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해가 내려갈수록 발밑부터 어두워졌다.
무진은 늘어진 덩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든 칼로 자르면 두 걸음이면 지나갈 자리였다. 그는 덩굴을 옆으로 젖힌 뒤 몸을 숙였다. 어깨에 걸린 잎이 사각거렸다.
넘어가고 나니 바짓단에 가시가 붙어 있었다.
그는 가시를 하나씩 떼다가 칼을 내려다보았다.
좋은 칼이었다. 다만 가지를 다듬기 좋은 길이와 덩굴 너머를 찌르기 좋은 길이는 달랐다. 낮은 풀을 헤칠 때마다 허리를 굽힐 까닭도 없었다.
칼날이 길어졌다.
날 뿌리에 새긴 두 글자는 그대로인 채, 칼끝이 팔뚝만큼 앞으로 뻗었다. 손잡이까지 길어져 두 손으로 쥘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 무진은 앞쪽 손을 느슨하게 하고 허공을 한 번 그었다.
길이에 비해 끝이 가볍게 돌았다.
이번에는 무게를 끝으로 보냈다. 같은 모양의 칼이 손목을 아래로 당겼다. 내려치는 힘을 싣기 좋은 배분이었다. 다시 무게중심을 손가락 가까이 당기자 칼끝이 바람에 놓인 잎처럼 들렸다.
무진은 한 발을 옮기며 짧게 베었다.
손목이 멎은 자리에 날도 멎었다. 길이가 달라졌는데 몸이 그 차이에 끌려가지 않았다. 그가 바라던 균형이 쇠 안에서 곧바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면 자루를 바꿀 일도 없겠군.”
말하고 나니 웃음이 났다.
자루만이 아니었다. 칼 한 자루를 완성하고도 용도에 맞춰 몇 자루씩 더 만들던 세월이 있었다. 지금은 손에 든 것을 바꾸면 됐다.
그렇다고 모든 칼을 하나로 합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선을 뜨는 칼의 얇은 등, 장작을 쪼개는 칼의 묵직한 어깨. 서로 다른 쓰임이 빚어내는 모양에는 저마다의 맛이 있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맛까지 없앨 필요는 없었다.
무진은 칼을 짧게 되돌렸다. 처음 손에 쥐었던 길이가 돌아오자 손바닥이 편안해졌다.
칼끝을 눌러 휘었다.
엄지 아래에서 날이 둥글게 굽었다. 날의 단단함은 그대로였다. 그는 더 눌렀다. 칼끝이 손잡이 쪽으로 돌아와 고리를 그렸다. 보통 쇠였다면 벌써 부러졌거나 날이 뒤틀렸을 모양이었다.
손을 떼자 칼이 맑게 펴졌다.
팅.
작은 울림이 숲속으로 번졌다.
무진의 눈에 재미가 어렸다.
작업대 끝에서 줄자를 뽑던 손맛이 떠올랐다. 길게 뽑았을 때는 제 몸을 버티다가도 손가락으로 곡면을 눌러 주면 부드럽게 꺾이던 얇은 쇠띠. 둥근 통 안으로 말려 들어가면서도 다시 나오면 곧은 길이를 되찾았다.
그는 칼날을 길고 얇은 띠로 폈다.
손잡이 앞에서 은빛 띠가 달팽이 껍데기처럼 감겼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둥근 겹이 생겼다. 날끼리 닿아도 서로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면을 나눴다. 바깥쪽에는 매끈한 등을 두었다.
칼이 손안에서 작아졌다.
무진은 감긴 날을 엄지로 쓸었다. 튀어나온 모서리가 없었다. 그가 펴겠다고 생각하자 쇠띠가 허공으로 풀렸다. 이번에는 기다란 날이 곧게 뻗다가 끝에서 갈라졌다.
두 갈래, 네 갈래.
그는 곧 멈췄다.
숲을 지나는 데 칼날을 마구 벌릴 이유는 없었다. 날이 늘어나는 광경보다 그 사이에 걸려 찢어질 덩굴이 먼저 보였다.
갈라진 끝을 거두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 뒤집힌 우산이었다. 철물점 주인이 버리려던 것을 가져와 살의 꺾인 자리를 만져 본 적이 있었다. 가느다란 살 여럿이 한곳에서 펼쳐져 넓은 면을 받쳤다. 살 하나는 약해도, 곡선을 함께 세우면 바람을 받아냈다.
