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이 두 번째로 울리기 전에 강무진은 달렸다.
보루 안의 쇠가 한꺼번에 흔들렸다. 천막 속 칼 세 자루가 들썩이고 화로 옆에 세워 둔 집게가 바닥으로 넘어지자, 잠에서 깬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뒤따랐다.
“불을 키우지 마십시오.”
강무진이 낮게 말하자 가까운 천막에서 얼굴을 내민 로젠이 즉시 말을 받았다.
“횃불은 그대로 둬라! 아이들과 다치기 쉬운 사람은 화로 뒤로 이동시키고, 무기를 가진 자만 주춧돌 앞으로 모여라.”
강무진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북서쪽의 일곱은 휘파람을 듣자마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셋이 낮은 비탈을 따라 서쪽으로 벌어지는 동안 둘은 뒤로 물러났지만, 곡도를 찬 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가장 뒤의 그물도 멈췄다.
도망치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들킨 뒤의 배치를 이미 익힌 자들이었다.
강무진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낮에 농기구를 고치느라 손질을 미뤘던 칼이라 날 끝에는 작은 이가 빠졌고, 중심도 손잡이 쪽으로 지나치게 쏠려 있었다.
좋은 검은 아니었다.
지금은 베는 것보다 막는 데 쓰면 됐다.
북쪽 비탈 너머에서 금속이 세차게 부딪쳤다.
라칸의 검이었다.
짧은 창날 둘이 좌우에서 달려들자 라칸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첫 창대를 왼팔로 걷어내며 어깨로 적의 가슴을 들이받는 순간, 늑대수인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어둠을 갈랐다.
두 번째 창이 라칸의 옆구리를 노렸다.
강무진은 손을 뻗었다.
창날의 철이 손끝에서 선명해졌다. 순도가 낮은 데다 제대로 식히지 않아 날과 슴베의 경도가 고르지 않았으므로, 날을 억지로 비틀면 부러질 터였다.
그는 부러뜨리지 않았다.
창날이 꿰뚫고 지나갈 방향만 틀었다.
마족의 손에서 창대가 홱 돌아가며 창끝이 라칸의 옆구리를 스쳤고, 그대로 흙바닥에 박혔다.
라칸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마족의 가죽 갑옷 사이를 치고 들어간 날이 어깨를 깊이 갈랐으며, 적이 비틀거리는 순간 라칸은 검을 뽑아 반대편의 창병을 베었다.
“일곱이다!”
강무진이 외치자 라칸이 쓰러진 적을 넘어섰다.
“여긴 둘!”
“서쪽에 셋. 뒤에 둘.”
“대장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라칸의 귀가 뒤로 눕는 것이 보였다. 곡도를 찬 자가 지휘관이라는 판단은 같았다.
서쪽으로 벌어졌던 셋이 보루 쪽으로 달리자 강무진은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화로가 아니라 천막이었다. 쇠붙이를 숨긴 채 이동하는 방식도, 끌고 온 그물도 목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찰대는 보루의 수를 세러 온 것만이 아니었다.
잡아갈 수 있으면 잡아갈 생각이었다.
강무진의 걸음이 느려졌다.
감정이 뜨거워질수록 손은 차가워져야 했다. 불 앞에서 서두른 쇠는 속에 금이 갔으며, 전장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라칸.”
“안 놓쳐.”
라칸이 먼저 지휘관 쪽으로 몸을 날리는 동안 강무진은 서쪽 비탈을 가로질렀다.
어둠 속에서 짧은 창 하나가 날아왔다. 곧은 투척이 아니라 바람에 밀릴 것을 계산해 오른쪽으로 조금 비껴 던진 창이었다.
강무진은 검을 세웠다.
창끝이 닿기 직전 철의 결을 밀자 날카로운 소리가 터졌다.
쨍.
창날이 검신을 따라 미끄러졌다. 힘을 정면으로 받지 않은 덕에 손목에는 둔한 충격만 남았고, 날아온 창은 강무진의 어깨를 지나 뒤쪽 흙에 꽂혔다.
그사이 적 둘이 갈라졌다.
하나는 강무진을 막았고, 나머지는 천막으로 향했다.
