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무진이 화로에 닿기도 전에 라칸이 비탈을 뛰어 내려왔다.
“몇입니까?”
“스물 이상.”
“방향은?”
“북서쪽.”
라칸은 더 묻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방벽 안쪽의 자경대원들이 서툴게 움직이는 동안 돌을 나르던 사람들은 통로를 비웠고, 아이를 둔 이들은 낮은 토담 뒤로 몸을 숨겼으며, 창을 받은 자들은 방벽으로 달려갔다.
누군가는 창끝을 땅에 끌었고, 누군가는 방패를 거꾸로 들었다.
라칸의 목소리가 터졌다.
“뛰지 마! 줄부터 맞춰! 적이 보이지도 않는데 넘어져 죽을 셈이냐!”
강무진은 땅에 손을 짚은 채 쇠의 움직임을 더듬었다.
철제 군화로 생각했던 작은 진동은 일정하지 않았다. 두 번씩 붙어 울렸다가 길게 쉬었으며, 무거운 쇳덩이도 하나의 갑옷이 아니라 크기가 다른 금속들이 나무 틀 안에서 서로 부딪치는 움직임이었다.
그가 감각을 얇게 펼치자 수레바퀴의 테와 축을 물린 쇠못이 먼저 잡혔다. 솥과 괭이, 부러진 낫도 한데 실려 있었고, 창날로 보였던 것 중 절반은 농기구였다. 움직임은 사람의 걸음보다 느렸다.
“공격대가 아닙니다.”
라칸이 돌아보았다.
“그럼?”
“수레 셋. 무장한 자는 일곱쯤입니다.”
로젠은 판자를 옆구리에 끼운 채 북서쪽 비탈을 살폈다.
“피난민일 가능성이 큽니다.”
“확인하고 오지.”
라칸이 검을 뽑자 로젠이 말했다.
“둘만 데려가십시오.”
라칸의 귀가 비스듬히 눕혀졌다.
“놈들이면 셋이서 막으라고?”
“놈들이라면 싸우지 말고 돌아와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건 승리가 아니라 정보입니다.”
라칸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검을 어깨에 걸쳤다.
“말은 번드르르한데, 맞는 소리라 더 거슬리는군.”
그는 자경대원 둘을 손가락으로 골랐다. 한 명은 사냥꾼 출신의 인간이었고, 다른 한 명은 뿔 한쪽이 부러진 염소 수인이었다.
“너희 둘, 따라와. 발소리 죽이고.”
셋이 비탈 너머로 사라진 뒤에도 방벽에 선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아무도 창을 내리지 못한 채 버티고 있었고, 손등에는 힘줄이 솟았으며 손가락 마디는 희게 질려 있었다.
철은 아직 제대로 열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억지로 두드리면 갈라졌다.
“내려오십시오.”
로젠이 말하자 몇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경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무기를 든 채 떨고 있으면 정작 필요할 때 팔에 힘이 남지 않습니다. 두 명씩 남고 나머지는 쉬십시오.”
그제야 방벽 위의 줄이 움직였다.
강무진은 로젠이 들고 온 판자를 보았다. 넓적한 판자 위에는 숯과 먹으로 선이 빼곡했는데, 지금의 방벽과 화로, 우물과 천막뿐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구조물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겁니까?”
“예. 어젯밤에 마무리했습니다.”
“잠은요?”
“두 시간 잤습니다.”
“적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벽은 제가 잠들었다고 대신 서주지 않으니까요.”
로젠은 판자를 작업대 위에 펼쳤다.
도면 중앙에는 화로와 우물이 있었고, 그 둘을 감싸듯 주거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바깥으로 둘러진 세 겹의 선 가운데 첫째는 목책, 둘째는 흙과 돌을 쌓은 방벽, 셋째는 비탈을 깎아 만든 해자였다.
강무진은 손가락으로 선을 따라갔다.
북서쪽 방벽은 두껍고 남동쪽은 얇았다. 지형을 따른 배치였기에 마족이 접근하기 쉬운 완만한 비탈에는 망루가 셋이었고, 가파른 암반 쪽에는 하나뿐이었다.
