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비탈을 다 오른 뒤에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헤진 외투 아래로 드러난 목은 말라 있었고 신발에는 진흙이 두껍게 굳어 있었다. 그 뒤로 부서진 수레와 지친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왔는데, 인간이 대부분이었으나 황갈색 귀를 늘어뜨린 토끼수인 모자와 한쪽 뿔이 부러진 아인종 사내도 섞여 있었다.
모두 스물셋이었다.
강철보루에는 먼저 터를 닦던 다섯 어른과 아이샤, 뒤이어 합류한 어른 열셋과 아이 넷까지 모두 스물셋이 있었다. 그들만으로도 화로와 배수로, 천막을 세우기에는 손이 빠듯했는데, 하루아침에 꼭 그만큼의 사람이 더해진 셈이었다.
라칸이 새로 온 이들과 두 걸음쯤 거리를 두고 섰다. 손은 검자루 가까이에 있었지만 칼을 뽑지는 않았다.
“북쪽 골짜기에서 만났어. 연기를 보고 왔다더군.”
노인의 시선이 강무진과 도리아를 거쳐 화로에 머물렀다. 불을 보는 눈에는 두려움보다 허기가 먼저 비쳤다. 오래 꺼지지 않는 불을 보지 못한 사람의 눈이었다.
“여기가…… 강철보루입니까?”
로젠이 장부를 덮고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브레나 마을입니다. 북쪽으로 사흘 거리였지요.”
라칸의 귀가 뒤로 조금 눕는 것을 강무진은 보았다. 그가 아는 지명인 듯했다.
로젠이 물었다.
“마을이 있었던 곳입니까?”
“이제는 없습니다.”
노인은 품에서 부러진 괭이날을 꺼냈다. 날 한가운데가 검게 녹아 있었으며, 깨진 단면은 억지로 비튼 듯 거칠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이 왔습니다. 곡식을 내놓으라더군요. 작년에도 가져갔고, 봄에도 가져갔습니다. 더는 없다고 했더니 사람을 세었습니다.”
노인의 손가락이 괭이날을 움켜쥐었다.
“곡식 대신 데려가겠다고.”
수레 뒤에 있던 여인이 아이의 귀를 막자,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강무진은 노인이 내민 괭이날을 받아 들었다.
무른 저탄소강이었다. 여러 해 흙과 돌을 찍어 날 끝이 닳았고, 주인이 몇 차례 불에 달궈 펴 쓴 흔적이 있었다. 깨진 자리에는 농기구로 쓰다 생길 수 없는 비틀림이 남아 있었는데, 넓은 쇠붙이로 옆면을 내리찍은 뒤 짓밟아 꺾은 모양이었다.
사람이 입을 다물어도 부러진 쇠에는 가해진 힘이 남았다.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도망친 사람은 이것뿐입니까?”
강무진이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흩어졌습니다. 남쪽으로 간 사람도 있고 숲으로 숨은 사람도 있습니다. 잡힌 사람도…… 많습니다.”
강무진은 괭이날을 내려다보다가 화로 옆에 놓았다.
“고칠 수 있습니다.”
노인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지만, 강무진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로젠이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부상자는 앞으로 나오십시오. 아이와 노인은 왼쪽 천막에서 쉬게 하겠습니다. 물은 한 번에 많이 마시지 말고 반 그릇씩 드십시오.”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먹을 것은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굶겨 내보내지도 않겠습니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할 수 있는 일을 나누겠습니다.”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받아 주시는 겁니까?”
“누가 왔는지도 모르면서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로젠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이름, 고향, 할 수 있는 일, 함께 온 가족을 적겠습니다. 무기를 지닌 분도 말씀해 주십시오.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밤에 어느 천막에 무기가 있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뿔이 부러진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금이라도 매기려고?”
“지금 거둘 수 있는 세금은 진흙과 돌뿐입니다.”
로젠은 비어 있는 서쪽 땅을 가리켰다.
“마침 둘 다 많이 필요합니다.”
짧은 웃음이 몇 군데서 흘러나오며 굳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토끼수인 여인이 물었다.
“일하지 못하면 쫓겨납니까?”
그의 품에 안긴 아이는 열이 있는지 뺨이 붉었다.
“아이와 환자에게 삽을 쥐여 줄 만큼 형편없는 곳은 아닙니다.”
로젠이 아이샤를 불렀다.
“아이샤, 물과 깨끗한 천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응. 아니, 네.”
아이샤가 물통 쪽으로 뛰어가자 토끼수인 여인은 아이샤의 짧은 뿔과 꼬리를 확인하고, 품에 안은 아이를 조금 느슨하게 끌어안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칸은 수레를 비탈 위로 끌어 올렸고, 기울어진 바퀴가 돌 때마다 축이 거칠게 울었다. 도리아가 그 소리를 듣고 혀를 찼다.
“저걸 끌고 사흘을 왔다고? 바퀴가 주인을 버리지 않은 게 용하군.”