“도리아!”
“보고 있네!”
화로 앞에서 불빛이 번쩍이더니 도리아가 긴 자루망치를 휘둘렀다. 평소 쇳덩이를 옮길 때 쓰던 망치였으나 드워프의 팔에서 돌아가자 사람 머리만 한 돌덩이처럼 보였다.
천막으로 달려들던 마족이 방패를 들었다.
망치가 방패 한가운데 떨어지며 둔중한 소리를 냈고, 쇠테가 찌그러진 방패와 함께 마족도 발을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나뒹굴었다.
“크흠! 남의 화로에 신발 신고 들어오는 놈은 손모가지부터 내놓는 법이지!”
“여긴 화로 밖입니다.”
“내 불빛 닿는 데까지가 화로다!”
도리아는 쓰러진 적의 창을 밟아 부러뜨리고는 망치 자루를 짧게 쥐어 두 번째 공격을 막았다.
강무진 앞의 마족이 단검을 뽑자 가죽 두건 아래로 회색 피부와 뒤틀린 뿔이 드러났다. 상대는 강무진의 검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본 듯, 이 빠진 날과 낡은 손잡이를 시선으로 훑었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검만 보았다.
마족이 낮게 파고들며 강무진의 허벅지를 노려 단검을 찔렀다. 강무진은 반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손목을 눌러 베었고, 마족은 단검을 세워 막았다.
두 날이 맞닿았다.
강무진은 그 순간 상대 단검의 상태를 읽었다. 겉은 검게 산화됐지만 심부에는 탄소가 지나치게 몰려 있어 단단한 대신 충격을 견디지 못하는 쇠였으며, 날 가운데에는 이미 가느다란 균열이 세 줄이나 나 있었다.
그는 검을 비틀어 균열이 난 자리를 정확히 눌렀다.
단검이 세 조각으로 깨지자 마족의 눈이 커졌다.
강무진은 손잡이 끝으로 턱을 올려쳤다. 상대가 뒤로 젖혀지는 동안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고 검을 목 아래에 박았다.
짧게 끝냈다.
피를 털 시간은 없었다.
강무진이 고개를 들었을 때 동쪽 구릉에서 활시위 소리가 났다.
한 번.
잠깐의 간격 뒤에 두 번.
실바나의 화살은 횃불 바깥에서 움직이던 마족의 허벅지와 어깨에 박혔다. 죽이기보다 발을 묶는 사격이었기에 적은 비명을 삼키며 무릎을 꿇었다.
실바나가 활을 쥔 채 구릉 아래로 내려왔고, 그의 뒤편에는 천막에서 나온 피난민 셋이 서 있었다. 낫과 장작패기용 도끼를 들었지만 가까이 오지는 못했다.
“서쪽의 셋은 모두 보입니다.”
“한 놈이 남았습니다.”
강무진이 대답했다.
가장 뒤에서 그물을 끌던 자였다.
그 금속이 땅에서 들리는 것을 느낀 강무진은 즉시 몸을 돌렸다.
쇠못이 촘촘히 박힌 그물이 공중에서 펼쳐졌다. 도리아와 실바나, 천막 앞의 피난민들까지 한꺼번에 덮을 만큼 넓었고, 가장자리마다 달린 납추는 원을 그리며 날아왔다.
“숙이십시오!”
사람들이 몸을 낮추자 강무진은 검을 놓았다.
양손을 펼치자 그물 가장자리의 금속들이 손가락 끝을 잡아당겼다. 쇠못만 수십 개라 각각을 따로 움직일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는 그물을 하나의 물건으로 느끼려 했다.
문제는 납추였다. 쇠와 성질이 다른 데다 무르고 무거웠다. 같은 힘으로 잡으면 쇠못만 멈추고 그물은 관성에 끌려 계속 날아올 터였다.
강무진은 가장 가까운 쇠못 여섯 개를 골랐다.
위를 막지 않았다.
아래로 당겼다.
펼쳐지던 그물이 중간에서 꺾이며 앞쪽 가장자리가 땅에 처박혔고, 뒤쪽이 그 위로 접히면서 납추끼리 부딪쳐 둔한 소리를 냈다.