“문이 둘이군요.”
“정문 하나만 두면 포위됐을 때 갇힙니다. 남쪽에 작은 문을 내어 보급과 퇴로로 쓰겠습니다. 다만 바깥에서 한눈에 보이지 않도록 암반 뒤로 숨길 생각입니다.”
로젠은 작은 나무패들을 도면 위에 놓았다. 붉은 패는 자경대, 푸른 패는 물과 식량, 검은 패는 화재 진압 인력이었다.
“적이 북서쪽으로 오면 이곳에 두 조를 세웁니다. 활을 다루는 사람은 망루로, 창을 다루는 사람은 문 뒤로 보냅니다. 나머지는 예비대로 남깁니다.”
“사람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편제를 짰습니다.”
그가 얇은 가죽 문서를 펼치자 이름과 종족, 나이, 이전 직업, 다룰 수 있는 무기가 드러났다.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의 이름 옆에는 각자 알아볼 수 있도록 곡괭이, 나무, 사슴뿔, 물고기 같은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현재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서른둘입니다. 그중 군대 경험이 있는 자는 넷뿐입니다. 사냥꾼이 여섯, 광부가 아홉, 농부가 열셋입니다.”
“모두 병사로 만들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로젠은 즉시 답했다.
“광부가 모두 창을 들면 방벽을 쌓을 사람이 사라집니다. 농부가 모두 망루에 오르면 겨울 전에 밭을 만들 수 없습니다. 싸울 수 있다는 것과 계속 싸워야 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강무진은 문서를 다시 보았다.
전투조 열여섯, 건설조 아홉, 보급조 일곱이었고, 비상시에는 건설조와 보급조에서도 절반씩 방벽에 붙도록 되어 있었다. 야간 경계는 네 명씩 세 교대였다.
수보다 빈칸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궁수대. 의무 담당. 전령. 예비 무기.
실바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궁수대 칸은 비어 있을 터였다. 다친 사람을 치료할 약도, 그것을 전문적으로 다룰 사람도 없었다.
로젠이 빈칸 위에 손을 올렸다.
“없는 것을 있다고 적지는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대신 구할 방법은 두 가지씩 적어두었습니다. 치료 인력은 피난민 중 약초를 아는 이를 찾거나 인근 촌락에 사람을 보내 데려옵니다. 궁수는 실바나 님의 귀환을 기다리되, 사냥꾼들을 따로 묶어 단거리 사격부터 익힙니다.”
“돌은요?”
“북쪽 채석장이 가장 가깝지만 노출되어 있습니다. 남쪽 암반을 깎으면 느리지만 안전합니다.”
“둘 다 합시다.”
로젠이 강무진을 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북쪽에서 낮에 캐고, 남쪽은 밤에도 작업할 수 있게 길을 내십시오. 한쪽이 막혀도 다른 쪽은 남아야 합니다.”
로젠은 도면에 짧은 선을 더 그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리아가 화로 쪽에서 걸어왔다. 앞치마에는 검은 재가 묻어 있었고, 수염 끝은 가죽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크흠. 내 화로 옆에서 무슨 나라라도 그리는 얼굴들이군.”
“방벽 배치도입니다.”
“그게 커지면 나라지, 뭐가 달라?”
도리아는 판자를 들여다보다 북서쪽 벽을 굵은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긴 틀렸어.”
로젠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어느 부분이 말입니까?”
“기초가 얕아. 겉만 높이면 첫비에 배가 불러 터진다. 돌벽은 위로 쌓기 전에 아래로 묻는 거야.”
그는 숯을 집어 기존 선 아래에 톱니 같은 표시를 그렸다.
“큰 돌을 세로로 박고, 사이를 자갈과 점토로 죄어. 모서리에는 쇠꺾쇠를 넣어야 해. 인간들은 돌을 포개면 벽이 되는 줄 알지만, 돌도 결혼을 시켜놔야 오래 붙어 산다.”
“쇠꺾쇠가 많이 필요하겠군요.”
“그래서 대장간이 있잖나.”
도리아가 강무진을 향해 턱을 들었다.
“어때?”
