말라고 하셨지, 떨어지지 말라고는 안 하셨어.”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아니거든.”
평소 같았다면 풍은 웃었을 것이고 아영은 말싸움에서 밀릴 때마다 저런 얼굴을 했고, 그 뒤에는 꼭 엉뚱한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 아영의 손은 검자루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며 눈빛에도 장난기가 없었다.
풍은 자신이 두 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영을 붙잡고 계곡으로 내려가면 옛길의 흔적을 놓칠 수 있었다. 반대로 아영을 따라가면 계곡 아래에 남은 희미한 기운이 빗물에 완전히 씻길 터였다.
무엇보다 아영은 이미 마음을 정한 얼굴이었다.
“반 각입니다.”
풍이 말했다.
“반 각 안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위험한 자를 만나도 싸우지 말고 소리부터 지르십시오.”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아영이 소리를 지르면 제가 들을 수 있습니다.”
아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는 소리도 못 지를 만큼 멀리 갈 생각이야?”
풍은 대답 대신 허리에서 작은 불통을 풀어 건넸고 줄을 당기면 붉은 연기가 솟는 물건이었다. 아영은 한동안 그것을 내려다보다 받아 들었다.
“반 각이야. 늦으면 네가 진 거다.”
“무슨 승부가 그렇습니까?”
“내가 정했으니까.”
아영은 옛길로 달려갔고 붉은 옷자락이 젖은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뒤, 풍은 계곡 아래로 몸을 던졌다.
비탈은 생각보다 깊었다. 흙이 무너지는 곳마다 나무뿌리를 밟아 방향을 틀었고, 절벽에서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밀어 낙하하는 힘을 흘렸다.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었으나, 기운을 크게 일으키면 위쪽에 숨어 있을지 모를 자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게 된다. 풍은 낙엽 한 장도 필요 이상 흔들지 않도록 속도를 죽였다.
계곡 가까이 내려왔을 때 피 냄새가 났다.
바위 뒤에 한 소년이 쓰러져 있었으며 진흙투성이 얼굴과 찢어진 삼베 저고리. 석구가 분명했고 오른쪽 다리는 부러진 듯 기이하게 꺾였고,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가슴은 약하게나마 오르내렸다.
풍은 주변을 먼저 살폈고 매복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옷의 자들은 석구를 잡았다가 계곡 아래로 던지고, 그의 신발만 옛길로 끌고 간 듯했고 아이를 죽인 뒤 추적자까지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려 한 것이다.
석구의 목 옆에는 가느다란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독침이었다.
풍은 품속에서 천을 꺼내 침을 뽑은 뒤 냄새를 맡았다. 세 해 전 자신과 현허를 지켜보던 자가 남긴 것과 향이 달랐지만, 침의 굵기와 끝을 비튼 모양은 닮아 있었다. 독은 빠르게 피를 굳게 하는 종류였고 늦었다면 아이는 숨이 붙어 있어도 손쓸 수 없었을 터였다.
그는 석구의 혈도를 눌러 독이 번지는 길을 막고, 부러진 다리를 나뭇가지로 고정했고 등에 업으려던 순간, 산 위쪽에서 새가 무리 지어 날아올랐다.
아영이 간 방향이었다.
풍은 석구를 내려다보았고 아이를 두고 올라갈 수는 없었다. 등에 업은 채 전력으로 움직이면 부러진 뼈가 살을 찌를 수 있고, 독을 누르던 기운도 흔들릴 터였고 반 각은 아직 지나지 않았으나, 아영이 싸우고 있다면 그만큼의 시간은 너무 길었다.
그때 옛길 쪽에서 붉은 연기가 솟았다.
풍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석구를 안아 들고 계곡 벽을 올랐고 아이에게 충격이 전해지지 않도록 두 팔과 허리로 흔들림을 감싼 채, 발끝에서만 기운을 터뜨렸다. 젖은 바위가 발아래서 갈라졌고 산짐승들이 놀라 달아났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절반쯤 올랐을 때 머리 위에서 돌이 굴러왔고 주먹만 한 돌 뒤로 사람 머리만 한 바위가 잇따라 떨어졌고, 누군가 위에서 일부러 밀어낸 것이 분명했다. 풍은 석구를 한 팔로 끌어안으며 빈손을 위로 뻗었다.
장력이 부딪치는 순간 바위가 산산이 부서졌다.
흩어진 돌조각 하나가 석구의 뺨을 스칠 듯 날아들었고 풍은 손목을 돌려 기운의 길을 틀었고, 파편들은 두 사람을 피해 좌우로 쏟아졌다. 반지의 힘이 뒤늦게 치솟았지만 그는 이를 땅속으로 흘려보냈고 발아래 비탈이 크게 울리면서도 더는 무너지지 않았다.
위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몸을 돌렸다.
풍은 쫓지 않았다.
바위턱에 올라서자 피 묻은 발자국이 옛길을 향해 이어져 있었으며 붉은 연기는 그보다 가까운 소나무 아래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영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고, 검에는 피가 묻어 있었으나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발치에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 하나가 쓰러져 신음했다.
“늦었어.”
아영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반 각 안 지났습니다.”
“연기 보고 올 때까지가 반 각이거든.”
풍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고 다리에 힘이 빠질 것 같았으나 품에 안은 석구 때문에 버텨야 했다. 아영은 풍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팔 안에 있는 아이를 발견하자 곧장 검을 거뒀다.
“살아 있어?”
“독에 당했습니다. 빨리 어르신께 가야 합니다.”
