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21화 무림맹(武林盟)

보름은 빠르게 흘렀다.

송진의 주선으로 성시 동쪽의 작은 객잔에 묵게 된 뒤, 풍은 해가 뜨기 전이면 현허와 함께 뒷마당에서 운기했고 낮에는 아영과 거리를 돌았다. 막동은 개방의 연락망을 오가며 흑수방에 관한 소식을 모았으나, 두 창고가 비었다는 급보도, 갇힌 이들이 옮겨졌다는 전갈도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풍의 마음에는 노하촌에서 가져온 장부가 무겁게 걸렸다. 장부 두 권과 검은 이리 문양의 나무패, 독병은 송진이 마련한 은밀한 곳에 나누어 숨겨 두었지만, 증좌가 안전하다고 해서 진실까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림맹 안에서 독고무흔을 비호하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잘못된 손에 장부의 존재가 들어가는 순간 살아남은 증인들부터 위험해질 터였다.

더구나 막동이 흑수방에서 들었다는 말은 장부의 암호 한 줄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초엿새, 흑수 세 수레. 북문을 지나 백학에게 인계.’

장부에서 백학은 사람 이름인지, 문파를 뜻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표기였고 다만 막동은 흑수방도들이 사람을 넘길 때마다 ‘학이 내려오는 날’을 입에 올렸다고 했다. 같은 표현이 우연히 겹쳤다고 보기에는 날짜와 인원까지 너무 또렷했다.

“원본은 송진에게 맡긴다.”

비무대회를 사흘 앞둔 밤, 현허가 등잔불 아래 펼쳐 둔 베낀 장부를 접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 일부만 가지고 맹 안으로 들어간다. 누가 백학이라는 글자에 반응하는지 살펴야 하느니라.”

풍은 얇은 종이를 받아 들었고 노하촌에서 사라진 이들의 날짜와 북쪽 운송 기록, 흑수방의 말과 맞아떨어진 암호만 옮겨 적은 것이었다. 종이 한 장에 불과했지만, 이것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손끝이 저릿했다.

“믿을 만한 분에게 바로 보이면 안 됩니까?”

“믿을 만하다고 여긴 자가 정말 믿을 만한지는 어찌 알겠느냐.”

현허의 대답은 짧았고 풍은 더 묻지 못했다. 전 무림맹 원로였던 현허조차 사람을 가려 믿어야 한다면, 자신은 말투나 옷차림만으로 누구를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비무대회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아영이 베낀 장부를 풍의 속옷깃 안쪽에 넣고 가는 실로 봉하며 말했고 바늘이 천을 오갈 때마다 종이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참가자는 연무장과 내원 일부를 드나들 수 있고, 성적이 좋으면 원로들이 직접 부르기도 한다면서요. 누가 우릴 보고, 누가 지나치게 알려 드는지 살필 수 있어요.”

“그렇지. 이름을 얻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이름이 문을 열게 하는 열쇠일 뿐이니라.”

현허는 풍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허나 문이 열렸다고 성큼 들어서지는 말거라. 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손님맞이인지 칼날인지 모를 때는, 문턱부터 살피는 법이다.”

풍은 옷깃 아래 감춰진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러 보았고 금빛 반지와 은빛 반지는 지난 보름 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석실의 문자를 삼킨 뒤 깊은 잠에 빠진 듯했지만, 풍은 그 침묵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고 이번에는 반지가 아니라 자신의 눈과 판단으로 길을 찾아야 했다.

성시는 비무대회가 다가올수록 눈에 띄게 붐볐다. 문파의 깃발을 단 마차들이 대로를 메웠고, 객잔마다 빈방이 사라졌으며, 병장기점 앞에서는 젊은 무인들이 새 검과 도를 고르느라 목소리를 높였다. 변경 장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화려함이었으나 풍은 처음 며칠처럼 넋을 놓고 구경하지 않았다. 비단 무복 아래 감춰진 호흡, 서로 스칠 때 자연스레 칼자루를 가리는 손, 같은 문파끼리 모여서도 자리를 다투는 눈빛이 먼저 보였다.

막동은 그런 풍의 곁에서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저 매화 문양은 화산파요. 이번에 매화검수 가운데 아주 대단한 이가 왔다더이다. 저쪽 흰 장포는 남궁세가, 부채를 든 소저는 제갈세가의 제갈소소고. 사천당가에서도 독과 암기를 익힌 후기지수가 셋이나 왔다지요.”

“그걸 다 어떻게 압니까?”

“개방 제자가 밥은 굶어도 소문을 굶으면 쓰겠소?”