강무진은 도면을 살피면서 땅속 광맥도 함께 느꼈다. 가까운 광맥은 순도가 낮아 그대로 제련하면 꺾쇠의 모서리부터 부스러질 가능성이 컸지만, 탄소를 과하게 먹이지 않고 넓적하게 뽑아 여러 겹 접으면 쓸 수 있었다. 벽 속에 들어갈 물건에는 칼날 같은 경도가 필요하지 않았고, 휘어도 끊어지지 않는 질김이 먼저였다.
“만들 수 있습니다.”
“몇 개나?”
로젠이 물었다.
“오늘 서른. 풀무를 하나 더 달면 쉰.”
“인원이 붙으면요?”
“사흘 뒤부터 백.”
로젠은 잠시 계산했다.
“그 속도라면 북서 방벽의 기초를 닷새 안에 묶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버티면요.”
“버티게 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강무진은 로젠의 손을 보았다. 펜을 오래 쥔 가운데손가락이 붉게 눌려 있었고, 칼을 잡던 굳은살 위로 새 굳은살이 생기고 있었다.
기사의 손이 다른 도구를 배우는 중이었다.
“영주가 필요하겠습니다.”
로젠의 말에 강무진은 도면에서 시선을 들었고, 도리아도 숯을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벽이 커지고 사람이 늘면 물과 식량, 경계 순서와 분쟁을 최종 결정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행정은 제가 맡을 수 있어도 사람들이 제 명령을 따라야 할 근거는 없습니다.”
“필요한 일이니까 따르면 됩니다.”
“모두가 강무진 님처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로젠은 도면 중앙의 화로를 짚었다.
“사람들은 강무진 님이 세운 불을 보고 모였습니다. 강무진 님이 고친 괭이로 땅을 파고, 벼린 창을 들고 방벽에 섭니다. 왕관을 쓰지 않아도 이미 중심에 서 계십니다.”
“왕관은 쇠를 좋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쇠를 어디에 쓸지는 정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북서쪽 감시병이 뿔나팔을 두 번 울렸다. 비탈 너머에서 라칸과 자경대원 둘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 낡은 수레 세 대와 마흔 명이 넘는 피난민이 이어졌다. 아이와 노인이 절반이었으며 다리를 저는 이, 피 묻은 천으로 팔을 감싼 이도 있었다.
열어 둔 문 앞에서 보급조장이 길을 막았다.
“받으면 사흘 뒤부터 곡물이 모자랍니다. 주거 구역도 이미 찼습니다. 누가 결정합니까?”
로젠은 답하지 않고 강무진을 보았다. 도면 위의 빈칸보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얼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망치로 못을 만들고도 어디에 박히는지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강무진이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여십시오. 다친 사람과 아이부터 우물 안쪽에 들입니다. 오늘 밤은 작업 천막을 비우고, 내일부터 남쪽 거처선을 늘립니다.”
보급조장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곡물이 모자라면요?”
“배급표를 다시 짭니다. 대장간 몫도 같은 비율로 줄이십시오.”
“그 결정을 누구 이름으로 남깁니까?”
강무진은 잠시 문밖의 피난민과 도면을 번갈아 보았다.
“내 이름으로 남기십시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멈춰 있던 성문이 열렸다. 라칸이 다리를 저는 노인의 수레를 직접 끌었고, 강무진은 가장 앞에 선 아이에게 우물 쪽을 가리켰다.
“왕이나 영주라는 이름은 나중에 정합니다.”
그는 로젠에게 돌아섰다.
“그때까지 사람의 생존과 방벽에 관한 결정은 내게 가져오십시오. 잘못되면 기록의 첫 줄에도 내 이름을 씁니다.”
로젠은 도면 맨 위의 빈칸에 글자를 적었다.
임시 통솔 책임, 강무진.
“명령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책임으로 남기십시오.”
도리아가 수염을 쓸어내렸지만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는 도면의 남쪽 거처선을 굵게 늘렸고, 방벽 안에서는 피난민을 맞을 물통과 담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새 피난민까지 섞인 스무 명이 공터에 섰다. 라칸은 창부터 쥐여 주지 않고 모래주머니를 들려 방벽 아래를 걷게 했다. 넘어지면 옆사람이 붙잡고, 혼자 앞서면 줄의 끝으로 돌려보냈다.