아영은 쓰러진 사내의 허리띠를 풀어 두 손을 묶었고 사내의 어깨에는 얕은 검상이 있었고 무릎 뒤쪽은 돌에 맞은 듯 부어 있었다. 풍이 흔적을 살피는 사이, 아영은 사내가 달아나는 길목을 먼저 끊은 모양이었다.
“혼자 싸우지 말라 했잖습니까.”
“저자가 먼저 덤볐어. 나도 경고부터 했고.”
“소리부터 지르라고 했습니다.”
“연기 피웠잖아.”
“싸운 뒤에 피우셨지요?”
아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검은 옷을 입었다고 다 나쁜 놈으로 몰아간다면서 갑자기 단도를 던지는데, 그럼 맞아 줘?”
풍은 더 따지고 싶었으나 석구의 숨결이 가늘어지고 있었으며 그가 아이를 고쳐 안자 아영은 사내를 묶은 줄을 어깨에 걸었다.
“먼저 내려가. 이자는 내가 끌고 갈게.”
“혼자서는 무겁습니다.”
“누가 네 걱정 해 달랬어? 석구부터 살려.”
아영은 줄을 힘껏 당겼고 사내의 몸이 진흙 위를 미끄러지자 그녀도 함께 비틀거렸지만 줄을 놓지 않았다. 풍은 잠깐 망설이다 산 아래로 발을 돌렸고 몇 걸음 내려간 뒤 돌아보니, 아영은 이를 악문 채 사내를 끌고 오고 있었다.
풍은 되돌아가 사내를 한 손으로 들어 옆구리에 끼었다.
“석구부터 살리라니까.”
“함께 내려가는 게 더 빠릅니다.”
“그 힘을 이럴 때는 잘도 쓰네.”
“이럴 때 쓰라고 배운 것 아닙니까?”
아영은 무어라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고 대신 앞장서 나뭇가지를 걷어 내며 가장 평탄한 길을 골랐다.
현허는 계곡 입구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석구를 넘겨받은 그는 독침과 상처를 확인한 뒤 곧바로 아이의 등에 손을 댔다. 검푸르게 변하던 입술이 천천히 제 빛을 되찾자, 뒤늦게 따라온 석구의 어머니가 땅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붙잡힌 사내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턱 안쪽에 숨긴 독환까지 깨물려 했으나 아영이 먼저 턱을 쳐내 실패했고, 품에서는 은전 몇 닢과 장터의 점포 이름이 적힌 쪽지만 나왔다. 점포들은 모두 사라진 사람들의 마을과 이어지는 옛길 근처에 있었다.
현허는 사내의 기맥과 혈도를 봉한 뒤 독환을 빼내고 숯막의 빈 저장칸에 가뒀다. 문과 창에는 안에서 끊을 수 없는 쇠사슬을 둘렀고, 이튿날 자신이 남아 포로를 지키며 입을 열게 하겠다고 두 아이에게 일렀다.
현허는 쪽지를 품에 넣으며 물었다.
“어찌 찾았느냐?”
풍은 자신이 본 기운과 지나치게 선명했던 거짓 흔적을 설명했고 두 사람이 갈라졌다는 대목에서 현허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풍은 변명하지 않았다.
“제가 허락했습니다.”
“제가 고집부렸어요.”
아영의 말이 거의 동시에 겹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아영이 먼저 눈을 흘겼다.
“네가 왜 다 뒤집어쓰는데?”
“제가 말리지 못했습니다.”
“허락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네 부하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풍은 대답을 찾지 못했고 위험한 곳에 아영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붙잡아 두는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었다. 산정상의 평온이 끝나면 자신은 북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사라진 사람들을 찾고 은빛 반지가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려면, 검은 옷의 자들이 다니는 길로 들어가야 했다.
아영은 그 길을 함께 가려는 듯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택한 겁니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풍이 혼자 위험한 곳으로 가도 되는 것처럼, 저도 제 길을 고를 수 있어요.”
현허는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보았고 풍은 젖은 소매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았다. 석구를 구하려 계곡으로 내려간 일은 후회하지 않았고 아영도 옛길로 향했기에 사내를 붙잡고 쪽지를 얻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택했지만 어느 하나가 틀렸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동무라면 같은 길만 걸어야 한다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풍은 아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아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무엇이?”
“아영이 저와 다르게 고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에는 먼저 까닭을 듣겠습니다.”
“다음에도 따로 갈 생각부터 하는 건 아니고?”
“그건…… 상황을 봐야 합니다.”
아영은 어이없다는 듯 풍을 노려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못해.”
그날 저녁, 석구는 의식을 되찾았다. 아이는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장날마다 약초꾼과 짐꾼을 살폈으며, 건장한 사람의 이름을 나무패에 적었다고 말했다. 붙잡힌 사내의 쪽지에 적힌 점포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다음 날 열리는 장에서 짐꾼을 모을 예정이었다.
현허는 쪽지를 화롯불 옆에 펼쳐 놓고 오래 살폈고 창밖에서는 처마 끝에 맺힌 빗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마침 식량과 등잔기름도 바닥이 났구나.”
현허가 장터 이름 하나를 짚었다.
“내일 둘이 산 아래 장에 다녀오너라. 필요한 물건을 사고, 이 점포 주변을 눈에 담아 두되 먼저 손을 쓰지는 마라.”
아영이 풍보다 먼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같은 길이네.”
풍은 장터 한쪽에 그려진 검은 이리 문양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에 밴 희미한 기운은 독침을 남기고 달아난 감시자의 먹빛 잔흔과 닮아 있었다.
다음 날 장터에서 그 흔적을 다시 만난다면,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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