막동이 코밑을 훔치며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목소리를 낮추더니, 대로 건너편의 찻집을 턱짓했고 창가에는 무림맹 소속 무사 둘이 앉아 지나가는 참가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저치들만 보는 게 아니오. 대회에 참가하려는 자가 어느 객잔에 묵는지, 누구와 만나는지도 맹 안으로 보고가 들어간답디다. 형씨는 송진 어르신의 추천으로 등록했으니 더 눈에 띌 게요.”

풍은 무사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고 감시를 받는다는 사실보다, 그 보고를 받아 보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독고무흔이 살아 있다면 풍 일행이 무림맹으로 향했다는 사실도 이미 전해졌을지 몰랐다.

“그럼 객잔에만 숨어 있어야 하나?”

아영이 묻자 막동이 고개를 저었다.

“숨으면 숨는 대로 수상하지요. 대회에 나올 사람이 대회 구경하고, 병장기점 둘러보고, 국수도 먹는 게 제일 자연스럽소.”

“국수는 네가 먹고 싶은 거잖아.”

“정보를 모으려면 배부터 든든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영이 피식 웃었고, 풍도 입가를 풀었고 노하촌을 떠난 뒤 마음 놓고 웃을 때가 많지 않았기에 그런 짧은 실랑이가 반가웠다. 다만 옷깃 속 종이의 감촉은 한시도 잊히지 않았다.

대회를 하루 앞둔 아침, 참가패를 받기 위해 무림맹 외원으로 들어선 풍은 처음으로 총단의 위용을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높은 담장 너머로 겹겹의 전각이 솟았고, 검은 기와 위에는 정파 문파들의 깃발이 바람을 받아 펄럭였고 중앙 연무장에서는 목검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등록 줄에는 이미 수십 명이 서 있었다. 문파의 추천서를 든 이들은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지만, 변방 무관이나 이름 없는 사문의 젊은이들은 무공 연원과 신분을 거듭 확인받았다. 풍의 차례가 오자 탁자 뒤의 집사가 송진의 추천장을 펼쳐 들고 한참이나 인장을 들여다보았다.

“단풍. 사문은?”

“현허의 제자입니다.”

주변의 소음이 잠시 엷어진 듯했고 집사의 붓끝이 허공에서 멎었고, 곁에 앉아 있던 무림맹 무사가 풍을 새삼스레 훑었다.

“현허라면…….”

집사는 뒷말을 삼켰고 무림맹을 떠난 원로의 이름이 이곳에서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풍은 그 반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추천인은 송진 원로로군. 하지만 현허의 제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사문패는 없고?”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비 심사를 거쳐야 한다. 내공의 정순함과 기본 초식을 확인한 뒤 참가패를 내주겠다.”

풍은 고개를 끄덕였고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무공을 얼마나 보여 주느냐였다. 기맥을 보는 눈도, 금빛 반지의 힘도 감춰야 했고, 현허에게 익힌 절학을 고스란히 펼치면 그의 적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때 줄 뒤편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비 심사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양쪽으로 비켜서자 새하얀 무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앞으로 걸어왔고 허리에는 은빛 장식의 장검이 걸려 있었으며, 그 뒤로 남궁세가의 표식을 단 무인들이 따랐다. 막동이 멀리서 가리켜 알려 주었던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휘였다.

남궁휘는 풍보다 먼저 탁자 위 추천장을 보았다.

“송진 원로의 인장은 진짜로 보입니다. 하지만 추천받은 자가 누구인지까지 인장이 보증해 주지는 않지요. 더구나 현허 원로의 이름을 함부로 내세웠다면, 무림맹의 체면과도 관계된 일입니다.”

말투는 공손했으나 물러설 틈이 없었고 집사도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못했다. 남궁세가는 무림맹의 주요 세가였고, 남궁휘는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후기지수인 동시에 세가 대표를 따라 등록 절차를 참관할 자격을 받은 듯했다.

“남궁 소협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한데 어찌 확인하면 좋겠소?”

집사가 묻자 남궁휘의 시선이 풍의 행낭으로 향했다.

“신원을 증명할 패가 없다면 소지품을 확인해야겠지요. 요즘 사도련의 무리가 성시까지 스며들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출처가 수상한 물건이 없는지도 살펴야 할 겁니다.”

풍의 심장이 한 번 세게 뛰었고 행낭에는 증거가 없었지만, 옷깃에는 베낀 장부가 들어 있었다. 몸수색까지 이어진다면 종이를 지키기 위해 힘을 써야 하고, 그런 소란이 벌어지는 순간 송진과 현허의 이름까지 드러날 터였다.