그는 칼을 원래대로 돌려 허리 높이에 띄웠다.
“그건 따로 만들자.”
땅속에서 가는 금속 줄기가 올라왔다.
흙이 솟구치지 않았다. 뿌리 사이에 박혀 있던 광석에서 필요한 것만 빠져나왔다. 돌은 제자리에 남았다. 철과 니켈이 손 위로 모였고, 멀리 산허리에 누운 낯선 은백색 금속도 가느다란 빛으로 이어졌다.
그 금속에는 밀어내는 성질이 깃들어 있었다.
열도 냉기도 아니었다. 바깥에서 누르는 힘을 표면을 따라 흘려보내는 결이었다. 무진은 그것을 철에 섞었다. 단단한 살은 뼈대가 되고, 충격을 흘리는 결은 살과 살 사이를 채웠다.
둥근 손잡이 하나가 생겼다.
그 위에서 여덟 개의 살이 펼쳐졌다. 살 사이에는 천보다 얇은 금속막이 차올랐다. 펼친 지름은 어깨를 넉넉히 덮었다. 안쪽은 무광의 짙은 회색, 바깥쪽은 비에 젖은 돌처럼 은은한 빛이었다.
무진은 그것을 머리 위에 들어 보았다.
가장자리를 조금 내리자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치지 않고 양옆으로 넘어갔다. 막은 가지에 눌려 움푹 들어갔다가 조용히 돌아왔다. 살의 굽힘이 손목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손잡이를 앞으로 기울였다.
우산의 둥근 면이 납작해지며 방패가 됐다. 서로 떨어져 있던 살끝이 맞물렸고, 둘레에는 두툼한 테가 생겼다.
그는 땅에 떨어진 돌 하나를 집어 가볍게 던졌다.
돌은 방패에 닿아 옆으로 미끄러졌다. 손바닥에는 가벼운 떨림만 남았다.
“비보다 좀 큰 것도 막겠네.”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는 방패를 접었다. 여덟 살이 한데 모이고 막이 그 사이로 가지런히 들어갔다. 접힌 물건은 짧은 막대만 했다. 손잡이 끝에 작은 각인을 남긴 뒤 허리에 댔다. 작업복 허리띠를 따라 얇은 고리가 생겨 그것을 받아 주었다.
칼에도 칼집이 필요했다.
무진은 날에 맞춰 얇은 쇠집을 만들었다. 넣을 때는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걸을 때는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는 안쪽 면을 두었다. 뽑아 보니 쇠끼리 긁히는 소리가 없었다.
허리가 조금 든든해졌다.
그제야 어깨와 팔에 남은 작업복의 찢어진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불에 그슬린 흔적은 없었지만, 오래 입어 천이 닳은 곳은 그대로였다. 숲의 저녁 공기가 소매 안으로 스몄다.
그는 옷깃을 세웠다.
나무 위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목덜미를 때렸다.
무진이 위를 보았다. 넓은 잎마다 낮 동안 머금었던 물이 맺혀 있었다. 비가 오면 이 숲은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흠뻑 젖을 듯했다.
“겉옷도 있어야지.”
이번에는 금속을 실로 뽑았다.
너무 가늘어서 빛을 받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었다.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는 감촉은 부드러웠다. 그는 그 실을 서로 엮다가 손을 멈췄다.
곧게 엮으면 팔을 뻗을 때 당겼다.
작업복 겨드랑이가 찢어지는 까닭을 모를 리 없었다.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비스듬히 짰다. 팔을 내밀면 작은 고리들이 기울어 여유를 내줬다. 목 둘레에는 실보다 납작한 고리를 써서 살에 닿는 면을 넓혔다.
쇠의 천이 그의 등 뒤에서 펼쳐졌다.
무진은 어깨에 걸쳤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망토가 작업복을 감쌌다. 걸음에 따라 옷자락이 흔들렸다. 금속을 입었다는 묵직함은 없었다. 마른 모시 한 겹을 더 두른 듯했다.
그는 팔을 크게 돌려 보았다.
앞자락이 팔꿈치에 걸리지 않았다. 몸을 숙여도 목깃이 목을 누르지 않았다. 어깨 위쪽은 빗물을 흘려보낼 만큼 촘촘했고, 등 안쪽에는 몸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빠질 틈이 있었다.
금속에 품긴 옅은 온기를 겹 사이에 고르게 눕혔다.
차던 등이 따뜻해졌다.