그물을 던진 마족은 줄을 놓고 달아났다.
“실바나.”
강무진이 부르기도 전에 활시위가 울렸다.
화살이 종아리에 박히자 마족은 두 걸음을 더 뛰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실바나는 다음 화살을 메긴 채 말했다.
“살려둘 필요가 있습니까?”
강무진은 북쪽을 보았다.
라칸의 검과 곡도가 빠르게 부딪치고 있었다.
“먼저 끝내겠습니다.”
지휘관의 곡도는 다른 무기보다 나았다. 날 폭은 넓었지만 불필요하게 두껍지 않았으며, 휘어진 각도도 갑옷 틈을 파고들기 좋았다. 라칸의 검과 여섯 번이나 맞부딪친 탓에 금속의 온도는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반면 라칸의 검에는 문제가 생겼다.
낮에 정비하지 못한 날 끝의 흠집이 충격을 받을 때마다 안으로 번졌고, 두 번 더 세게 부딪치면 부러질 가능성이 컸다.
“라칸, 검을 세우지 마십시오!”
라칸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마족 지휘관의 곡도가 내려오자 라칸은 검을 눕혀 흘렸다. 불꽃이 비스듬히 튀고 곡도가 땅을 스치는 순간, 라칸은 팔꿈치로 상대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지휘관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강무진이 접근하자 놈은 즉시 거리를 벌렸다. 곡도 끝이 라칸과 강무진 사이를 오가는 동안에도 뒤로 달아날 길을 살피는 눈은 차분했다.
강무진은 검을 줍지 않았다.
대신 땅에 박혀 있던 짧은 창을 끌어당기자 흙이 튀며 창이 손으로 날아왔다.
마족 지휘관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술사인가.”
대륙 공용어였다. 발음은 딱딱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강무진은 창의 균형을 확인했다. 슴베가 짧아 거칠게 휘두르면 날이 빠질 구조였다.
“대장장이입니다.”
“그 차이는 회수 후에 분류하지.”
놈은 끝까지 사람을 물건처럼 말했다.
지휘관이 허리에서 작은 뿔피리를 꺼내자 강무진은 손가락을 굽혔다.
뿔피리 테두리에 둘린 철환이 옆으로 튀면서 피리가 입에 닿기 전에 놈의 손목이 돌아갔다. 신호음 대신 거친 숨만 샜다.
라칸이 뛰어들었다.
곡도와 검이 다시 맞닿았지만 이번에는 라칸이 검날을 세우지 않았다. 납작한 면으로 곡도를 밀어내며 몸을 붙이자 마족 지휘관이 무릎을 올렸다. 라칸은 옆구리로 그대로 받아냈다.
둔한 충격음이 났다.
라칸의 입에서 숨이 터졌으나 그는 물러나지 않고 왼손으로 놈의 곡도 손잡이를 틀어쥐었다.
“대장장이!”
강무진은 창을 찔렀다.
창날이 지휘관의 가슴 갑옷에 닿았다. 얇은 철판 여러 장을 가죽끈으로 엮은 갑옷이라 틈은 좁았고, 정면에서 뚫으려 하면 창부터 망가질 터였다.
강무진은 철판을 밀었다.
가운데 판과 오른쪽 판 사이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벌어지자 그 틈으로 창날이 들어갔다.
마족 지휘관의 몸이 굳으며 곡도가 손에서 떨어졌다.
라칸은 놈을 밀어내고 한 걸음 물러났다. 거친 숨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강무진이 창을 뽑자 지휘관은 무릎을 꿇었다. 손은 상처를 막으려 했으나 제대로 올라가지 못했다.
“이곳의 인원과 방비를 확인한 자가 또 있습니까?”
놈이 강무진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관측되었다.”
“누구에게.”
입가에서 검은 피가 흘렀지만 놈은 웃지 않았다. 자기가 죽는 순간까지도 손실을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불은 멀리서도 보인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몸이 앞으로 쓰러진 뒤에도 라칸은 검을 든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강무진은 먼저 그의 옆구리를 보았는데, 옷은 찢어졌지만 피는 조금밖에 나지 않았다.
“갈비뼈는?”
“멀쩡해.”