“참가자 전원을 같은 방식으로 확인하나요?”

아영이 풍보다 반걸음 먼저 나섰고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남궁휘가 아영을 돌아보았다.

“그럴 필요는 없소. 정식 사문패가 있는 이들은 신원이 분명하니까.”

“그럼 신분이 아니라 출신을 가려 조사하는 셈이군요. 명문세가의 패를 훔친 자는 행낭을 열지 않고, 이름 없는 스승에게 배운 사람은 죄인처럼 뒤지겠다는 뜻이니까요.”

줄에 선 무인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고 사문이 크지 않은 이들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떠올랐고, 집사는 난처한 듯 수염을 쓸었다.

남궁휘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다.

“말을 교묘히 돌리는군. 나는 이 자만 조사하자고 한 것이오. 현허 원로의 이름은 누구나 빌려 쓸 만큼 가볍지 않으니.”

“그러니 더더욱 무림맹의 정해진 절차로 확인해야지, 참가자인 남궁 소협이 소지품을 내놓으라 할 일은 아니죠.”

아영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고 풍은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여기서 자신이 힘으로 막으면 남궁휘의 의심만 키울 터였고 반대로 순순히 수색을 받으면 증거가 노출될 수 있었다.

두 가지 모두 피해야 했다.

“예비 심사를 받겠습니다.”

풍이 말했다.

“대신 심사에 합격하면, 정해진 규칙대로 참가패를 주십시오. 제 물건을 조사해야 한다면 저뿐 아니라 같은 조건으로 등록한 이들에게도 같은 규칙을 적용하고, 무엇을 찾는지 먼저 밝혀 주시고요.”

집사가 풍을 보았고 남궁휘 역시 말없이 시선을 옮겼다.

“무림맹의 대회라면, 사람에 따라 규칙이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풍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주변의 웅성거림을 가르고 또렷하게 퍼졌고 집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탁자 아래에서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옳은 말이다. 등록 규정에 없는 수색을 이 자리에서 행할 수는 없지. 예비 심사는 뒤편 시험장에서 치른다. 세 초식 안에 시험관을 한 걸음 물러서게 하면 합격으로 하겠다.”

남궁휘가 입을 열었다.

“제가 시험관을 맡지요.”

집사의 얼굴이 굳었다.

“남궁 소협은 참가자요. 다른 참가자의 심사를 맡길 수는 없소.”

“그렇다면 참관만 하겠습니다. 현허 원로의 제자라면 세 초식으로 부족할 리 없을 테니까.”

남궁휘는 풍을 향해 얕게 고개를 기울였고 단순한 거만함으로 치부하기에는 눈빛이 지나치게 침착했다. 풍은 그가 자신을 깔보는 것만이 아니라, 현허의 이름과 송진의 추천이 함께 나타난 까닭을 캐고 있음을 느꼈다.

시험장은 외원 담장 아래 마련돼 있었으며 풍의 상대는 굵은 팔에 철봉을 든 중년 무사였다. 무사가 기세를 끌어올리자 단단한 내력이 두 다리에서 허리, 어깨로 이어졌고 풍은 기맥시를 완전히 열지 않은 채 흐릿한 기의 움직임만 받아들였다.

첫 초식이 날아왔고 철봉이 바람을 터뜨리며 어깨를 노렸다.

풍은 반걸음 비켜서며 봉의 옆면을 손바닥으로 밀었고 힘을 맞받지 않고 방향만 틀자 철봉 끝이 흙바닥을 긁었다. 중년 무사는 즉시 허리를 돌려 봉을 횡으로 휘둘렀고, 두 번째 공격은 첫 번째보다 빠르고 낮았다.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피하기만 해서는 상대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다.

풍은 왼발을 축으로 몸을 낮추고 봉 아래로 파고들었고 금빛 반지가 미세하게 검지를 조였으나 의지로 눌렀다. 대신 봉을 쥔 무사의 손목에 손끝을 대고, 충돌하는 힘을 팔꿈치 쪽으로 흘렸고 중년 무사의 자세가 흔들렸지만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두 초식이 지났다.

풍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험관의 기본기가 생각보다 단단했으며, 남궁휘가 지켜보는 앞에서 어설프게 힘을 감추다가는 탈락할 수도 있었다. 반지를 쓰지 않고, 현허의 절학도 온전히 드러내지 않으면서 한 걸음을 물러서게 해야 했다.