화롯가에 오래 앉아 뜨거워진 느낌은 아니었다. 볕에 말린 겉옷을 막 걸쳤을 때처럼 기분 좋은 온도였다.
무진은 망토 끝을 집어 눈앞에 들어 올렸다. 얇은 조직 사이로 숲의 초록이 비쳤다. 그가 손끝으로 누르자 그 자리만 작은 비늘처럼 단단해졌다가 다시 천으로 돌아왔다.
거친 가시에 자락을 대 보았다.
가시끝이 미끄러졌다. 실 한 올 뜯기지 않았다.
그는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가 색을 바꿨다. 너무 환한 은빛은 숲속에서 혼자 번쩍거렸다. 겉면을 짙은 먹빛으로 가라앉히고, 안쪽에는 따뜻한 구릿빛을 아주 엷게 남겼다.
옷자락이 뒤집힐 때만 저녁놀 같은 빛이 보였다.
“이 정도는 멋을 내도 되겠지.”
거울이 없었다.
그는 손바닥만 한 금속판을 띄워 얼굴과 어깨를 비춰 보았다. 낯익은 얼굴 아래로 낯선 망토가 걸려 있었다. 흰머리가 섞인 머리칼은 흐트러졌고 턱에는 수염이 거칠었다. 그래도 옷 하나 걸쳤다고 제법 사람 꼴이 났다.
망토의 여밈쇠는 아직 없었다.
무진은 둥근 장식을 만들려다가 망치 모양으로 바꿨다. 너무 뻔해서 다시 바꿨다. 끝내 남은 것은 손톱보다 작은 네모난 쇳조각이었다. 모서리를 부드럽게 깎고 그 한가운데 각인을 넣었다.
꾸미지 않은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금속 거울도 버리지 않았다. 테를 말아 날카로운 부분을 없앤 뒤 안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역시 망토 안쪽에서 필요에 맞춰 생겼다.
그 안에 무엇을 넣을지 생각하자 손이 근질거렸다.
집게부터 만들었다.
손가락을 덜 오므려도 입이 넓게 벌어지는 집게였다. 작은 물건을 잡는 끝에는 촘촘한 결을 냈다. 굵은 것을 물리는 안쪽은 완만하게 팠다. 엄지와 검지가 닿는 면은 살짝 벌어져 손바닥의 굳은살을 피했다.
다음은 망치였다.
허공에서 망치 자루를 찾던 오른손에, 익숙한 굵기의 손잡이가 들어왔다. 무진은 말없이 그것을 쥐었다.
손바닥 한가운데가 묵직해졌다.
굳이 무거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 무게는 좋았다. 내려칠 곳을 몸이 먼저 아는 듯한 무게였다. 한쪽 머리는 평평하게, 다른 쪽은 조금 둥글게 만들었다. 손잡이 끝은 빠지지 않게 부풀렸다.
망치 머리 옆에도 두 글자가 새겨졌다.
무진은 바위의 평평한 면에 작은 쇳조각을 올렸다. 마음만 먹으면 곧장 모양을 낼 수 있는 쇠였다. 그는 그것을 손가락 두 개로 눌러 잡고 망치를 들었다.
깡.
숲에서 쇠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깡, 깡.
소리는 나무줄기에 닿았다가 돌아왔다. 무진은 입술을 조금 벌렸다. 화로도 작업대도 없었지만, 오른손이 내려가고 왼손이 쇠의 방향을 돌리는 동안 잠깐이나마 익숙한 자리에 선 기분이 들었다.
세 번 더 두드려 작은 갈고리를 만들었다.
집게로 들어 빛에 비춰 보았다. 손으로 남긴 망치 자국을 지우지 않았다. 안쪽의 결만 가지런히 정리한 뒤 망토 안에 달았다. 집게가 그 갈고리에 걸렸다.
망치는 반대편 허리에 들어갔다.
그 밖에 송곳과 가는 정, 짧은 줄을 만들었다. 모두 손이 기억하는 자리를 조금씩 다듬은 물건이었다. 손가락이 쓸데없이 힘을 주지 않도록 면을 놓고, 어둠 속에서도 잡는 방향을 알 수 있게 자루마다 다른 굴곡을 냈다.
작은 공구들이 자리를 잡자 무진은 빈손을 폈다 오므렸다.
아무것도 없어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도 챙겨 두니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에서 소리가 났다.
그는 잠시 자기 배를 내려다봤다.
“그건 못 만들지.”
숲은 대답 대신 새 울음을 돌려주었다.