“적 앞에서 넘어지면 끌려간다. 끌려가면 이름부터 없어진다. 그러니 찌르는 법보다 함께 서는 법부터 배워.”
라칸도 같은 무게를 어깨에 올렸다. 오전에는 제각각 떨리던 줄이 해 질 무렵에는 한 사람의 보폭처럼 움직였다.
대장간에서는 아이샤가 녹슨 칼 한 자루를 손질했다. 강무진은 날을 더 세우는 대신 상한 부분만 걷어 내게 했고, 아이는 숫돌 위에서 힘을 빼고 멈춰야 할 자리를 배웠다. 붉은 녹 아래의 강이 고르게 드러났을 때 강무진이 엄지로 날을 밀었다.
“됐습니다.”
아이샤는 손잡이 가까운 무른 철에 작은 정을 대고 망치를 두 번 쳤다. 비뚤어진 세모 하나가 남았다. 완벽한 각인은 아니었지만, 누가 고쳤고 다시 망가지면 누구에게 가져와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밤이 오기 전, 첫 쇠꺾쇠 서른 개가 완성되었다.
강무진은 벌겋게 달군 철을 모루 위에 놓고 끝을 굽혔다. 광맥에서 나온 철은 불순물이 많아 열을 조금만 과하게 먹여도 표면이 푸석해졌기에, 그는 쇠 속의 온도가 고르게 퍼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겉은 밝은 주황빛이었고 속은 그보다 한 톤 어두웠다.
망치가 내려가자 불순물이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결은 길게 늘어나며 굽은 부분을 감쌌고, 강무진은 단단하게 만드는 대신 질기게 남겼다. 벽이 흔들릴 때 함께 휘었다가 돌아올 정도면 충분했다.
마지막 꺾쇠가 물통에서 식었다.
도리아가 하나를 집어 바닥에 내려치고 발로 밟아 비틀었지만, 꺾쇠는 휘었을 뿐 부러지지 않았다.
“쇠맛 좀 아는군.”
“벽 속에 들어갈 겁니다.”
“안 보인다고 대충 만들 순 없지.”
그 말에 강무진은 꺾쇠 끝에 작은 각인을 남겼다.
돌 속에 묻히면 누구도 보지 못할 표시였지만 그래도 남겼다.
로젠이 완성된 도면을 들고 왔다. 낮보다 선이 많아져 새로 온 사람들의 거처가 추가되었고, 방벽 작업 순서와 자경대의 교대표도 붙어 있었다.
도면 맨 위에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강철보루 방벽 및 거주 구획.
그 아래에는 낮에 없던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임시 통솔 책임, 강무진.
직함은 임시였지만 책임질 이름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내일부터 이대로 움직이겠습니다.”
로젠이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고치십시오.”
“도면을 말입니까?”
“도면도, 벽도.”
강무진은 식은 꺾쇠를 상자에 담았다.
“처음부터 완벽한 물건은 없습니다.”
로젠이 고개를 숙였다.
방벽 밖에서는 라칸이 마지막 경계조를 세우고 있었고, 아이샤는 손질한 칼들을 천으로 닦아 한 자루씩 늘어놓았다. 도리아는 화로의 불길을 낮추면서도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손을 휘저었다.
도면 위의 선들이 하나씩 땅 위로 옮겨지고 있었다.
아직 왕국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킬 자리를 정하고 서로의 이름을 적으며 내일도 남을 벽을 세우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곳은 단순한 야영지가 아니었다.
강무진은 마지막으로 땅속의 쇠를 느꼈다.
가까운 곳에서는 꺾쇠와 창날, 솥과 못이 저마다 다른 온도로 식어갔지만 방벽 너머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더 멀리, 북서쪽 끝에는 감각이 닿지 않았다.
그곳에서 무엇이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강무진은 화로 덮개를 닫았다.
“불침번을 둘 더 세우십시오.”
로젠이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강철보루의 방벽 위에는 네 개의 횃불이 더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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