중년 무사가 세 번째로 철봉을 찔러 왔고 이번에는 곧게 뻗는 척하다가 끝에서 궤적을 비트는 변화가 숨어 있었다. 풍은 찰나의 망설임 끝에 봉을 피하지 않았고 오른손으로 봉끝을 스치듯 누르고 왼손을 그 아래 받친 뒤, 밀려오는 힘을 원을 그리며 되돌렸다.

철봉이 빙글 돌아갔다. 중년 무사의 상체가 제 힘에 끌려 앞으로 기울었고, 풍이 어깨를 가볍게 밀자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시험장은 조용해졌다.

중년 무사는 철봉을 바로 세우며 풍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이다.”

풍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고 세 초식뿐이었지만 손바닥이 얼얼했다. 기맥을 선명히 보지 않은 채 상대의 변화를 받아 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집사가 참가패를 건넸고 풍이 그것을 받아 허리춤에 매는 동안, 남궁휘는 시험관의 발자국과 풍의 손을 번갈아 살폈다.

“힘으로 물러서게 한 것이 아니군.”

“규칙에는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더 흥미롭군.”

남궁휘는 비웃지 않았고 오히려 처음보다 경계가 짙어진 얼굴로 풍을 마주했다.

“대회에서 만나게 되면 네 사문이 진짜인지 직접 확인해 보겠다. 그때도 세 초식만 감추고 끝낼 수는 없을 테지.”

“만나게 된다면 피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맞부딪쳤고 풍은 남궁휘의 검이 장식물이 아님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검집 안에 갇힌 기운이 물결처럼 고르고 날카로웠으며, 조금 전 시험의 움직임도 하나도 놓치지 않은 눈이었다. 실제로 맞서기 전에는 승부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남궁휘는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고 몇 걸음 가던 그가 문득 멈춰 집사에게 말했다.

“외원에 들어오는 자들의 기록은 오늘부터 따로 보관하십시오. 사도련의 첩자가 있다면 등록 과정부터 살펴야 할 테니.”

풍은 그 말을 들으며 옷깃을 만지지 않으려 애썼고 남궁휘가 독고무흔과 관련됐다는 증거는 없었다. 어쩌면 무림맹의 안전을 진심으로 염려했을 수도 있고, 단지 현허의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뿐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그는 무시하고 지나칠 상대가 아니었다.

아영이 곁으로 다가와 낮게 물었다.

“괜찮아?”

“응. 종이도 그대로야.”

“저 사람, 마음에 안 들어.”

“나쁜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겠어.”

풍은 멀어지는 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를 살피는 건 분명해.”

대회 당일, 무림맹의 연무장은 새벽부터 사람들의 열기로 들끓었다. 참가패를 찬 젊은 무인들이 네 개의 비무대 주변을 메웠고, 높은 관중석에는 각 문파의 어른들과 무림맹 원로들이 자리했다. 풍은 화려한 깃발보다 그 얼굴들을 먼저 훑었다. 누가 송진과 눈을 마주치는지, 현허의 빈자리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백학’이라는 암호와 이어질 만한 단서가 있는지를 살폈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현허와 아영, 막동은 일반 관중석 한편에 앉아 있었으며 현허는 눈에 띄지 않는 잿빛 장포를 걸쳤고, 막동도 오늘만큼은 목소리를 낮췄다. 아영이 풍을 발견하고 주먹을 들어 보이자, 풍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상에 오른 장로가 간단한 규칙을 알렸다. 추첨으로 짝을 정해 한 사람이 항복하거나 비무대 밖으로 나가면 승부가 끝나며, 살수와 치명적인 독은 금지된다고 했다. 설명이 길어지기도 전에 첫 추첨함이 열렸고, 참가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단상으로 쏠렸다.

이름이 하나씩 불렸고 화산파의 매화검수, 사천당가의 젊은 무인, 제갈소소, 남궁휘. 함성과 탄식이 번갈아 터지는 가운데 풍은 제 이름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가만히 두 눈에 기를 끌어올렸다.

수백 갈래의 기맥이 연무장 위에서 일렁였다. 맑고 곧게 솟는 흐름도 있었고, 칼날처럼 가늘게 벼린 기운도 있었으며, 겉으로는 잔잔하나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맥도 보였다. 모두를 단번에 읽을 수는 없었고 누구를 먼저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부터 판단해야 했다.

비무대회는 이름을 얻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풍에게 이곳은, 썩은 뿌리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그때 단상 위에서 마침내 그의 이름이 불렸다.

“다음 참가자, 단풍.”

풍은 옷깃 안쪽에 숨긴 장부 조각을 한 번 떠올린 뒤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추첨함에서, 맞은편 이름패가 천천히 뽑혀 나왔다.

회차 끝 21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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