무진은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망토 자락이 가시를 받아냈다. 낮은 가지는 접은 방패를 펼쳐 밀어 올렸다. 칼을 쓸 일이 줄었다. 길을 내겠다고 살아 있는 가지를 베기보다 들어 올려 지나가는 편이 간단했다.
얼마 가지 않아 땅이 푹 꺼졌다.
어두워서 처음에는 낙엽이 두꺼운 줄 알았다. 발을 내려놓으려던 자리에 검은 진흙이 고여 있었다. 그 너머로 쓰러진 나무가 비스듬히 걸렸고, 물소리는 아래쪽으로 이어졌다.
무진은 주변을 살폈다.
건널 자리를 찾아 돌아갈 수도 있었다. 다만 지형을 보겠다고 뿌리가 얽힌 둔덕을 몇 번이나 오르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의 발 앞에 철편 하나가 놓였다.
두 발을 모아 디딜 만큼 넓었다. 표면에는 신발 바닥이 미끄러지지 않을 가는 빗금을 넣었다. 앞쪽 테는 조금 말아 올렸다.
무진이 올라서자 철편이 허공으로 들렸다.
진흙 위를 한 뼘쯤 떠서 움직였다. 그가 멈추면 멈추고, 방향을 틀면 그대로 돌아갔다. 발아래로 검은 물이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아래를 보다가 철편의 뒤쪽을 늘렸다.
서서 갈 이유도 없었다.
낮은 등받이가 올라왔다. 무릎이 편하게 굽혀지는 높이로 자리가 패였고, 양옆에는 팔을 얹을 테가 생겼다. 무진은 그 자리에 앉았다.
“좋네.”
따뜻한 망토를 두르고 물 위를 지나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나무뿌리 사이에 고인 물에는 벌레들이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철편의 그림자가 지나가자 은색 배를 가진 물고기가 잽싸게 숨었다. 무진은 속도를 늦췄다. 발을 적시지 않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앞에서 낮은 가지가 길을 가렸다.
철편을 위로 띄우자 가지 너머의 숲이 열렸다. 그는 나뭇잎 사이를 빠져나와 거목의 중간 높이까지 올랐다.
저녁 바람이 얼굴을 씻었다.
나무 꼭대기들이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멀리 산봉우리 아래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솟았다. 하나가 아니었다. 회색 기둥 여럿이 바람에 기울며 풀어졌다.
무진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연기 밑에는 낮은 지붕들이 있었다.
산 아래로 난 길도 보였다. 나무 사이에서 끊겼다가 다시 나타나는 흙길이었다. 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숲의 크기가 달라 보였다.
그는 철편을 그쪽으로 돌렸다.
곧장 나무 위를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붕 위에 내려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길 가까이에서 낮아졌다. 철편은 덤불 위를 지나 두 개의 바퀴 자국이 남은 흙길 앞에 멎었다.
어딘가에서 종이 울렸다.
맑은 종소리는 아니었다. 금이 간 작은 철종이었다. 무진에게는 그 금의 모양이 소리보다 먼저 닿았다. 길이와 깊이, 오래 두드려 얇아진 부분까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누가 왜 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 저편에 사람이 나타났다. 머리에 나뭇단을 얹은 여자와, 그 뒤에서 잔가지를 끌고 오는 소년이었다.
여자가 먼저 멈췄다.
소년도 걸음을 멈췄다가, 무진의 발아래를 보고 잔가지를 놓쳤다.
철편은 아직 땅에서 조금 떠 있었다.
“엄마.”
소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자가 아이를 제 뒤로 당겼다. 나뭇단이 기울어 가지 몇 개가 떨어졌다.
무진은 즉시 철편을 내렸다. 흙에 닿은 넓은 판에서 내려선 뒤 한 걸음 물러섰다. 접어 둔 방패와 허리의 칼이 눈에 띄는 듯해 두 손도 보이게 폈다.
“길을 묻고 싶습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평소와 같았다.
여자의 대답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법사님이세요?”
무진은 잠깐 생각했다.
쇠를 다룬다는 말로는 부족했고,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 길 한가운데서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대장장이입니다.”
소년이 어머니 옆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시선이 무진의 허리에 매달린 망치에서 발치의 판으로 내려갔다.
“대장장이는 그런 것도 타요?”
“나는 탑니다.”
여자가 아이의 어깨를 눌렀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떨어뜨린 잔가지도 잊은 눈이었다.