그는 수레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수염 끝에 진흙이 묻자 곧장 몸을 뺐다.
“강무진, 자네가 보게.”
“왜 내가 봅니까?”
“내 수염에 흙이 묻었네.”
“이미 묻었습니다.”
“더 묻으면 안 되지.”
도리아는 수염을 털며 화로로 돌아갔다. 자기 화로 앞에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면서 수레 수리는 망설임 없이 넘겼다.
강무진은 수레 옆에 쪼그려 앉았다.
바퀴를 묶은 철테는 순도가 낮았고 한쪽이 늘어나 나무와 손가락 하나만큼 벌어져 있었다. 축핀도 절반 가까이 닳아 이대로라면 다음 비탈에서 빠질 터였다.
그가 손바닥을 철테에 대자 차갑고 거친 결이 손안으로 번졌으며, 쇠 안에 쌓인 응력이 비뚤어진 원을 따라 몰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권능으로 당장 오므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늘어난 쇠를 억지로 밀어 넣으면 다른 쪽이 솟기에, 불에 달궈 길이를 줄이고 균형을 다시 잡아야 오래 버텼다.
“짐을 내리십시오.”
수레 주인이 황급히 자루를 옮기자 말린 콩 몇 줌과 나무 그릇이 굴러 나왔다. 가진 것의 전부가 수레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강무진은 철테를 벗겨 화로 가장자리에 넣었다. 검붉은 빛이 전체에 고르게 돌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루 위에 올렸다.
탕. 탕. 탕.
늘어난 자리를 조금씩 모으며 세 번 두드리고 돌렸다. 다시 세 번 두드렸다. 원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바퀴는 같은 곳부터 닳았다.
사람들이 망치 소리를 따라 모여들었다.
강무진이 달군 철테를 바퀴 둘레에 끼우자 어느새 물통을 들고 온 도리아가 물을 부었다.
치익.
수증기가 솟고, 식은 철테가 수축하며 나무 바퀴를 단단히 물었다.
“축핀도 갈아야 합니다.”
수레 주인이 허리를 숙였다.
“대가는…… 지금 가진 게 없습니다.”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쇠가 귀하지 않습니까.”
“수레가 부러지면 나를 짐도 잃습니다.”
도리아가 짧은 철봉을 던졌다.
“너무 좋게 만들진 말게. 수레가 혼자 달아날 테니.”
“그럴 쇠는 아닙니다.”
“농담일세.”
“압니다.”
도리아가 크흠, 하고 수염을 쓸었다.
강무진은 철봉을 달구었다. 표면만 무르게 하지 않고 중심까지 열이 스미도록 기다렸고, 쇠의 결이 느슨해지자 네모난 봉을 여덟 면으로 두드린 뒤 둥글렸다. 끝에는 빠짐을 막을 턱을 남겼다.
새 축핀을 밀어 넣고 쐐기를 박자 바퀴가 흔들림 없이 돌았다.
수레 주인은 몇 번이고 바퀴를 굴렸다.
“새것 같습니다.”
“새것은 아닙니다.”
강무진은 손의 검댕을 털었다.
“고쳐 쓸 수 있는 물건입니다. 기름을 자주 먹이십시오.”
사내가 수레에서 콩 자루를 꺼내려 하자 강무진이 막았다.
“아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냥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일을 하십시오.”
로젠이 장부를 들고 다가왔다.
“수레를 다룰 줄 아십니까?”
“마을에서 목수 일을 했습니다. 바퀴도 만들었고요.”
“잘됐군요. 거처를 지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름은?”
“마르텐입니다.”
로젠은 장부에 적었다.
마르텐. 인간. 목수. 가족 셋.
그 뒤로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렸다.
노인은 하몬이라 했으며 평생 밭을 갈았고 돌담을 쌓을 줄 알았다. 토끼수인 여인은 세아였으며 약초를 구별했고, 뿔이 부러진 아인종 사내 쿠른은 염소를 치고 가죽을 다뤘다.
로젠이 묻는 순서는 누구에게나 같았다.
이름. 가족. 할 수 있는 일. 다친 곳.
신분을 묻는 칸은 없었다.
“전에 어느 영주의 백성이었는지는 적지 않습니까?”
하몬이 물었다.
로젠의 펜이 잠시 멈췄다.
“그 영주가 지금 여러분을 먹이고 지켜 줍니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필요하면 나중에 적겠습니다. 지금은 살아남는 데 쓸 내용부터 적지요.”
강무진은 로젠의 장부를 보았다.
화로도 겉벽부터 올리지 않았다. 바람길과 불길이 먼저였으며, 기초가 버티지 못하면 장식은 무너질 무게만 늘렸다.
로젠은 사람을 모으는 순서를 알고 있었다.
그날 오전, 모루 앞에는 날 빠진 낫과 뭉개진 삽, 구멍 난 솥이 한꺼번에 쌓였다. 강무진은 새 쇠를 쓰는 대신 멀쩡한 부분을 남겨 농기구부터 되살렸다. 보이지 않는 금을 묻는 아이샤에게는 낫의 슴베를 만지게 했다.
