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제20화 옛 벗

막동의 손가락이 장부 조각 위를 천천히 훑다가 ‘백학’이라는 두 글자에서 멎었다.

“어젯밤 들은 말과 순서까지 같소.”

문 쪽을 살핀 막동이 목소리를 낮췄다.

“흑수방 놈들이 북문 창고의 물건을 두고 다투더이다. 세 수레 모두 값이 매겨졌고, 초엿새에는 학이 내려오니 손대지 말라고 했소.”

장부에 적힌 날짜와 수레 수, 북문이라는 표기가 막동이 들은 말과 맞아떨어졌다. 백학이 사람인지 문파인지, 거래에 쓰이는 암호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으나 우연으로 넘기기에는 겹치는 대목이 너무 또렷했다.

풍은 당장 창고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동구 할멈과 황우의 얼굴을 떠올렸고 현허는 장부 조각을 거두고 등잔의 재로 종이가 놓였던 흔적을 지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성시로 간다. 여기서 얻은 사실은 송진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네 사람은 동이 트기 전에 객잔을 빠져나왔다. 막동이 앞장선 덕에 흑수방의 세력이 미치는 고을을 피해 갈 수 있었고, 개방이 남긴 표식을 따라 물과 쉴 곳도 어렵지 않게 구했다. 석실을 나온 뒤 잠잠해진 금빛 반지와 은빛 반지를 풍이 한 차례 살피자 현허가 나직이 경계했다.

“잠든 것을 일부러 깨우지 말거라.”

“예. 이번에는 제 힘으로 걸어 보겠습니다.”

막동은 그 말을 듣고도 반지에 관해 캐묻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길가에서 짚신을 고치던 행상인에게서 소식을 받아 왔는데, 두 창고와 북문에는 아직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으며 관아에 잡힌 흑수방도들도 그대로 갇혀 있다는 내용이었다.

풍은 피해자들이 황급히 옮겨졌다는 전갈이 없다는 데 작은 안도감을 느꼈고 막동은 더 확실한 소식이 들어오면 성시의 개방 분타를 통해 알리겠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변경을 벗어나자 비무대회를 보러 가는 무인들이 길에 늘어났다. 새 무복을 차려입은 후기지수들은 객잔마다 이름난 무공과 우승 후보를 논했고, 문파의 깃발을 단 마차가 지나갈 때면 행인들이 길을 비켜 고개를 내밀었다.

풍도 처음 보는 병장기와 보법에 눈길이 갔지만 기맥시는 열지 않았다. 칼을 어느 높이에 차는지, 낯선 이가 다가올 때 어느 발을 먼저 빼는지만 살펴도 무인이 몸에 들인 습관은 어렴풋이 드러났다.

“눈이 바빠 보이는구나.”

현허의 말에 풍은 앞서 걷던 검객의 발을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다들 걷는 모양부터 달라서요.”

“보이는 것을 전부 안다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눈으로 배우는 것도 수련이니라.”

성시의 높은 성벽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길을 떠난 지 이레째 되는 오후였다. 성문 위에는 여러 정파의 깃발이 나란히 펄럭였으며, 겹친 지붕 너머로 무림맹 총단의 전각이 우뚝 솟아 있었다. 먼발치에서도 그 위세가 느껴졌지만 현허는 총단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성시 서쪽 약재 거리로 일행을 이끌었다.

막동과 아영이 바깥에서 망을 보는 동안 풍은 현허를 따라 오래된 의원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약재 냄새가 밴 복도 끝에서 의원 주인이 장롱을 밀자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문이 나타났고, 좁은 통로 너머 다실에는 회색 무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현허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은 채 탁자 위 나무패를 뒤집었고 밑면에는 칼끝으로 그은 듯한 흠집 세 개가 나 있었다.

“산신각 세 번째 기둥은 겨울마다 북쪽으로 갈라집니다.”

현허는 품에서 낡은 옥패를 꺼냈고 옛 무림맹 인장 옆에 난 세 줄의 칼자국이 나무패의 흠집과 같은 간격이었다.

“갈라진 틈에는 눈보다 먼저 솔잎이 쌓이지.”

그제야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허가 집법장로의 신패보다 뒷면 모서리에 난 오래된 칼자국부터 확인하자 그의 굳었던 어깨도 조금 풀렸다.

“오랜만이구나, 송진.”

“십수 년 만입니다, 형님.”

두 사람은 짧게 손을 맞잡았다. 반가움은 오래가지 않았고, 송진은 문을 잠근 뒤 벽의 약재함을 열어 빈 전서통 세 개와 최근 뜯긴 봉랍 조각을 내보였다.

“산신각 표식은 확인했습니다. 그 뒤로 변경 관련 전서가 두 차례 다른 부서로 넘어갔고, 형님의 이름을 묻는 자도 있었습니다. 답신하지 않고 여기서 기다린 까닭입니다.”

“누가 물었느냐?”

“집법당 서리가 원로원의 심부름꾼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심부름꾼도 명을 받았을 뿐이라 했으니 배후를 적을 만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현허는 장부 조각에서 일부만 드러내 송진에게 보였고 흑수와 북문이라는 글자를 살피던 송진은 종이에 손대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석 달 전 사라진 변경 보고서의 첨부 목록에 흑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원본을 찾았지만 보관함에는 표지만 남아 있었지요. 북문이 어느 고을을 뜻하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백학은?”

송진의 시선이 잠시 문으로 향했다.

