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울음이 잦아들자 풍과 현허는 생존자들을 아영에게 맡긴 뒤 횃불을 들고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검붉은 섬광이 터졌던 자리에는 길게 베인 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돌벽 아래에는 검은 피에 젖은 옷자락 한 조각과 부러진 독침 두 대가 떨어져 있었다. 피는 독고무흔이 달아난 방향으로 몇 걸음 이어지다가, 바깥 골짜기로 통하는 비상 통로 앞에서 끊겨 있었다.
통로 끝의 돌문은 바깥에서 억지로 닫힌 듯 빗장이 비틀려 있었고, 문 너머 비탈에는 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어지럽게 겹쳐 있었다. 그러나 바위가 많은 마른 계곡에 닿자 발자국도 핏자국도 완전히 사라졌고 풍이 기맥시로 주위를 거듭 살폈으나 살아 있는 기운은 잡히지 않았다.
“죽은 겁니까?”
현허는 피 묻은 옷자락을 살핀 뒤 고개를 저었다.
“상처는 입었으나 치명상이라 단정할 수 없다. 시신도 없고, 피를 일부러 닦아 흔적을 끊은 자국이 있으니 살아서 빠져나갔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혈혼은요?”
“저자의 흔적도 여기서 끊겼다.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구나.”
풍은 어둠에 잠긴 계곡을 바라보았다. 독고무흔이 살아 있다면 자신들이 장원에 들이닥친 일도, 생존자들을 구해 낸 사실도 곧 배후에 알려질 터였다. 혈혼이 그를 따라잡았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으므로, 지금은 최악을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장원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사병들을 묶고 중앙 전각과 지하 시설을 수색했다. 불태우려다 만 문서 더미 속에서 납치된 이들의 출신과 약물 투여 일수가 적힌 장부 두 권을 찾아냈고, 검은 이리 문양이 찍힌 나무패와 독병도 함께 거두었다. 거래 상대의 이름은 암호로 가려져 있었지만, 사람을 북쪽으로 넘긴 날짜와 수만큼은 선명히 남아 있었다.
구해 낸 이들을 마을 어귀의 빈 객사로 옮기고서야 세 사람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현허는 밤새 방과 마루를 오가며 중독된 이들의 혈도를 짚고 몸속에 남은 독기를 조금씩 밀어냈고, 아영도 물을 끓이고 젖은 수건을 갈아 주느라 쉴 틈이 없었다. 내공을 거의 소진한 풍은 벽에 기대앉은 채 손이 필요한 곳을 살폈다.
죽은 듯 누워 있던 이들의 숨결은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차츰 고르게 이어졌고 독무를 오래 들이마신 탓에 당장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지만, 현허의 말로는 모두 큰 고비를 넘긴 듯했다. 그 말을 들은 뒤에야 풍은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 하나가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객사 안쪽에서는 사라진 가족을 되찾은 이들의 울음이 터졌고, 마당 너머에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를 부르는 통곡이 밤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기쁨과 슬픔이 한데 뒤엉킨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사람을 구했다는 뿌듯함만 품고 있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너무 무거웠다.
현허가 마지막 환자의 손목을 내려놓고 마루로 나왔고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은 수척했지만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독고무흔은 끝이 아니라 한 자락이다. 그 혼자서 이 많은 사람을 붙잡고 길목마다 눈을 심을 수는 없어. 마교와 손을 잡은 자가 장원 밖에도 있다.”
“그럼 무림맹에 알려야 하지 않아요?”
아영의 물음에 현허는 낡은 신패를 꺼내 마루에 놓았다.
“맹 안에도 한패가 있을 수 있다. 성시 밖에서 내가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옛 벗 한 사람만 불러내겠다. 그동안 생존자들은 여러 곳에 나누어 숨기고, 증언할 사람도 신분을 감춰야 해.”
풍은 객사 안의 고른 숨소리와 장원에서 가져온 장부를 번갈아 보았다.
“독고무흔이 먼저 전갈을 보내면요?”
“그자가 살아서 빠져나간 이상 틀림없이 배후에 알리려 들 게다. 그래서 해가 뜨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저자보다 먼저 믿을 사람에게 닿는 경주지.”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몸을 일으킬 수나 있고 하는 말이냐?”
현허가 풍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때 객사 안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들렸고 아영이 몸을 돌리자 풍도 반사적으로 일어서려 했으나, 텅 빈 단전이 욱신거리며 무릎이 꺾였다. 현허가 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마루 아래로 고꾸라질 뻔했다.
“네 몸부터 돌봐라. 지난밤 네가 끌어다 쓴 내공은 지금 그릇에 비해 지나치게 많았다.”
“그래도 안에 사람이…….”
“살리려고 얻은 목숨을 함부로 쓰는 것도 협은 아니다.”