“쇠는 말 안 해요.”
“망가질 때는 크게 말합니다. 그전에 알아듣는 게 장인입니다.”
한낮이 되기 전에 로젠이 계산을 들고 왔다.
“배급을 그대로 두면 엿새입니다.”
망치 소리가 멎었다. 일손이 두 배가 됐다는 기쁨이 먹일 입도 두 배가 됐다는 현실에 부딪혔다.
강무진은 수리 대기품을 세 무더기로 나눴다.
“오늘 밭과 저장고에 쓸 도구만 고칩니다. 마르텐은 거처보다 저장고의 뼈대부터 세우고, 하몬은 서쪽 물길과 밭을 맡아 주십시오. 남쪽 교역로를 열 때까지 북쪽 경계는 두 배로 세웁니다.”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기술이 곧 자리로 바뀌었다. 목수는 곧은 부재를 골랐고, 돌담을 쌓던 노인은 무른 지반부터 걷어 냈으며, 세아와 실바나는 먹을 수 있는 약초와 독초를 갈랐다. 라칸은 가장 큰 돌을 등에 지고 북쪽 비탈로 올라 말 대신 방향을 보였다.
하몬이 수리를 마친 괭이를 받아 들었다.
“다시 밭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만들면 됩니다.”
짧아진 괭이날이 흙을 처음 뒤집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뒤따랐다. 대장간 앞에는 인간의 낫과 수인의 가죽칼, 아인종의 솥이 남았고, 불에 들어가면 모두 같은 쇠였다.
해가 진 뒤 첫 공동 화덕에서 묽은 콩죽이 끓었다. 그릇이 모자라 사람들은 나무잔과 솥뚜껑을 들고 줄을 섰으며, 로젠이 아이와 환자를 앞에 세웠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이샤가 화로 옆에 앉아 죽을 한 숟갈 떴다.
“사람이 엄청 많아졌어요.”
“그렇습니다.”
“내일은 더 와요?”
강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기는 멀리서도 보였다. 불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올 터였다.
불을 끄려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로젠은 주춧돌 옆에 판자를 세우고 숯으로 항목을 적었다.
물.
식량.
거처.
작업.
경계.
하몬이 마지막 글자를 가리켰다.
“경계는 누가 섭니까?”
라칸이 빈 그릇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오늘은 내가 돈다.”
강무진은 그의 장화에 밴 진흙과 돌을 나른 팔의 피로를 보았다.
“서쪽은 내가 맡겠습니다.”
“대장장이는 불이나 봐.”
“불은 도리아가 봅니다.”
도리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가 정했나?”
“지금 정했습니다.”
“크흠. 내 화로니 틀린 말은 아니군.”
실바나도 그릇을 내려놓았다.
“동쪽 구릉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곳에서는 숲길까지 보입니다.”
로젠은 세 사람의 이름과 시간을 판자에 적으며 횃불을 둘 위치와 순찰 경로도 표시했다.
거창한 법도, 높은 벽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급 순서를 알았고 잘 곳을 얻었으며 내일 맡을 일을 들었다.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강철보루는 작은 공사장을 넘어 공동체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밤이 내려앉았다.
화로의 불은 낮아졌고 천막들 사이로 고른 숨소리가 번졌다. 수리한 수레는 저장고 터 옆에 섰으며, 하몬의 괭이는 주춧돌에 기대어 있었다.
강무진은 서쪽 비탈을 천천히 걸었다.
쇠의 감각을 넓히자 보루 안의 금속들이 어둠 속 불씨처럼 떠올랐다.
천막을 붙든 못.
화로의 걸쇠.
사람들이 신고한 칼 세 자루.
움직이는 라칸의 검.
동쪽 구릉을 오르는 실바나의 화살촉.
강무진이 걸음을 멈췄다.
북서쪽 아래에서 낯선 금속이 느껴졌다.
나무와 가죽으로 감싼 쇠가 낮게 움직였다. 하나가 지나가면 뒤에서 또 하나가 따랐는데, 피난민의 흐트러진 걸음과 달리 일정한 간격을 지켰고 쇠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눌러 잡고 있었다.
강무진은 허리를 숙여 땅에 손을 댔다.
차가운 흙 너머로 미세한 떨림이 번졌다.
여섯.
아니, 일곱이었다.
맨 앞에는 검집에 든 곡도가 있었고, 뒤의 셋은 짧은 창날을 지녔다. 가장 뒤에서는 쇠못을 촘촘히 박은 물건이 끌려왔다.
짐을 싣는 도구가 아니었다.
사람을 붙잡는 그물이었다.
강무진이 몸을 일으켰다.
북쪽 어둠 속에서 라칸의 검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곧이어 낮고 짧은 휘파람이 울렸다.
경계 신호였다.
노인의 괭이날을 부러뜨린 것과 같은 힘이, 이번에는 그 불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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