무진은 떨어진 장작을 가리켰다.
“실어 드릴까요.”
여자는 대답 대신 판과 무진을 번갈아 봤다.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 사이 철편 둘레에 낮은 테를 세웠다. 장작이 굴러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소년이 먼저 잔가지를 집었다.
“이거 올려도 돼요?”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가지가 판 위에 놓였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자 소년이 나머지를 서둘러 주워 올렸다. 여자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머리에 인 나뭇단을 내렸다. 굽혔던 목을 펴면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에 무진은 판을 조금 더 넓혔다.
“집이 멉니까.”
“울타리 안쪽 두 번째 길이요. 여관을 찾으시면 우물 건너에 있어요.”
여자의 말이 처음보다 길어졌다.
“다만 방이 남았는지는 모르겠네요. 요즘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밥부터 있으면 됩니다.”
소년이 무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배고파요?”
“많이.”
아이가 처음으로 웃었다.
셋은 흙길을 걸었다. 장작을 실은 철편은 무진이 움직이는 대로 옆을 따라왔다. 소년은 몇 번이나 뒤로 걸으며 판 아래를 들여다봤다. 여자는 그러다 넘어진다고 한 번 타일렀지만 자신도 자꾸 시선을 줬다.
숲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소년이 팔을 비비자 무진은 망토 안주머니에 넣었던 거울을 옮기고, 목 여밈을 조금 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이가 물었다.
“그거 쇠예요?”
“그렇다.”
“안 추워요?”
무진은 망토 자락을 조금 내밀었다.
소년이 어머니를 봤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손이 옷자락을 잡았다가, 금세 손바닥 전체를 댔다.
“따뜻해.”
이번에는 여자가 놀란 눈을 했다.
“젖지도 않습니까?”
무진은 숲에서 묻은 물방울을 손등으로 쓸었다. 방울이 천 속으로 스미지 않고 동그랗게 굴러 떨어졌다.
여자는 자신의 젖은 어깨를 만졌다.
“그런 걸 두르면 겨울에 나무하러 갈 때 좋겠네요.”
무진은 그 말을 기억했다. 도시의 옷걸이 앞에서는 떠오르지 않았을 쓰임이었다. 망토가 긴 사람에게는 장작을 지고 걷는 어깨도 있었다.
“어깨는 더 두툼한 게 낫겠군.”
“예?”
“그런 옷을 만들 때 말입니다.”
여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망토 안쪽의 구릿빛을 다시 봤다. 따뜻하다는 것을 안 뒤에도 눈길이 가는 모양이었다.
마을 울타리가 가까워졌다.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 사이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 앞에는 창을 든 사내 둘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소년의 아버지를 아는 듯 이름을 불렀다가, 장작을 실은 철편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내의 창끝이 내려왔다.
무진은 걸음을 멈췄다. 창을 빼앗거나 꺾지 않았다. 다만 여자의 나뭇단을 실은 판은 길가로 옮겨 두었다.
여자가 먼저 나섰다.
“숲길에서 만났어요. 장작을 들어 주셨어요.”
“들어 준 게 아니라…….”
사내는 떠 있는 판을 가리키다가 말을 삼켰다.
무진이 말했다.
“묵을 곳을 찾습니다. 값을 치르겠습니다.”
그는 주머니가 비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발밑 먼 광맥에서 은이 응답했다. 손가락 사이로 작은 은덩이가 맺혔다. 어느 나라 돈을 쓰는지도 모르니, 멋대로 동전을 찍을 수는 없었다.
각인 하나가 은 표면에 작게 남았다.
“이걸로 됩니까.”
문지기의 시선이 은에 붙었다.
소년은 여전히 판 아래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나뭇단을 내려놓은 어깨를 주무르며 웃었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셋의 얼굴은 전혀 달랐다.
이윽고 창끝이 옆으로 비켜났다.
문 안쪽에서 빵 굽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무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따뜻한 불빛 아래로 낮은 집들이 이어졌고, 우물가에서는 누군가 양동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는 장작을 실은 철편을 문 안으로 옮겼다. 소년이 앞장서서 자기 집 가는 길을 가리켰다. 망토 자락 안쪽의 구릿빛이 걸음마다 짧게 드러났다.
허리의 칼이 편안하게 흔들렸다.
한 자루를 쥐고 일어났던 숲을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도 금속의 결은 여전히 또렷했다. 무진은 망치 자루에 손을 얹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빵 냄새가 나는 쪽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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