“맞은 쪽으로 숨을 쉬어보십시오.”
라칸이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아프긴 하네.”
“금은 갔을 수 있습니다.”
“안 죽어.”
“죽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라칸은 대꾸하지 않은 채 검을 내려다보았고, 강무진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날 끝에서 시작된 균열은 검신의 삼분의 일까지 번져 있었다.
“두 번 더 막았으면 부러졌습니다.”
“그러니까 안 막았잖아.”
“내일 고치겠습니다.”
“더 좋은 걸로.”
“쇠부터 찾으십시오.”
라칸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평소와 같은 소리였다.
보루 쪽에서는 로젠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도리아는 부상당한 마족의 무기를 발로 차서 멀리 치웠으며, 실바나는 쓰러진 자들의 맥을 확인했다.
일곱 가운데 살아 있는 자는 없었다.
화살을 맞고 쓰러졌던 둘은 숨이 붙어 있었지만, 하나는 품 안의 독을 삼켰고 다른 하나는 도리아에게 제압되는 과정에서 끝까지 단검을 놓지 않았다.
강무진은 그들의 장비를 한곳에 모았다.
곡도 하나.
짧은 창 셋.
단검 넷.
쇠못 박힌 포획용 그물.
검은 철환이 둘린 뿔피리.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창날에는 오래된 핏자국이 층층이 스며 있었고, 곡도의 칼등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홈이 새겨져 있었다. 전공을 표시한 것인지, 잡아간 사람의 수를 센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물의 쇠못 끝에는 미늘이 달려 있었다. 덮인 사람이 몸부림칠수록 살과 옷에 더 깊이 걸리도록 만든 구조였다.
강무진이 그물 한쪽을 들어 올리자 피난민들 사이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한 수인 여자가 아이를 등 뒤로 감쌌는데, 그 팔뚝에는 오래된 밧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몬은 수리한 괭이를 양손으로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샤가 화로 뒤에서 나왔다.
로젠이 막으려 했으나 아이는 그물 앞에서 멈춰 섰다. 쇠못을 잠시 바라보던 아이샤가 소매 속으로 손을 감췄다.
강무진은 그물을 접었다.
“도리아.”
“왜 부르나.”
“못을 전부 뽑아 녹이겠습니다.”
도리아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쇠가 형편없네.”
“못으로는 쓸 수 있습니다.”
“어디다 박으려고?”
강무진은 방벽이 놓일 자리를 보았다.
낮에 돌을 쌓기 시작한 흔적이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졌지만 높이는 무릎에도 미치지 못했다. 북서쪽 비탈은 완전히 열려 있었고, 서쪽에는 망가진 수레 하나가 길목을 막은 전부였다.
“문과 방책에 씁니다.”
도리아가 수염을 한 번 쓸었다.
“잡으러 온 도구로 막겠다?”
“쇠의 용도는 쓰는 사람이 정합니다.”
“쇠맛 좀 아는군.”
도리아는 그물을 어깨에 둘러메고 화로로 걸어갔다.
긴장이 조금 풀리자 사람들의 숨소리가 커졌다. 누군가는 주저앉았고, 누군가는 뒤늦게 손의 떨림을 감추려 무기를 내려놓았다.
로젠은 부상자를 확인한 뒤 강무진에게 다가왔다.
“우리 쪽 사망자는 없습니다. 발목을 접질린 사람 하나, 도리아 님의 망치에 튄 방패 조각으로 팔을 다친 사람 하나입니다.”
“적이 노린 것은 천막이었습니다.”
“예. 경계를 피했다면 사람을 잡아간 뒤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젠은 열린 비탈을 둘러보았다. 얼굴에는 피로가 짙었지만 말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선택지는 둘입니다. 내일부터 거처 작업을 멈추고 방벽에 인원을 집중하거나, 거처와 방벽을 함께 진행하되 외곽에 임시 목책을 먼저 세우는 방안입니다.”
“비가 오면 천막이 버티지 못합니다.”
“두 번째 방안이 낫다고 보십니까?”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일손은 있습니다. 싸울 사람이 부족할 뿐입니다.”
그때 라칸이 다가왔다.