풍은 입을 다물었다. 아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흘겨본 뒤 객사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따뜻한 물을 찾는 목소리와 함께 부산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현허는 풍을 다시 마루에 앉힌 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독무 속에서 네가 한 일은 대단했다. 그러나 혈혼이 길을 일러 주지 않았다면 네 힘만으로 모두 구하지 못했을 게야. 반대로 네 눈과 양강지기가 없었다면, 그자가 방법을 알려 주었어도 사람들은 살아 나오지 못했겠지.”
풍은 검붉은 도를 들고 사라진 사내를 떠올렸다. 혈혼은 자신을 시험했고 현허에게 살기까지 드러냈지만, 독항아리가 깨진 순간에는 사람을 살릴 길을 일러 주었다. 그 뒤에는 독고무흔을 좇아 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으며, 남은 것은 칼자국과 피 묻은 옷자락뿐이었다.
“그 사람은 왜 독고무흔을 쫓아간 걸까요?”
“둘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겠지.”
“마교의 명을 받은 건 아닐까요?”
“그랬다면 굳이 우리에게 독을 태우는 법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었을 게다.”
객사 안으로 시선을 던졌던 현허가 나직이 덧붙였다.
“허나 은혜를 입었다고 경계를 버려서도 안 된다. 저자는 필요하다면 우리를 벨 자야. 다만 마교의 칼을 쥐었다 해서 그 뜻까지 온전히 마교의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
풍은 고개를 끄덕였고 정파의 장로는 사람을 재료로 팔아넘겼고, 마교의 칼은 그들을 살릴 방법을 알려 주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 속에서는 정과 마가 흰 돌과 검은 돌처럼 선명히 나뉘었지만, 눈앞의 강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사람이 어느 편에 섰는지보다 눈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현허가 물었다.
“두렵느냐?”
“예.”
풍은 숨기지 않았다.
“저 사람들이 죽을까 봐 무서웠고, 제가 잘못해서 아영이나 어르신이 다칠까 봐도 무서웠습니다. 지금은 독고무흔 뒤에 얼마나 큰 자들이 있는지 몰라서 무섭고요.”
“그렇다면 산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풍은 현허를 바라보았고 떠보는 기색도, 나무라는 빛도 없었으며 정말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막지 않을 듯했다.
산정상의 집으로 돌아가 약초를 캐며 사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고 아침이면 익숙한 숲길을 걷고 해가 지면 화롯불 앞에 앉는 삶이었다. 바람과 새소리를 벗 삼아 지내면 피비린내도, 독무 속의 신음도 듣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때 객사 안에서 아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전까지 꺼질 듯 가늘었던 숨이 이제는 제법 힘을 품고 있었다.
풍은 손가락에 낀 금·은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밤 독무 앞에서 풍의 손에는 거센 힘이 실렸고 은빛 반지는 멀리 북쪽을 더듬듯 떨렸지만, 두 반지 모두 까닭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힘의 근원도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지닌 채 보고도 돌아선다면, 그 순간부터는 알지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 반지가 어떤 길로 풍을 이끌든 끝내 그 힘을 어디에 쓸지는 스스로 정해야 했다.
“무림맹으로 가겠습니다.”
풍의 대답에 현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독고무흔보다 먼저, 어르신께서 믿을 수 있다는 분을 만나겠습니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확인하고 싶습니다.”
“편한 길은 아닐 게다.”
“산을 내려올 때부터 편한 길만 걷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현허의 입가에 엷은 주름이 잡혔으나 칭찬도 만류도 이어지지 않았고 그는 풍의 어깨를 한 차례 눌렀고, 그 손길은 선택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잠시 뒤 객사 문이 열리며 아영이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 아이는 제대로 걷기도 어려운지 비틀거렸지만, 마당 한편에 서 있던 노파를 발견하자 손을 놓고 달려가려 했다.
“할미…….”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라진 손주의 신발을 품에 안고 거리를 헤매던 바로 그 노파였고 노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 있다가 아이가 두어 걸음 만에 넘어지자 비명을 삼키며 달려왔다. 두 사람은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서로를 끌어안았다.
“살았구나. 아이고, 내 새끼가 살았어…….”
아이는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마른 팔로 노파의 목을 감았다. 노파는 그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면서도 손에서 놓칠까 두려운 듯 품을 풀지 않았으며, 아영은 고개를 돌려 눈가를 훔쳤다. 풍도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치른 사투의 빚을 갚는 일이라면 저 포옹 하나로 충분했다. 하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었고, 그들을 끌고 간 자들은 북쪽 어딘가에서 다음 밤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동이 트자 현허는 마을 사람들과 생존자들을 숨길 장소를 정했고, 아영은 의원에게 가져갈 명단과 약재를 챙겼다. 풍도 아직 비어 있는 단전을 다독이며 길을 나설 채비를 했다.
독고무흔보다 먼저 믿을 사람에게 닿아야 했고 풍은 대답 없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림맹 안에도 이미 독고무흔의 전갈을 기다리는 자가 있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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