“맹 안에서 쓰는 정식 표식은 아닙니다. 최근 원로원으로 들어간 물목 가운데 흰 학이 찍힌 봉함이 몇 차례 있기는 했습니다. 상단 문양으로 처리됐으나 장부에 발신처가 없었지요.”

막동이 들은 ‘학이 내려오는 날’과 노하촌 장부의 백학, 발신처 없는 흰 학 봉함이 풍의 머릿속에서 차례로 이어졌다. 서로 관련됐을 가능성은 컸지만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물증은 없었고 조급하게 하나로 묶었다가는 다른 흔적을 놓칠 수도 있었다.

현허가 장부 두 권과 검은 이리 문양의 나무패, 독병을 확보했다고 밝히자 송진은 위치부터 묻지 않았고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본을 전부 제게 주지 마십시오. 맹의 인장이 찍힌 보관고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장부와 나무패, 독병은 나누어 숨기고 종이와 먹, 독의 성분도 서로 다른 사람에게 확인시키겠습니다. 감정하는 자들에게는 같은 사건의 물건이라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네가 직접 확인한 것은 어디까지냐?”

“변경 조사안이 두 번 막혔고 관련 보고서 일부가 사라졌습니다. 몇몇 원로는 마교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구실로 재조사를 미뤘지요. 다만 그들이 사람 거래에 가담했다는 물증은 없습니다.”

풍은 그 대답을 마음에 새겼다. 의심은 길을 찾게 해도 죄를 확정해 주지는 못했고, 기맥시 역시 몸에 남은 수련 흔적을 보여 줄 뿐 누가 누구의 명을 받았는지까지 밝혀 주는 눈은 아니었다.

송진이 신호를 보내자 아영과 막동도 다실로 들어왔다. 다섯 사람은 장부 원본과 나무패, 독병을 서로 다른 곳에 감추고, 무림맹 안에는 필요한 기록만 베낀 종이 한 장을 가져가기로 정했다. 한 사람이 붙잡히거나 마음을 바꾸더라도 증거 전부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맹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명분도 필요합니다.”

송진은 탁자 밑에서 후기지수 비무대회의 참가 공고문을 꺼냈다. 참가자는 외원 연무장과 지정된 전각을 오갈 수 있으며, 좋은 성적을 거두면 원로와 각 문파 대표 앞에 설 기회도 얻는다고 적혀 있었다.

“사람이 몰리면 감시도 늘겠구려.”

막동이 공고문을 훑자 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숨어서 접촉하기도 쉬워집니다. 참가자와 수행원, 상단 사람들이 한꺼번에 드나들 테니까요.”

송진의 시선이 풍에게 닿았다.

“풍 공자가 참가한다면 맹 안을 오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질 겁니다. 누가 현허 형님의 제자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노하촌이나 흑수라는 말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자가 누구인지도 살필 수 있겠지요.”

사람들 앞에서 무공을 펼치면 기맥시와 반지의 힘이 드러날 위험이 커졌다. 독고무흔의 전갈이 먼저 도착했다면 비무대의 상대보다 관중석에서 자신을 지켜볼 시선이 더 위협적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증거를 숨겨 둔 채 기다리기만 해서는 사라진 이들에게 다가갈 길이 없었다.

풍이 입을 열려는 순간, 처마 아래에서 종이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막동이 재빨리 뒷문을 열었으나 골목에는 약초 꾸러미를 든 행인들만 오갔고, 기둥 틈에는 접힌 종잇조각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비무대회 벽보에서 찢은 귀퉁이였고 뒷면에는 객잔 이름 셋과 학의 머리를 닮은 작은 먹그림이 남아 있었다.

“이 셋은?”

현허가 묻자 송진의 표정이 굳었다.

“둘은 비무대회 물자를 대는 상단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제 연락선이 접선에 실패했을 때 쓰려던 예비 숙소고요. 여러분이 머물 곳은 아닙니다.”

“이 그림이 장부의 백학을 뜻할까요?”

풍의 물음에 송진은 성급히 답하지 않았다.

“대회 관계자의 동선을 표시했을 수도 있고, 제 연락선을 지켜보는 자들의 표식일 수도 있습니다. 의원에 들어온 사람을 떠보려고 일부러 의심을 심어 둔 물건일 가능성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백학의 정체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였고 누군가 비무대회의 물자와 송진의 연락선을 한 장의 종이 위에 묶어 살피고 있었다.

송진은 성시 동쪽의 작은 객잔을 숙소로 정했고 자신의 이름이나 의원과 이어진 흔적 없이 빌린 곳이며, 종이에 적힌 세 객잔과도 거리가 있다고 했다. 일행은 의원을 나서는 시각과 길을 달리해 시선을 흩은 뒤 해가 저물 무렵 약속한 객잔에서 다시 만났다.

방 안에 모이자 현허가 풍에게 물었다.

“위험을 알고도 참가하겠느냐?”

“예. 제 힘을 자랑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를 보는 눈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반지와 기맥시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쓰지 않겠습니다.”

현허는 한동안 풍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고 아영은 참가 공고문을 접어 탁자 한쪽에 놓았고, 막동은 창가에 기대 성시의 불빛을 살폈다.

풍은 공고문 옆에 놓인 학 머리 종잇조각을 내려다보았고 노하촌에서 시작된 어두운 길은 흑수방을 지나 무림맹의 담장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을 열기 위해, 풍은 비무대회 참가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회차 끝 20

ReNovels · 한 회차씩, 이야기 속으로.

회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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