절뚝이지는 않았지만 왼쪽 옆구리를 감싼 팔이 조금 굳어 있었다. 그는 곡도를 강무진 앞에 내려놓았다.
“저런 놈들이 또 오면 일하던 손부터 멈춘다.”
로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벽을 세우는 사람과 지키는 사람을 나눠야 합니다.”
라칸은 피난민들을 보았다.
괭이를 든 하몬, 장작 도끼를 쥔 청년, 아이를 감싼 수인 여자, 피 묻은 천으로 팔을 동여매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각자 살아남기 위해 불가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라칸은 목덜미를 긁었다. 소매가 밀려 올라가면서 손목 위의 오래된 낙인 흉터가 드러났지만, 그는 곧바로 소매를 내리지 않았다.
“젊은 놈들 모아줘.”
로젠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싸우는 법 가르치게.”
“자경대를 만들자는 말씀이군요.”
“이름은 네가 붙여.”
라칸은 강무진 쪽을 보았다.
“내가 앞에서 다 막아도 옆으로 새면 끝이야. 오늘은 일곱이었고, 다음에는 더 오겠지.”
강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칸이 빚과 은혜를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대신 그는 천막과 사람들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구원받은 일을 갚겠다는 얼굴이 아니라, 이미 생긴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무기는 부족합니다.”
강무진이 말했다.
“만들면 되잖아.”
라칸이 답했다.
강무진은 주춧돌 옆의 괭이와 낫, 부러진 창대를 차례로 보았다. 좋은 쇠는 드물었고 숯도 빠듯한 데다 화로는 하나뿐이었다. 방벽에 쓸 경첩과 못도 만들어야 했다.
손은 둘이었다.
도리아까지 합쳐도 넷이었다.
“훈련할 사람부터 고르십시오.”
“내일 해 뜨면.”
“아닙니다.”
라칸의 귀가 움직였다.
강무진은 북서쪽 비탈을 바라보았다. 적이 밟고 온 풀은 누웠고 피 냄새가 바람을 탔다. 죽은 정찰대가 돌아가지 않으면 누군가는 이유를 확인하러 올 터였다.
불은 이미 보였다.
“지금 고르십시오.”
라칸은 잠시 강무진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들었지?”
그의 목소리가 천막 사이로 퍼졌다.
“무기 들 수 있는 놈은 주춧돌 앞으로 와. 잘 싸우는 놈 안 찾는다. 도망치지 않을 놈부터 본다.”
사람들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앞으로 나온 것은 장작 도끼를 든 청년이었다. 뒤이어 팔을 다친 남자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창대를 집었으며, 수인 여자도 아이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 줄 끝에 섰다.
하몬은 괭이를 짚고 서 있다가 한 걸음 나왔다.
라칸이 그를 보았다.
“영감은 빠져.”
“젊은이만으로 벽이 서나?”
“허리부터 펴고 말해.”
“네 갈비뼈보다 내 허리가 멀쩡할 게다.”
라칸이 입을 다물었다.
강무진은 화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리아가 이미 불씨를 깨우고 있어 접어 놓은 그물 위로 주황빛이 번졌다. 실바나는 구릉에 서서 북쪽 숲을 살폈는데, 활을 쥔 손은 고요했지만 시선은 쓰러진 마족들의 장비에서 오래 떠나지 않았다.
강무진은 그것을 보았다.
그 그물이 누구를 잡기 위해 만들어졌는지, 실바나도 알고 있을 터였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강철보루에서는 아무도 다시 눕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자경대가 될 사람들이 줄을 섰고, 다른 쪽에서는 방벽에 박을 못을 만들기 위해 포획용 그물이 잘려 나갔다. 로젠은 판자에 적힌 ‘경계’ 아래로 이름을 옮겨 적었다.
강무진은 화로 앞에 앉아 첫 쇠못을 집었다.
금속에는 아직 사람을 옭아매던 굽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달아오른 쇠를 모루에 놓았다.
망치가 내려갔다.
한 번.
굽은 부분이 펴졌다.
두 번.
미늘이 뭉개졌다.
세 번째 망치질이 울렸을 때, 동쪽 구릉 위의 실바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 숲이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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